▲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선생.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로부터 이동녕, 박찬익, 김구, 엄항섭 선생
‘힘 있는 자는 힘으로, 돈 있는 자는 돈으로, 정성 있는 자는 정성으로’
독립운동은 총칼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만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 자신의 잠재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쟁취하려는 것이 독립운동이다.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싸웠던 분을 꼽으라 하면 김구, 안중근, 윤봉길, 김좌진 등의 독립운동가들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 땅에 살았던 여성들 또한 대한 대한독립을 위해 힘을 보탰던 역사의 주역이다.
여성독립운동가라고 하면 유관순 열사만 떠올리지만 독립운동사에는 유관순 열사 이외에도 많은 여성독립운동가가 있었다. 남녀가 유별하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던 당시, 여린 몸으로도 할 줄 아는 것이 밥 짓는 것과 길쌈 밖에 없을지라도 앞서 배운 바가 있다면 당당하게 제몫을 하면서, 각자 자신이 지닌 능력을 다해 대한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친 여성들이 있다. 춘천의 여성의병장 윤희순, 여성광복군 1호 신정숙, 북한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동풍신, 수원의 논개 김향화, 용인의 딸 류쩌우, 열네살 독립군 오희옥, 종로경찰서에 폭탄 던진 김상옥 어머니 김점순, 애국교육자 김순애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여성들이 독립운동 전선에서 민족독립을 갈구하며 산화했던 것이다. 현재 국가에서 훈포장을 받은 여성독립운동가는 2012년까지 223명에 이른다. 올해 94돌 3.1절(삼일절)을 맞아 그동안 사회의 조명을 받지 못한 여성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의사
윤희순(1860∼1935) 선생은 유홍석 의병장의 며느리로 1907년 강원 춘성군에서 여성 30여명을 규합해 의병활동을 벌인 ‘제1호 여성 의병장’이다. 1860년 경기도 구리에서 윤익상과 평해 황씨의 큰딸로 태어난 윤희순은 유학자 집안에서 나고 자랐으며, 16세 되던 1876년 춘천 의병장 외당 유홍석의 장남이며 팔도창의대장 의암 유인석의 조카인 유제원과 결혼했다. 시아버지 유홍석의 영향으로 의병운동에 뜻을 두게 된 그는 1911년 만주로 망명, 시아버지와 남편을 도와 독립운동을 했다. 일본이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1896년 단발령을 발표할 무렵 윤희순은 ‘안사람 의병가’등 여러 노래를 지어 항일의식을 불러일으켰고, 여성들도 구국 활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또, 여자의병 30여 명을 모집해 다른 의병을 뒷바라지하거나 의병 훈련에 참여했다. 비록 직접 의병 전투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후방에서 그들을 적극 지원하며 의병운동에 힘을 쏟았다. 특히, 관군과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밀고자를 꾸짖었고, 그런 가운데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을 남겼으며, 이는 최초의 한글 의병가이자 민족 저항 시가이다. 윤희순은 1912년 초 환인현으로 이주하여 무논을 개발하여 벼농사를 짓고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항일 인재를 양성하려고 동창학교 분교인 노학당(勞學堂)을 창립, 김경도 및 박종수를 비롯해 50여 명의 항일운동가를 양성했다. 힘든 항일운동 와중에 그는 1913년 시아버지 유홍석이, 1915년에는 남편 유제원마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는다. 일제의 탄압으로 노학당이 폐교되자 무순 포가둔으로 이주해 중국인들과 힘을 합쳐 조선독립단을 만들었고, 1926년에는 조선독립단 가족부대, 조선독립단 학교를 설립했다. 이 무렵에도 직접 의병 훈련에 참여하였다. 1932년 무순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가 계획이 사전에 발각돼 실패하자 봉성현 석성 등지로 옮겨 지속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1935년 혜성현 묘관둔에서 8월 1일 숨을 거두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남자현(南慈賢, 1872~1933)은 경북 안동군 일직면 일직동에서 영남의 석학인 부친 남정한(南珽漢)의 3남매중 막내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품성이 단정하고 총명했으며, 7세 때에 국문에 능통하였고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소학과 대학을 통달하였다. 19세에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 사는 의성 김씨(義成 金氏) 김영주에게 시집 가 단란한 생활을 꾸렸으나 일제의 만행이 점차 극성을 부리자 남편 김씨는 결사보국을 결심하고 영양의병장 김도현 의진에서 왜군과 전투 중 전사하게 된다.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은 그는 복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3대 독자 유복자인 아들과 시부모를 봉양하지 않을 수 없어 양잠(養蠶)을 하며 손수 명주를 짜 내다 팔아 가계를 이어 나갔다. 여사의 나이 46세에 3?1운동이 일어나자 항일 구국하는 길만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 길임을 깨닫고 3월 9일에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통화현(通化縣)으로 이주해 서로군정서에 가입, 군사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했다. 한편 북만주 일대에 농촌을 누비며 12개의 교회를 건립했으며, 여성계몽에도 힘써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여권신장과 자질향상에 주력하였다. 망명생활 6년을 맞은 1925년에 사이토 마코토(재등실) 총독을 주살하기 위해 채찬(蔡燦) 등과 함께 국내에 잠입, 거사를 추진하였으나 삼엄한 경계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본거지로 되돌아가야 했다. 마침 인근 의성단장 편강렬·양기탁 등이 각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고 독립운동단체들을 찾아다니며 통합을 독려,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1932년 국제연맹 리턴조사단이 하얼빈에 도착하자 무명지를 끊어 ‘조선독립원’이란 혈서를 써서 끊어진 손가락과 동봉하여 전달, 조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1933년 만주 괴뢰정부 건국일(3월 1일)에 이규동 등과 함께 일본장교 부토 노부요시를 살해하려고 폭탄과 무기를 휴대하고 가다가 체포되었다. 옥중에서도 단식으로 항쟁하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하얼빈에서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1933년 8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당시 하얼빈의 사회유지, 부인회, 중국인 지사들은 여사를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존경하고 하얼빈 남강외인 묘지에 안장하여 입비식을 갖고 생전의 공로를 되새겼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희망의 조선 혼을 심어준 애국교육자 김순애
김순애(金淳愛, 1889~1976)는 1889년 5월 12일 황해도 장연에서 아버지 김성섬(金聖蟾)과 어머니 안성은(安聖恩)사이에서 태어났다. 남편은 독립 운동가인 김규식이며, 대한애국부인회의 김마리아는 그의 조카이기도 하다. 고향에서 송천소학교를 마친 김 애국지사는 1909년 6월 기독교계 학교인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에 진학하여 학업을 마친 뒤 부산의 초량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등 교육운동에 매진했다. 1910년 나라가 강제 병합되자 학생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지리를 몰래 가르치다가 왜경의 감시를 받게 되고 탄압이 가중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의사로 일하고 있던 오빠 김필순(金弼淳)과 함께 1912년에 만주 통화현으로 망명했다. 망명한 중국땅에서도 김순애는 활발한 독립운동을 쉬지 않고 펼쳤는데, 상해로 옮긴 뒤에는 상해지역 부녀자들을 규합하여 ‘대한애국부인회(1919년 6월)’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어 국내외 여성단체의 연계와 부녀자 계몽, 태극기 제작, 보급 등 애국심에 고취에 앞장섰다. 부활된 대한적십자사에도 참여하여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재중 교포 부녀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홍보, 모금, 선전 활동 등에 주력했으며, 성실함과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교포 사회 여성단체의 중망있는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1945년 11월 23일 김구, 김규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환국 제1진으로 함께 귀국한 이래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된 정신여중·고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956년에는 정신여중·고 재단 이사로 취임하는 등 교육운동에 투신했다. 정부는 김순애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1997년 6월에 이달의 독립운동가 인물로 선정해 그의 애국정신을 널리 알렸다.
27년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의 안주인 정정화
정정화(鄭靖和, 1900~1991) 선생은 직접 앞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말없이 정성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는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사지를 넘나들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고,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중경), 대한애국부인회 등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선생의 주된 활동 영역은 아니었다. 임시정부의 안주인, 이것이 바로 선생의 본분이나 다름없었다.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1946년 귀국하기까지 선생은 망명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임정 요인들의 뒷바라지에 바쳤다. 백범 김구는 물론 석오 이동녕(李東寧), 성재 이시영(李始榮) 등 임정 요인들 가운데 선생이 지어준 밥을 먹지 않은 분이 없었고, 임정의 가재도구 가운데 선생의 손때가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임정 요인들의 고달픈 망명생활은 선생이 있음으로써 위안이 되었고, 나아가 27년간이라는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임시정부의 역사도 선생이 있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정정화는 수원 유수를 지낸 정주영(鄭周永)과 이인화 사이의 2남 4녀 가운데 셋째 딸이었다. 부친은 충남 예산에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은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의 귀여움뿐 아니라 두 오라버니와 언니들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정정화는 11살이 된 1910년 가을 김가진(金嘉鎭)의 3남인 동갑내기 신랑 김의한(金毅漢)과 혼인했다. 김의한과 결혼하면서 선생은 세상 물정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화파 집안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남편 김의한의 영향이 컸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시아버지인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이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하자 친정아버지에게 8백원을 얻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은 그는 1920년 비밀연락망인 연통제를 통해 국내로 잠입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으며 연통제가 폐쇄되자 야음을 이용하여 압록강을 건너 밀사 역할을 수행했다. 1940년 3월 임정의 맏어른이자 영도자였던 이동녕이 사천성 기강현에 있는 임정 건물 2층 침소에서 71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도 마지막까지 그를 간호하며 임종을 지킨 분이 바로 선생이었다. 나아가 임정의 안주인으로 1941년 1월 기강에서 중경 근처의 토교로 임정 가족들이 이사할 때, 이를 주도하기도 했다. 특히, 1940년 9월 중경으로 옮겨오면서 민족의 모든 역량을 대일 항전에 결집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여 가자 1943년 2월 각 정파의 부인들 또한 중경에서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개최했다. 여성차원에서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선생은 훈련부 주임, 김순애는 주석, 박순희는 부주석, 그밖에 최소정ㆍ김운택ㆍ연미당ㆍ강영파ㆍ권기옥 등이 각 부 주임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 김구로부터 ‘한국의 잔다르크’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해방 후 귀국한 그는 한국전쟁 당시 남편 김의한은 납북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고, 1991년 사망해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북한의 유관순’ 동풍신
동풍신 (董豊信, 1904~1921)은 1919년 3월 함경도 길주의 화대 장터에서 독립 만세를 부른 순국 소녀이다. 특히 남에는 유관순, 북에는 동풍신이라 할 정도로 유관순 열사와 필적할 만한 독립운동의 업적을 이뤘다. 함경북도 명천(明川)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하가면 화대동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은 3월 14일 함경북도에서 펼쳐진 만세시위 중 최대 인파인 5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화대헌병분견소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한 곳이다. 이날 화대장터에는 오랜 병상에 누워있던 동풍신의 아버지 동민수가 전날의 시위 때 일제의 흉탄에 동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음을 각오하고 병상을 떨치고 일어나 이에 참여했다. 그러나 동풍신의 아버지는 만세시위를 벌이던 중 길주헌병대 제27연대 소속 기마헌병과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동풍신은 현장으로 달려와 아버지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통곡했으며, 아버지를 들쳐 업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동풍신이 슬픔을 딛고 결연히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치자 시위군중은 크게 감동하여 힘을 모아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 경찰은 ‘미친 소녀’라 하여 총을 쏘지 않고 동풍신을 체포했고, 함흥 재판소로 잡혀간 동풍신은 “만세를 부르다 총살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만세를 불렀다”고 말할 뿐 갖은 고문에도 애국심을 굽히지 않았다.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악랄한 고문 끝에 17살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원의 논개 김향화
김향화(金香花, 1897. 7. 16~미상)는 기생으로 3.1운동 당시 수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3월 1일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전국적인 독립만세 운동은 수원 지방에서도 있었다. 매일신보 1919년 3월 29일자에 보면 “수원은 3월 25일 이후 4월 4일에 이르는 동안 읍내를 비롯하여 송산, 병점, 오산, 발안, 의왕, 일형, 향남, 반월, 화수리 등 군내 각지에서 연이어 시위가 있었는데 대체로 수백 명이 모였으며 더욱 장날을 이용한 곳에서는 천여 명이 넘었다. 일경의 발포로 수십 명이 사상되고 수백 명이 체포되었는데 29일 읍내 만세 때는 기생일동이 참가하였고 기생 김향화가 구속되었다”라는 기사가 눈에 띈다. 행화(杏花), 순이(順伊)라는 이름으로도 불린 김향화는 3월 29일 경기 수원군 자혜병원 앞에서 기생 3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수원 기생조합 출신이다. 건강검진을 받으려고 자혜병원으로 가던 중 동료와 함께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주도해 의기(義妓)로서 기상을 높였다. 김향화가 속한 기생조합은 1914년 이후 일제에 의해 일본식 명칭인 ‘권번’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권번은 파티나 연회장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에서 유래한다. 이것은 일본 내 기생들의 기관이자 기생학교였던 ‘교방’의 기능을 민간에서 모방한 것으로 대정(大正,1912~1926) 기간에 일본에서 예기들의 조합을 좁혀서 ‘칸반(爛番)’이라고 하였고, 조선총독부는 그 한자음을 따와 ‘권번’ 시대를 열어갔다. 권번은 어린 기생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요릿집 출입을 지휘하는 역할을 했는데, 김향화는 특히 검무와 승무를 잘 추고 가야금을 잘 뜯던 일등 기생이었다. 김향화를 비롯한 수원기생들은 고종 임금이 돌아가셨을 때도 나라 잃은 설움을 토해냈다. 당시 고종 임금의 승하 발표가 나자 기생, 광대, 배우들은 모두 휴업을 하고 근신에 들어갔다. 1월 27일 고종 장례에 맞춰 수원기생 20여 명은 소복을 입고, 나무 비녀를 꽂고, 짚신을 신고 수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대한문 앞에서 망곡(국상을 당해 대궐 문 앞에서 백성이 모여 곡을 하는 것)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김향화를 중심으로 한 수원기생들의 애국 혼은 불타올랐다. 그러나 만세운동 이후 김향화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여성을 넘고 아낙의 너울을 벗은 한국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
최은희(崔恩喜,1904~1984) ‘최은희는 한국 최초 여기자이며 최초로 전파에 목소리를 싣고 민간인으로는 최초로 서울 상공을 난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닐 만큼 지식인으로 일제강점기를 살아낸 여성 선각자이다. 황해도 연백출신으로 1919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니혼여자대학 사회사업학부를 중퇴했으며, 그 뒤 196,9년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를 받았다. 1924∼1931년 조선일보 기자·학예부장을 지낸 그는 1927년 근우회(槿友會) 중앙위원, 1948년 대한부인회 서울시부회장, 대한여자국민당 서울시당수(1962), 한글학회 지도지원(1971), 3·1국민회의 대표위원(1971∼1973), 3·1운동여성참가자봉사회장(1981) 등을 역임했다. 3·1만세운동이 있기 하루 전인 2월 28일 저녁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최은희는 “내일 오전 파고다공원으로 전체 학생을 인솔하고 나오라”는 박희도 선생의 지시를 받는다. 이에 최은희는 당시 기숙생들과 통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모두 알렸고, 여학생들은 온종일 시가를 누비고 다니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저녁 무렵 최은희는 동료 32명과 헌병에 체포되어 남산 경무 출감부로 끌려갔는데 30명은 훈방 조치되고 최은희와 최정숙은 죄질이 무겁다고 감방 신세를 져야 했다. 3월 27일 풀려나 황해도 배천(白川) 고향으로 내려가자 이곳은 아직 만세운동이 번지지 않았다. 고을에 나타난 최은희가 도화선이 되어 형부인 송흥국을 비롯한 마을 청년들이 태극기와 안내문들을 만들어 만세운동을 펼쳤는데, 모두 최은희 집에서 어머니의 도움으로 만든 것들이었다. 그 일로 또 다시 6달의 징역살이를 하고 이후 동경유학길에 오른다. 동경유학기간 중에도 최은희는 한복을 즐겨 입었고, 당시에 동경에서 한복차림은 “죠센징짱골라”라는 소릴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최은희는 일제강점기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여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 최초의 방송아나운서를 지냈고, 비행기 취재를 하기도 했다. 별세하기 2년 전 모든 재산을 정리한 후 조선일보사에 5000만원을 맡겨 ‘한국여기자상’을 제정하게 했으며, 모든 자료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그리고 가재도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