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언문
조선민족대동단
대동단서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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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01) 강경진(姜景鎭) 1893. 5. 4 ~ 1940.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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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그는 1919년 7월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한 후 김재구(金在九)·한태현(韓泰鉉) 등과 남원지방을 중심으로 조직확대에 힘을 쏟는 한편 서울의 대동단 본부로부터 교부받은 각종 선전물을 배포하면서 독립의식을 고취하였으며, 군자금을 모집하여 대동단 본부에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대동단은 1919년 3월말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 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독립운동단체로서, 본부를 서울에 두고 전국 각처에 지단을 설치하였다. 또 동단에서는 당시 사회 각층을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들 각층의 인사들을 통일·종합함으로써 범국민적 조직을 구상했다.

 

강경진 등이 활약한 남원지단에서는 주로 청년단원을 근간으로 조직활동을 벌였다. 또 이들은 자금을 수합하여 서울의 대동단본부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런 1919년 11월 대동단 본부가 주도한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 망명계획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대동단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단의 전라북도 지단도 자연 발각되었고, 이로 인하여 그는 1920년 3월 15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질문] (02) 강우석(姜佑錫) 1901. 3. 9 ~ 1965.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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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河東) 사람이다. 그는 1919년 9월 진주(晋州) 광림학교(光林學校) 교사로 재직 중, 홍수석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위한 비밀결사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혈성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주로 군자금 모집활동과 임시정부의 선전활동을 폈다. 그리하여 박만선(朴萬善) 등과 함께 오재영(吳哉泳)·김두현(金斗鉉)으로부터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과 경고문을 배부받아 각처에 배포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선전과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한편 혈성단은 이 무렵 서울에서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한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등과도 연결되어 3·1운동 때와 같은 만세운동 계획을 추진하였다. 당시 국내 독립운동계는 1919년 9월 상해의 임시정부와 노령(露領)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하나로 합쳐 통합임시정부를 성립하게 됨에 따라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크게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의 독립운동단체들은 3·1운동 때처럼 거족적인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서로 연대하면서 만세운동을 추진해 갔다.

이에 강우석을 비롯한 혈성단에서도 이와 같은 '제2회 만세시위운동'에 동참하여 계획을 추진하던 중 사전 발각됨으로써 1919년 11월 초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1921년 1월 27일에 다시 징역 8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22년부터 동아일보 하동지국(河東支局)에서 일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어 전국 각처에 지회가 조직될 때, 그는 마산지회(馬山支會) 창립에 큰 힘을 쏟아 1927년 12월 29일 세칙제정위원(細則制定委員)으로 활약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03) 강태동(姜泰東) 1889. 6. 13 ~ 194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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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이원(利原) 사람이다. 1919년 3 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던 김가진(金嘉鎭)과 같이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의정원의 함경도 의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7월 1일에는 상해에서 대한적십자회가 조직되자 그 상위원(常委員)으로서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19년 9월 그는 권태용(權泰容) 이을규(李乙奎)와 동반하여 다시 서울로 돌아와 임시정부의 격문, 포고문 등을 전국에 배포하는 한편, 대동단(大同團) 단장 전협(全協)과 상의하고 의친왕 이강공(義親王 李堈公)을 상해로 탈출시켜 임시정부에 협력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는 상해의 김가진으로부터 받아 온 밀서(密書)를 이강공에게 전달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이에 따라 이강공의 망명계획이 착착 진행되어 11월 8일 서울을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일행은 일경의 경계망을 뚫고 아슬아슬하게 신의주를 통과하여 만주땅까지 갈 수 있었으나 일경 요네야마 경부의 끈질긴 추격으로 이 강공은 안동현 정거장에서 일경에게 연행되어 되돌아 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에 그는 다시 상해로 도피하여 대동단 총재인 김가진과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1921년 9월에는 동년 11월 11일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태평양회의에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청원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게 되자, 그는 김한(金翰)과 함께 자유당의 대표로 이 청원서에 서명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광복시까지 계속 활동하였다고 하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광복 후 서울에 돌아왔으나 1946년 2월에 영면하자 임시정부장(臨時政府葬)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04) 경석조(慶錫祚) 1881. 6. 27 ~ 1957.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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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 연풍(延豊) 사람이다. 1914년 만주로 망명하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동지를 규합하다 일경에 체포 구금되었다. 1919년에는 대동단(大同團) 충북 지단에서 활약하였다. 1924년에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길림성(吉林省) 북간도(北間島) 용정촌(龍井村)에서 고사연구회(古事硏究會)를 조직하고 절대독립(絶對獨立)을 외치며 항일활동에 주력하였다. 1929년에는 한족연합회를 결성하여 중앙 총무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기밀부장에 피선되었다. 1944년에는 중국국민당에 입당하여 재만동포의 생명과 재산보호에 힘을 다하였다. 광복 후 1949년 2월에는 반민특위(反民特委) 충북책임자로 피선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질문] (05) 권태석(權泰錫) 1895. 8. 18 ~ 1948.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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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김천사람으로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김익환의 권유로 대동단에 참여하여 자금조달과 각종 선전문건의 인쇄 및 배포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돼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뤘다.


조선민족대동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 지원을 위해 만든 비밀독립운동 단체로 군자금 모집, 선언문, 진정서, 포고문 등을 인쇄 배포했으며 단원은 관리, 유학자, 종교인, 청년, 학생, 부녀자 등 각계각층 11개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점조직이었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 1924년 10월 고려공산동맹 결성에 참여했고, 1926년 7월 좌파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민흥회 결성을 위한 발기 심사위원․창립 준비위원 등을 지냈다.

이후 1927년 좌우익 세력이 합작해 결성한 대표적인 항일단체인 신간회에 참가하여 서무부장 및 총무간사로 활동하였다.


1929년에는 좌파단체 가입 건 때문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아 5년8개월2일의 옥고를 치뤘다.


광복 이후, 신한민족당 교섭위원으로 한국 독립당을 창당하는데 관여하고, 당에서 조사부장이 되었다.

1947년 모스크바 3상회의 때 협의한 한국 신탁 통치안에 찬성하는 입장을 지녔으며, 1948년 남북협상 길에 올랐다가 이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06) 김사국(金思國) 1895. 11. 9 ~ 1926.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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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만주와 시베리아로 망명, 국권회복을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였고, 1919년 대동단에 가입하고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받고 출옥 후에는 노동운동을 하였으며, 1921년 4월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의 편집부 위원으로 被任되어 同年 9월 태평양회의에 즈음하여 연합회 대표로 한국의 독립을 요망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1922년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를 조직활동하다가 1923년 露領을 거쳐 만주로 망명하여 동양학원(東洋學院)과 대동학원(大同學院)을 설립하고 구국교육운동(救國敎育運動)에 전념하였으며, 이후 소련으로 가서 조선사회운동의 통일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1924년 10월 귀국하여 고려공산동맹(高麗共産同盟)을 결성하고 책임비서를 역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07) 김두현(金斗鉉) 1894. 4. 7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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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이후 반일민족의식이 고조되어 국내 각지의 부호(富豪)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여 중국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부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같은 해 9월 박경선(朴慶善)으로 하여금 50전짜리 은화의 표면에는 ‘태극기(太極旗), 독립기념(獨立紀念)’이라 새기고 이면에는 ‘민국원년(民國元年)’이라 새긴 큰 은메달 1개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고광욱(高光郁), 이근이(李根伊)와 공모하여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 북천면(北川面) 방화리(芳華里)의 부호 이도식(李道植)을 찾아가 이를 보여주고 자신을 대한민국임시정부원이라 칭하며 군자금 1,000원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였다.

김두현은 경상남도 통영군(統營郡)의 김두옥(金斗玉)을 방문하여 독립운동 방법을 협의하였다. 부산부(釜山府) 좌천동(佐川洞)에 있는 오재영(吳哉泳) 집으로 가서 군자금 모집에 대해 합의하였다. 이들은 오재영으로부터 그가 오태선(吳台善)에게 받은 ‘조선임시정부(朝鮮臨時政府) 13도(道) 총감부(總監部)’ 명의의 「사령서(辭令書)」와 「유고문(諭告文)」을 받아 함께 군자금 모집에 노력하였다. 또한 3.1운동을 이은 제2차 독립운동을 계획 중이던 김덕봉(金德峰)으로부터 『독립신문』과 「경고문(警告文)」 등을 받아 강우석(姜佑錫), 박만선(朴萬善) 등에게 배포하였다.

이와 같이 경상남도 각지를 오가며 활동하다가 동지 12명과 함께 진주경찰서(晉州警察署)에 체포되었다. 1921년 5월 30일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 진주지청(晉州支廳)에서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공소(控訴)를 포기하고 진주분감(晉州分監)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만기출옥일(1922년 5월 31일)을 얼마 앞둔 1922년 4월 15일에 가출옥(假出獄)으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08) 김병련(金秉璉) 1897. 1. 20 ~ 1949.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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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적은 경북 봉화(奉化)이며, 자(字)는 덕필(德弼) 호(號)는 일소(一笑) 또는 일주(一舟)이다. 김병련은 조부인 벽우(碧愚) 김규창(金奎昌)으로부터 한문을 수학하다가 봉화 조양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익혔으며, 1919년 3·1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

김병련은 1919년 음력 3월부터 9월경까지 서울에서 독립운동자금 1,000여원을 수차례에 걸쳐 대동단조선총지부장(大同團朝鮮總支部長) 신덕영(申德永)에게 교부하였고 신덕영과 함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문서를 배포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1920년 음 9월 서울에서 신덕영이 신종희(申鍾喜) 편에 보낸 대동단 총재 김가진(金嘉鎭) 명의의 대한독립군자금영수서(大韓獨立軍資金受領書) 2통을 교부받고 이것을 김두백(金枓白)에게 교부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제령 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으며,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22년 7월 27일에 만기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09) 김상순(金相淳) 1877. 12. 20 ~ 1956. 6. 11
[답변]

김상순은 1919년 음력 10월 전라남도 나주에서 강중현(姜中鉉)의 권유로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고 동월(同月) 충청남도 논산의 윤모(尹某)에게서 독립군자금 1천엔을 모집하였다. 이어서 1921년 1월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의 양회현(梁會絢)에게 군자금을 요청하여 수천엔을 모집하는 등 독립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김상순은 1921년 6월 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政治犯處罰令)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10) 김상열(金商說) 1852 ~ 미상
[답변]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은 민족의 독립과 실력양성을 표방하고 1919년 3월 서울에서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을 결성하였다. 흔히 이 단체는 「대동단」으로 불리었으며, 사회 각층의 인사를 한데 모아 민족역량을 결집함으로써 독립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고자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이때 김상열은 이신애(李信愛)의 권유로 대동단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는 이신애가 동지를 규합해 달라고 부탁하자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였다. 그래서 김상열은 대동단의 목적에 동의하는 김익하(金益夏), 이종춘(李鍾春)과 이겸용(李謙容)을 대동단에 가입시켰다. 그후 그는 정규식(鄭奎植)·나창헌(羅昌憲)·이종욱(李鍾郁)·한위건(韓偉鍵) 등과 11월 1일 서울 종로에 있는 파고다공원에 집합하여 제2회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협의하였다. 이같이 협의한 후 안교일(安敎一) 및 신현구(申鉉九) 등과 때때로 이곳저곳에서 모의를 거듭하며 동지들을 규합하는 활동을 하다가, 11월 27일에 제2회 독립선언서를 배포할 계획을 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1월 25일 서울에서 등사판을 사용하여 김상열 등이 서명한 선언서 수십 매를 나창헌·이신애 등과 협의하여 27일 오후 5시에 일반에게 반포하여 일대 시위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그들이 계획한 제2회 독립선언서에는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4월 10일 정부를 수립하였던 바, 무도한 일본은 시세의 추이에 상관없이 포학한 만성으로 이를 탄압할 뿐만 아니라, 맨주먹의 군중을 총으로써 대하고 촌락을 불태우는 등 인간의 양심으로는 차마 할 수 없는 만행을 일삼았다. 만일, 일본으로서 끝까지 개과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은 할 수 없이 3월 1일의 공약대로 최후의 1인까지 최대의 성의와 최대의 노력으로 혈전(血戰)을 불사할 것을 성명(聲明)한다'라고 천명하였다. 이같은 선언서에 김상열은 의친왕, 김가진, 전협, 양정(楊楨), 이정(李政) 등과 함께 대한민족대표로 서명을 하였던 것이다.

 

그후 김상열은 1919년 11월 27일 오후 2시 김병익(金炳益)의 손자인 김굉식을 이종춘·김익하와 함께 파고다공원에서 만나기로 하였으나 그곳에는 일제 경찰이 잠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그 날 오후 4시경 김상열은 김익하·이종춘과 장춘관(長春館)이라는 요리점으로 갔다. 그곳에는 김굉식외 두 명이 미리 와 선언서 배포에 대해 협의하였다. 그후 김상열은 의친왕 망명 계획이 발각되어 일제 경찰에 붙들렸다. 정치범죄처벌령, 출판법, 보안법 위반으로 넘겨진 김상열은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제1심에 불복하고 복심법원에 공소하여 1921년 5월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까지 약 1년 4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11) 김석동(金奭東) 1922. 1. 17 ~ 198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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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충무로(忠武路) 출신이다.

대동단(大同團) 총재 김가진(金嘉鎭)의 손자로 1935년 2월 상해로 건너갔다.

1938년 1월 한국 광복진선(光復陣線) 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항일선무공작활동을 하고 1940년 9월 광복군에 입대하여 제2지대 본부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 6월에는 김 구 주석의 주선으로 인쇄기술을 습득하여 독립신문 중문판(中文版) 발행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5년 1월 임시정부 주석판공실(辦公室) 서기로 근무하다가, 제2지대에 전속, 동년 5월에는 OSS훈련단 정보파괴반을 수료하였으며 국내정진군 본부요원에 편성되어 국내진입을 꾀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12) 김영철(金永喆) 1898.10. 27 ~ 1987. 7. 28
[답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에 참여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공원을 출발하여 종로를 지나 남대문정거장 앞에 이르는 시위행진에 동참하였다. 이어 3월 5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남대문 앞의 만세시위에도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독립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년 5월에 신현구(申鉉九) 등에 의해 조직된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독립애국단은 자생적(自生的)으로 생겨난 것이었으나, 결성 초기부터 상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연결되면서 임시정부 지원단체로서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동단은 임시정부를 중심한 독립운동의 선전활동과 재정자금의 조달, 국내 조직망을 통한 임시정부 연통부(聯通府)의 역할 등을 수행했다. 한편 그를 비롯한 동단의 본부 인사들은 이무렵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 등의 단체와 교류를 통해 결속을 강화하고 있었는데 특히 그는 조선독립대동단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동단은 전협(全協), 최익환(崔益煥) 등이 독립달성을 위해 조선 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로서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단원으로 포섭하여 전국적인 조직을 계획하고 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선언문' '진정서' '방략 및 기관'이란 제목의 항일문건과 중국의 신문에서 내용을 발췌한 '포고' 등의 문서를 제작 배포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이어 '선언서' '경고문' '일본 국민에게 고함' 등의 항일문건을 제작하여 국내 각지는 물론 중국을 거쳐 파리강화회의의 각국 대표 및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김영철은 이러한 문건의 국내 배포를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처벌령, 출판법, 보안법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13) 김용원(金庸源/金仲玉) 1892. 2.16 ~ 1934. 6. 13
[답변]

충청남도 대덕(大德) 사람이다.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면서 실력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이후에는 항상 조국 광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가던 무렵 광무황제가 독살 당하자 만세운동의 분위기가 성숙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향리에서 참여하였다가 사촌인 김태원(金泰源)과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김 구(金九) 아래에서 경무국원(警務局員)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9월부터 다음해(1920) 6월까지 황포(黃 )군관학교에 들어가 군사학을 전수(專修)하였다고 한다.


군관학교를 수료한 그는 1920년 7월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으며, 북경(北京)에서 박용만(朴容萬) 나창헌(羅昌憲) 등과 향후 행동계획을 상의하고 비밀히 국내에 들어와 이 강(李堈)공의 상해 탈출 공작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 강공이 만주 안동(安東)에서 체포됨에 따라 다시 상해로 도피하였다.


상해에서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활약하였으며, 1921년 5월에는 김 구(金九)의 후임으로 임정경무국장에 임명되고 동시에 의정원 청원 징계(請願 懲戒) 상임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동년 11월에는 태평양 회의에 관한 임시정부의 후원과 지도를 목적으로 "외교후원회"를 조직하고, 그는 박찬익(朴贊翊)의 후임으로 간사가 되어 태평양회의 축하회를 거행하는 동시에 홍 진 신익희 이진산(李震山) 등 25명과 함께 연서한 청원서를 재미 각국 대표자에게 송부하여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1922년 3월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사임하고 1923년에 다시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경에게 탐지되어 1924년 9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신병이 발생하여 형집행 정지처분으로 출옥하였다. 1925년 6월 출옥 후에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일대에서 다시 동지규합 및 군자금 모집 등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행하던 일본인 형사에게 발각되어 1927년 1월 또 다시 체포되었으며 1928년 11월에 소위 강도교사죄로 서울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4년 2월에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병보석을 받고 출옥하였으나 옥중에서 얻은 지병으로 인하여 동년 6월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하고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14) 김용환(金用煥) 1892. 8. 1 ~ 1919. 8. 18
[답변]

충남 서산(瑞山) 사람이다. 1919년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김용환은 동 단에 가입하여 군자금 지원에 주력하였다. 즉 직물업에 종사하면서 종제(從弟)인 정두화(鄭斗和) 등으로부터 6천 6백여 원의 거금을 거두어 동 단의 활동자금으로 제공하였다. 동년 음력 6월에는 당시 중국 항주(杭州)에 거주하던 신규식(申圭植)에게 대동단의 외교사무를 위임토록 하라는 동단의 밀명을 받고 중국 항주로 건너갔으나 불행히 콜레라에 감염되어 항주의 절강병원(浙江病院)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순국하였다. 김용환은 병상에 있어 공무에 지장이 있는 것을 두려워하여 국내의 본가에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을 전개하면서 객지에서 죽는 것이 오히려 영광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가 남긴 유묵(遺墨)으로는 그의 일기와 시국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15) 김의한(金毅漢) 1900. 1. 8 ~ 납북
[답변]

서울 사람이다. 1919년 10월 국내에서 비밀결사 대동단(大同團)의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부친 김가진(金嘉鎭)과 함께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8년 6월 상해에 있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中國本部韓人靑年同盟)의 상해지부 조직에 참가하여 재정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2년 5월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홍구공원(虹口公園) 폭탄의거로 포악해진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상해에서 항주(杭州)로 이전할 때 김구(金九) 등과 함께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으로 피신하여 임시정부 활동에 참가하였고, 선전위원회(宣傳委員會)의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 10월 임시정부 비서처(秘書處)의 비서와 선전위원회(宣傳委員會)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중경방송국을 통하여 국내에 있는 한인들에게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5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3당이 통합하여 신당인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립할 때 그는 이의 감찰위원회(監察委員會) 상무위원에 피선되었으며 그 후 한독당의 조직부 주임 및 선전부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40년 9월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이 중경으로 이전한 후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광복군 활동에 대한 공식적인 동의를 얻게 되자 광복군총사령부(光復軍總司令部) 주계(主計)에 선임되었으며, 1943년 8월에는 광복군 조직훈련과장을 맡았고, 1945년 6월에는 정훈처(政訓處) 선전과장으로 광복군 활동에 참가하였다. 1941년 12월 27일 임시정부 외교위원회 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질문] (16) 김익하(金益夏) 1849. 7. 13 ~ 1936. 2. 26
[답변]

서울 사람이다. 김익하는 1908년경 구한국(舊韓國)의 인장을 위조한 죄로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에서 징역 5년에 처해져 3년간 복역하였다. 71세의 나이에 1919년 제2회 한국독립선언서의 노인대표자에 서명하고 그것을 배포시킨 일에 간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4월 13일 중국 상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국내의 독립운동 열기가 고조되어갔다. 이에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민족의 대동단결을 표방하며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고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을 조직하였다.


김익하는 1919년 11월 초순, 서울에서 대동단원(大同團員) 이신애(李信愛)로부터 독립운동의 거사 계획을 듣고 적극 동참하고, 김상열(金商說)·이겸용(李謙容)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거사 당일 이신애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장춘관(長春館)으로 모이라는 통보를 받고, 김상열과 함께 장춘관으로 갔다. 오후 5시를 기해 이곳에서 대표자 전부가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계획이었으나, 김익하를 포함하여 참석한 사람은 조형구(趙炯九)·정설교(鄭卨敎) 등 총 5명뿐이었다. 이들은 오후 12시까지 동지들을 기다리다가 해산하였다. 한편 나창헌·안교일·정규식(鄭奎植)이 선언서 3,000매를 각각 인쇄, 오후 5시를 기해 자동차 3대를 이용하여 신속하게 시내에 배포할 예정이었으나, 사전 정보를 입수한 일경에 의해 주모자들이 체포됨으로써 실패하였다.


김익하는 1919년 12월 3일 종로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고, 1919년 12월 10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취조와 신문을 받았다.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 처벌령·출판법·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미결구류 200일 통산)을 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17) 김정련(金正連) 1895. 9. 7 ~1968. 10. 22
[답변]

평북 용천(龍川) 사람이다. 고향의 오암서원(梧岩書院)에서 7년동안 한학을 공부하고 숭실중학교·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숭실전문학교에 재학중 김화촌(金花村)과 함께 평남 대동군(大同郡)에서 항일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다 일경에 붙잡혀 여러차례 구금당하였다.

3학년때에는 상해(上海)에 거주하는 김홍서(金弘 )와 비밀문서를 교환하며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중 발각되어 구금당하기도 하였다. 졸업후 그는 평양의 숭덕소학교(崇德小學校)와 숭실중학교에 교사로 재직하던 중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붙잡혀 일경의 비인도적인 태형을 받았다.

그는 1919년 전남 광주의 숭일중학교(崇一中學校) 교사로 있으면서 항일연설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일경에 붙잡혀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는 이후에도 항일의지를 굽히지 않고 1920년 10월 부한청년단(扶韓靑年團)단원 최양옥(崔養玉)·신덕영(申德永)·노형규(盧衡奎)와 함께 대동단(大同團)단원 전 협(全協)과 연락을 취하며 전남 각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출옥후 해외로 망명한 그는 김석우(金錫雨) 등과 함께 해삼위(海蔘威)에서 남석동(南石洞)이란 한인부락을 건설하여 동포들의 생활안정과 독립운동 기반확충에 힘썼다.

그후 그는 중국 산서성(山西省)에서 최양옥·신덕영·안창남(安昌男) 등과 더불어 항일결사 공명단(共鳴團)을 조직하고 부단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던 중 일제 밀정에 붙잡혀 천진감옥에서 2년 6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7년 출옥한 그는 공명단원들과 함께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북만주에 비행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필요한 기금모집과 연락을 위해 공명단 지부를 조직하기로 하고 1929년 4월 최양목·이선구(李善九) 등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였다.

이들은 동년 4월 4일 평북 용천군에 거주하는 김인옥(金仁玉)으로부터 군자금 160원을 모금하였다. 또한 4월 20일 서울 교외 망우리에서 우편물 수송차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탈취하고 동포들의 우편물을 제외한 일본인 우편물을 소각하였다.

이일로 인하여 일본군 19사단의 지원까지 받고 경기·황해·강원·충북·충남 등 5도에서 차출된 일경의 추적을 받은 그는 양주군(楊州郡) 백봉산(白峯山)에서 일경과 교전 끝에 붙잡혔다.

그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그는 일경의 감시를 피해 평북 의주군 백마산성(白馬山城)에서 화전민 생활을 했는데 소위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되어 매년 12월이면 예비검속되어 이듬해 1월에야 석방되었으므로 무랍인(無臘人)이란 별명까지 얻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18) 김종진(金鍾振) 1903. 1. 13 ~ 1962. 3. 11
[답변]

평안북도 강계(江界)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의 독립만세운동과 같은 해 11월 28일의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종진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참여하여 시가(市街)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리고 그 해 3월말에 대동단(大同團)이 조직되자 여기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대동단은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이다. 1919년 3월 말 대동단 결성을 주도한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은 그 해 10월 초순경 대동단의 본부를 상해(上海)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 망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3·1독립운동과 같은 대대적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거사 내용과 방법도 3·1독립운동의 방식을 쫓아 진행시켰다.


이때 김종진은 자신의 숙소를 거사 논의 장소로 제공하고, 대동단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거사를 준비하던 중 의친왕(義親王)의 상해 망명계획이 일본 경찰에 사전 탐지되고, 그 해 11월 11일 만주 안동역(安東驛)에서 의친왕 일행이 피체됨으로써 대동단의 조직은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경찰의 포위망을 피한 김종진은 나머지 인사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1월 28일 김종진을 비롯한 정규식(鄭奎植)·박정선·나창헌(羅昌憲) 등은 종로 안국동(安國洞) 경찰관주재소 앞 광장에서 미리 준비해 온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체포된 김종진은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 및 출판법,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1년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19) 김찬규(金燦奎/號:石然) 1864. 3. 9 ~1931. 12. 11
[답변]

경북 영주(榮州) 사람이다. 대한제국시기에 비서승(秘書丞) 등의 관직을 역임했던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시세를 한탄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렸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한 대동단(大同團)에 초기부터 참가하며 조직확대에 많은 힘을 쏟았다.


대동단은 독립달성을 위해 전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동년 3월말 서울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로서,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단원으로 포섭함으로써 전국적 조직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사회 각층을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들을 통일·종합하여 독립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다.


이때 그는 주로 진신(縉紳)·유림(儒林) 등의 상류층 인사를 규합하는 책임을 맡았고, 이를 위해 박영효(朴泳孝)·김가진(金嘉鎭)·민영달(閔泳達)·곽종석(郭鍾錫)·맹보순(孟輔淳) 등을 대상으로 포섭활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사들이 냉담하거나 미온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처음의 계획처럼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다만 김가진의 영입을 성사시키는데 그쳤다. 그리고 곽종석 문하(門下)의 유림들을 포섭하기 위해 동년 5월 초순 경남 거창(居昌)으로 내려갔는데, 이무렵 서울에서 최익환 등이 일경에 피체되면서 그의 행적이 드러나게 됨에 따라 피신하였다.


1919년 11월에 대동단의 조직이 발각된 후, 그는 1920년 가을에 신태식(申泰植)과 함께 만주(滿洲)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독립군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동단의 경상남도 단장을 맡아 동지 포섭 및 군자금 모집 활동을 폈다. 1921년 겨울 동단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되자 그는 만주로 넘어갔으며, 그후 국경을 왕래하면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계속 전개했다. 그러던 중 1922년에 남만군정서(南滿軍政署)와 연결되어 국내에 잠입하여 경북 문경(聞慶)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다가 동년 6월경에 피체되어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4년 2월에 출옥한 직후부터 다시 항일투쟁을 전개한 그는 동지 신태식(申泰植)·손병선(孫秉善)·신석원(申錫遠) 등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 군무총장(軍務總長) 노백린(盧伯麟) 명의의 지령문을 수백매 인쇄한 뒤 경남 밀양(密陽)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폈다. 이와 함께 이들은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상해(上海) 망명을 추진했는데, 사전 발각됨으로써 1925년 2월경에 피체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31년에 순국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20) 나창헌(羅昌憲/王成俊) 1896. 1. 29 ~ 1936.6. 26
[답변]

평안북도 희천(熙川) 사람이다. 서울에 올라와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재학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교 대표로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구금되었다고 한다. 1919년 5월에 동지 안재홍 연병호 송세호 이병철 등과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 활동하였다.


민족운동에 첫발을 디딘 후 대동단(大同團)의 비밀단원이 되어 이 강(李堈)공(公)을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로 모셔 가려다가 발각되자 1920년 1월 상해로 탈출하여 대동단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도와 동단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곳에서 기관지 "독립"을 간행하여 독립정신을 앙양하였으며, 1920년 11월에는 노무용(盧武用) 김재희(金載熙) 등 7인과 같이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하고 그 단장이 되어 철(鐵)과 혈(血)로써 왜적을 배제(排除)해야 된다고 주창하였다.


그리고 김 구(金九) 손정도(孫貞道) 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창립하는데 참여하였다가, 1920년 10월 28일 동회 이사에 취임하였으며, 동년 11월 2일에는 동회(同會)의 교육부원(敎育部員)으로 노병회 설립취지를 살려 나갔다. 임시정부의 외곽지원단체인 노병회는 임시정부의 기반을 공고히 다져 나가는데 기여하였다. 이어 1924년 6월 15일에는 임노공부원(任勞工部員)으로 노병(勞兵)을 초모하고 훈련시키는데 앞장선 바 있다.


한편 그는 1924년 1월 12일 교민단의사회(僑民團議事會)의 학무위원(學務委員)으로 취임하여 노병회를 이끌어 가면서 상해 일대에 거주하는 한국 동포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임시정부의 지원을 호소하는 등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같은 해 9월 8일에는 교민단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어 김 구 등 임시정부 요인을 도와 민주공화제 정착과 그 활동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또한 독립운동선상의 단합을 도모하기 위한 국민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을 탄핵하기 위한 심판위원장이 되어 그해 3월 13일 드디어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여 결국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과 임정의 경무국장 내무부차장 등을 역임하면서 독립운동에 몸바쳤으며, 병인의용대장을 역임하면서 상해에 있던 일본영사관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두 동생과 같이 이를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으나 사전에 탄로가 나서 두 동생은 체포되고 그는 항주(杭州)로 피신하였다.


그 후 사천성만현(四川省萬縣) 성내에서 만현의원을 개설하여 의료업에 종사하였으며, 1933년 1월에는 흥사단(興士團) 원동대회에 참가하여 선우 혁(鮮于爀)과 함께 제6반에 소속되어 활동하였고, 동년 7월에는 비밀리에 상해로 돌아와 병인의용대를 부흥시키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6년 6월 그가 경영하던 만현병원(萬縣病院)에서 신병으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21) 노석중(盧錫中) 1875. 2. 26 ~ 1954. 1. 17
[답변]

광주(光州) 사람이다. 그는 1919년 전 협(全協)으로부터 대동단(大同團)의 결성 취지를 듣고 이에 찬동하여 동단에 가입하였다.

대동단은 3·1독립운동 직후 한민족의 민족역량을 결집하여 민족적 대동단결과 실력양성을 표방하고 민족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담당할 것을 목적으로 전 협·최익환(崔益煥)등이 주도하여 결성된 비밀결사였다.

동단은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여 황족·유림·종교·상공·노동·청년·군인·부인 등 사회 각 계층의 인사들을 규합하려던 조직으로서, 주로 각종 인쇄물의 인쇄·배포 등을 통한 독립사상의 고취와 동단의 선전활동 및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의친왕(義親王)을 상해로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세우고 제2의 독립만세시위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때 그는 전남 도내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신덕영(申德永)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러한 사실이 일경에 탐지·붙잡혀 192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22) 노형규(盧衡奎) 1876. 12. 3 ~ 1947.11 27
[답변]

전남 화순(和順) 사람이다.

1919년 3월 15일 조국현·조경환(曺景煥)·조기현(曺基賢)·조병렬(曺秉烈)·김세태(金世泰) 등 수십명과 함께 읍앞 갱미산(更美山) 마루로 올라가서 산위에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또 동년 3월 31일에도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그후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조직한 조선독립대동단(朝鮮獨立大同團)에 가입한 그는 1920년 7월에는 조병렬(曺秉烈)·신유선(辛有善) 등과 함께 서울의 신덕영(申德永) 및 최양옥(崔養玉) 등과 연락해 가며 광주·화순·곡성·담양·보성 등지에서 임시정부의 자금 모집을 위한 활동을 폈다. 또한 동년 10월에도 여러 동지와 함께 대동단원(大同團員) 전 협(全協)과 연락하면서 전남 각지에서 임시정부(臨時政府)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온 힘을 기울였으나 동년 11월 5일에 광주(光州)에서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1921년 5월 31일에 소위 제령 7호 위반 및 공갈·가택침입·방화미수·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5년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21년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23) 동창률(董昌律) 1868 ~ 1943. 4.
[답변]

서울 사람이다. 그는 3·1독립운동 직후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활동했다. 일찍이 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에 참여하여 평의원(評議員)과 경무위원장(警務委員長) 등을 지내며 민족양심에 벗어나기도 했던 그는 경술국치(庚戌國恥)이후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리던 중, 오랜 동지였던 전 협 등이 범국민적 독립운동단체를 목표로 대동단을 결성하자 이에 참여했다.


대동단 가입 이후 그는 독립의식의 고취를 위한 선전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의 배포에 앞장섰고, 1919년 8월 함경북도 단천(端川)에 파견되어 김병권(金秉權) 등을 동지로 포섭하는 등 조직 확대에도 힘을 쏟았다. 한편 동년 10월 대동단은 본부를 상해(上海)로 옮길 것을 계획하고, 제1단계로 동년 10월 10일 동단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상해로 망명케 한 뒤 의친왕(義親王)의 상해 망명을 추진시켰는데, 이때 그도 전 협·정남용(鄭南用) 등과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에 따라 동년 11월 9일 의친왕이 상해로 출발할 수 있었으나 이 사실이 일경에 도중 탐지됨으로써 11월 11일 만주(滿洲) 안동역(安東驛)까지 갔던 의친왕 일행은 피체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동단의 조직은 파괴당하였고,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질문] (24) 민 강(閔 橿) 1884. 7. 23 ~ 1924. 3.
[답변]

충북 청주(淸州) 사람이다. 그는 1909년경, 기울어가는 국운을 일으키기 위해 안희제(安熙濟)·김홍량(金鴻亮)·신백우(申伯雨)·남형우(南亨祐) 등 각계 인사 80여명과 함께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을 조직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그는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남대문(南大門) 밖에 소의학교(昭儀學校)를 세워 민족교육사업의 일선에 나섰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에는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홍면희(洪冕熹)·안상덕(安商悳)·이규갑(李奎甲) 등의 인사와 함께 세칭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의 성립과 국민대회(國民大會) 개최를 추진했다. 그는 주로 연락과 준비의 임무를 맡아, 홍면희·이규갑 등과 국민대회 취지서 및 임시정부의 약법(約法) 등을 작성하여 준비를 진행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경영하는 동화약방(同化藥房)을 연락거점으로 삼아 자금조달활동을 폈다. 이일로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동년 8월에 보석으로 출옥했다.


출옥 직후 그는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이 주도·조직한 대동단(大同단)에 가입·활동했다. 역시 그는 동화약방을 대동단 및 연통본부(聯通本部)의 연락거점으로 제공하는 한편 대동단이 일제의 소위 천장절(天長節)인 동년 10월 31일을 기해 거행하려 한 독립만세시위에 강 매(姜邁)와 함께 서울의 7개 학생단체들의 동원책임을 맡고 이를 추진했다.


이때 민 강 등이 통솔한 학생청년단체는 연통단(聯通團)·중앙단(中央團)·중앙청년단(中央靑年團)·독립청년단(獨立靑年團)·불교중학학림(佛敎中央學林) 등이었다.


그런데 만세시위가 예정보다 연기되는 과정에서 일경에 발각됨에 따라 동년 11월 1일에 피체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1921년 3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확정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1924년 1월 교민단의사회(僑民團議事會)의 학무위원(學務委員) 등을 역임하며 활동했는데 1924년 3월 일경에 다시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25) 민영달(閔泳達) 1859. 1. 24 ~ 1924. 9. 15
[답변]

서울 마포(麻浦) 사람이다. 1895년 8월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日本) 낭인(浪人)의 손에 의하여 시해당하자 내무대신직(內務大臣職)을 사퇴하고 은거생활을 하기 위하여 낙향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후 간교하게 국권을 농락하면서 인심을 수합한다는 명목으로 국내 유력자들에게 주는 소위 작위(爵位)와 은사금(恩謝金)을 받지않고 끝내 거절하였다.

그후 1918년 9월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하여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창설·운영하던 이회영(李會榮)이 자금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국내에서 활동할 때 5만원을 조달하여 원조하였다. 그리고 1918년 광무황제(光武皇帝)를 해외에 망명시켜 국권침탈에 따른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며 국제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이회영에게 5만원을 주어 망명지의 주거임대수리를 추진하던 중 1919년 2월 광무황제의 갑작스런 붕어로 인하여 계획이 중도에서 좌절되었다.

1919년 전 협(全協)과 최익환(崔益煥)이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을 조직할 때 관여함으로써 민족운동에 가담하였으며, 또한 1921년 1월 10일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정간되었다가 3개월 후에 해제되었으나 운영자금이 없어 속간이 지연되고 있음을 알고 홍증식(洪增植)을 통하여 5천원을 출자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질문] (26) 민치도(閔致道) 1868. 6. 3 ~ 1921. 8. 10
[답변]

1907년 고종의 양위와 군대해산의 비보를 듣고 자제와 친척들에게 군자금 백 냥을 주어 심남일(沈南一) 의병진으로 보냈다.

3·1운동을 전후해서는 정재면(鄭載冕)·주창업(朱昌業) 등과 국민당 및 결사대를 조직하는 한편 신덕영(申德永)·최양옥(崔養玉)·김정련(金正連) 등 대동단(大同團)단원들과 연락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즉 전라남도 화순군수(和順郡守)와 능주(綾州)·영광(靈光) 등 각 면장에게 "천만의 천군(天軍)이 습래하면 왜노(倭奴)의 충신은 왜노와 함께 학살할 터이니, 생명을 보전하려거든 속히 사직하라" 는 글을 능주 우체국에서 부쳐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또한 정인채(鄭麟采)·양사형(梁士亨)·양회진(梁會津)·윤자삼(尹滋三)·민영동(閔泳東) 등 각 부호들에게는"지금 광주에서 조선 독립운동을 위하여 국민당을 조직하고 수십 명의 결사대를 각 지방에 파송하였으니 군자금을 제공하여 사형을 면하라."는 글을 보내어 상당량의 군자금을 모았다.

그는 숭일학교(崇一學校) 선생인 김정련과 협의하고 상해 임시정부로 군자금을 보낼 계획을 의논하였는데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적에게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1921년 5월 12일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그후 신병으로 보석되었다. 그러나 보석된 이튿날 "내가 죽은 후 대한자손들아 국권을 회복하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27) 박노창(朴魯昌) 1888. 12. 24 ~ 1977. 5. 6.
[답변]

경북 달성(達城) 사람이다. 1914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고 있던 시기에 만주 통화현 이도구(通化縣二道溝)에서 동지들과 함께 동화학교(東華學校)를 설립하여 민족의식과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민족교육의 실시에 힘썼다. 이후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항일투쟁을 계속하던 중 1919년 5월경 대동단원(大同團員) 정남용(鄭南用)으로부터 대동단의 결성취지를 듣고 이에 찬동하여 동단에 가입·활동하였다.


대동단(大同團)은 3·1운동 직후 한민족의 민족역량을 결집하여 민족적 대동단결과 실력양성을 표방하고 민족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담당할 것을 목적으로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하여 결성된 비밀결사였다.


동단은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여 황족·유림·종교·상공·노동·청년·군인·부인·보부상 등 전 사회 각 계층의 인사들을 규합하려던 조직으로서, 주로 각종 인쇄물의 인쇄·배포 등을 통한 독립사상의 고취와 동단의 선전 및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그는 이건호(李建鎬)의 집에 영동활판소(永同活版所)라는 비밀 인쇄소를 차려 놓고 정남용·권헌복(權憲復)·이근고(李根高)·김용의(金用儀) 등과 함께 대동단의 기관지인 〈대동신보(大同新報)〉를 제작·발행하였으며, 또한 대동단규칙(大同團規則) 등 지하 문서와 각종 선전물을 인쇄·발송하는데 힘썼다.


이후 정남용의 지시를 받고 동지 규합과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기 위하여 〈대동신보〉, 〈대동단규칙〉을 소지하고 부산에 거주하는 구상서(具尙瑞)를 만나 그와 함께 선전물을 배포하는 등 선전활동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활동상황이 일경에 탐지·피체되어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질문] (28) 박용만(朴容萬) 1881. 7. 2 ~ 1928. 10. 17
[답변]
강원도 철원(鐵原) 사람이다. 숙부인 박희병(朴羲秉) 슬하에서 성장한 그는 서울에서 관립 일본어학교를 졸업한 후, 1895년경 일본유학시험에 합격, 도일(渡日)하여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중학 졸업 후 경응의숙(慶應義塾)에서 2년간 정치학을 공부하였으며, 숙부의 소개로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분을 갖게 되면서 활빈당(活貧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 후 안국선(安國善)·오인영 등과 함께 귀국하다가 이른바 '활빈당사건(活貧黨事件)'으로 붙잡혀 옥고를 치르던 중 숙부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수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출옥 후 독립협회(獨立協會)·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보안회(輔安會)에서 활동하면서 계몽운동을 벌이던 중 1904년 7월 일제의 '황무지개척권(荒蕪地開拓權)' 반대 투쟁을 전개하다가 투옥되어 제2차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 때 옥중에서 정순만(鄭淳萬)·이승만(李承晩)과 만나 결의형제를 맺으면서 이른바 '삼만'으로 불리게 되었다. 출옥 후 숙부가 있는 평안남도 순천에서 사립 시무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면서 국어·일어·산술·중국고전 등을 가르치던 중, 그 곳에서 후일 미국 내에서 군사활동을 함께 하게 되는 정한경(鄭翰景)·유일한(柳一韓) 등을 만났다. 그러나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러일전쟁 등으로 이미 한국이 망국사태임을 간파한 그는 해외로 나가 한국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항쟁을 통한 국권회복을 꾀하기 위해 1905년 해외망명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1905년 2월 이승만의 아들 태선(泰善)·정순만의 양필(良弼)과 함께 도미길에 올랐다. 도미 후 1906년경 그의 숙부 박장현(朴章鉉)과 함께 미주 중서부지역인 네브라스카주 커니시에 유일한·정한경·정양필을, 그리고 이종희·이희경·김용대(金容大)를 링컨시의 학교에, 김병희(金丙熙)·권종호(權鍾浩)·정영기(鄭永基)·조진찬(曺鎭贊) 등을 링컨시에 취역시켰다. 이러한 그의 구획은 이후 1910년대 한인 유학생의 절대 다수가 네브라스카주에 집중되었던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여 1911년 당시 미국내 한인 대학생의 80%가 네브라스카주 주변에 집중되었다. 1907년 숙부와 함께 콜로라도주 덴버로 옮긴 그는 콜로라도 예비학교에 입학하는 한편 한인 동포들을 위해 여관과 직업주선소를 운영하였으며, 1908년 1월에는 덴버 근처의 한인 유지들과 논의하여 해외동포대표회의(海外同胞代表會議)를 소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동년 5월 박처후(朴處厚)·임동식(林東植)·정한경 등과 함께 해외 한인단체의 통일기관을 조직한 후 이를 바탕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한 뒤,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또한 이들과 함께 무장투쟁의 원동력인 한인 청년들의 군사양성기관을 설립하기로 협의하고 이를 대표자회의에 붙일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08년 7월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자회의(北美大韓人愛國同志代表者會議)'를 개최하여 '한인군사학교(韓人軍事學校)' 설립안을 제출·통과시킨 그는 1908년 12월 네브라스카 주정부의 허락을 얻어 1909년 6월 미국내 최초의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를 설립하였다. 또한 1910년 4월 헤이스팅스대학과 교섭 끝에 그 학교의 건물 한 동을 임대하고 전장(田莊)을 마련하여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이 군사학교 운영에 주력하던 즈음 미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부터 「신한민보(新韓民報)」 주필로 초빙되자, 1911년 2월 초 「신한민보」 주필로 취임하였다. 취임 후 그는 대한인국민회를 해외 한인의 통일기관인 임시정부(臨時政府)로 조직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동년 3월 '조선민족의 기회가 오늘이냐 내일이냐'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해외 한인을 통일하고 결속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헌법을 제정하고 정치적으로 여기에 복종시켜 무형국가(無形國家) 또는 가정부(假政府)로 변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것을 비롯하여 석달에 걸쳐 임시정부 조직론인 '무형국가론(無形國家論)'을 줄기차게 주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11년 3월 대한인국민회 헌법 개정안 기초 위원으로 선정된 그는 결성선포문을 기초하여 1912년 11월 해외 한인의 최고통일기관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탄생시켰다. 1911년 11월 초 주필 자리를 내놓고 네브라스카대학으로 돌아가 정치학 학사학위를 획득한 그는 이듬해인 1912년 11월 중앙총회 제1차 대표회의에 참석하였다가 『신한국보(新韓國報)』 주필로 초빙되어 하와이를 향해 떠났다. 또한 이 시기 그는 『국민개병설(國民皆兵說)』과 『군인수지(軍人須知)』라는 무장항쟁론에 관한 저서를 간행하여 그의 관심을 일반에 널리 확산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1911년부터 1912년 사이 국민회의 조직은 시베리아·만주지방 등에 116개의 지방회가 건설될 정도로 확산되었으며, 그의 임시정부조직론에 힘입어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한인의 유일무이한 조직체로 성장하고 있었다. 1912년 12월 하와이에 도착한 그는 북미대륙에 있을 당시 그가 주장하던 의무금제도와 자치제도를 하와이에서도 실현시키기 위해 하와이 동포들의 협조로 의무금제도를 확립시켰으며, 동년 5월에는 하와이 정부로부터 특별경찰권을 승인받아 하와이 각 섬에 대한인국민회 경찰부장을 설치하여 한인자치제를 확립하고 해외 한인을 일제의 지배하에 두려는 일본정부의 간섭을 배제하여 망명정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국민개병을 통한 국권회복을 실현하기 위해 1914년 6월 미국군대를 모방한 근대적 군사조직인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을 창설하고 둔병제식(屯兵制式) 훈련제도를 도입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전담부대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1913년 2월 그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도착하여 한인들의 교육과 출판사업을 맡은 이승만(李承晩)이 하와이 한인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1915년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를 장악하고 박용만 계열의 대의원을 구타하는 등 그에 대한 음해공작과 테러행위를 자행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그가 하와이 정부로부터 승인받은 특별경찰권은 취소당하여 하와이 한인사회의 자치권은 상실되었고, 대조선국민군단도 1916년 농장주의 압력으로 계약을 취소당해 문을 닫게 되는 등 이후 하와이 한인사회는 분열로 치달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으로 당선될 정도로 지지를 얻고 있었다. 1915년 6월 중앙총회 부회장 취임차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1916년 이승만이 그를 「국민보(國民報)」 주필로 재임명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와이 한인사회의 통합을 위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는 1917년 뉴욕에서 열린 '약소국동맹회의(弱小國同盟會議)'에 한국 대표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또한 1917년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수립의 기초를 닦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1918년 2월 이승만은, 그가 미국영토 내에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설립하여 일본군함인 출운호(出雲號)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 한다면서, 미·일 관계를 악화시키고 국제평화를 저해하는 음모행위이므로 미국 내에서 그의 군사활동을 금지시키라고 요청하는 등 정치적 음해공작을 또 다시 감행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미국당국으로부터 스파이로 몰려 법정에까지 서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본격적인 무장투쟁 준비에 나선 그는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번역하여 호놀룰루의 「pacific commercial advertiser」지에 보내는 한편, 3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국내 및 중국 등지의 독립군단과 통일을 꾀하기 위한 통일군사정부인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 하와이지부를 창설하였다. 이와 함께 동년 4월 한성임시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무총장(外務總長)에 피선된 그는 그해 5월 연해주에 도착하여 이민복(李敏馥)·조성환(曺成煥)·백 준(白準) 등 간도·길림지방의 독립군들과 더불어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을 조직하고 총참모로 취임하였다. 또한 1920년 봄 대동단(大同團) 총부(總部) 무정부장(武政部長)으로 임명되기도 한 그는 문창범(文昌範)·유동열(柳東說)·신채호(申采浩) 등과 회합하여 노령·만주지역의 민족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 조직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한편, 동년 1920년 여름 모스크바로 가서 상해 임시정부 외무총장의 이름으로 '소련의 노농정부(勞農政府)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호 연합하여 노농정부는 임시정부의 독립군 양성 승인과 무기를 공급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노농정부의 지휘를 받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밀약을 체결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이 밀약의 일환으로 화아선(華俄鮮) 즉 중국·러시아·조선 연합선전부가 결성되자, 화아선 연합선전부 부부장의 직위를 맡은 그는 1920년 12월 초 특사를 니콜리스크에 파견, 안정근(安定根)·왕삼덕(王三德)과 회견하여 연합선전부 간도지부를 설립키로 협의케 하였다. 그 결과 선전지부 집행군무사령관에 홍범도(洪範圖)를 임명하고 사령부를 돈화현(敦化縣)에 두어 간도주재 일본군경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만주의 군사단체들이 통일된 지도체가 없고, 상해 임정 역시 세력이 약해진 관계로 이들을 지도할 역량이 부재하다는 판단 아래 1921년 4월 신채호·신 숙(申肅) 등과 북경 근방에서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노령의 통일된 독립군부대는 후일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고 만주의 부대들은 지휘계통을 통일하여 국경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는 진공작전을 감행할 것을 결의했다 한다. 그러나 군사통일회의 결성이 재정 부족으로 실패한 것을 깨달은 그는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한 자금 마련과 기지 확보를 위해 흥화은행(興華銀行)을 설립하고 이 은행의 신용을 담보로 북경과 만주 방면의 토지를 구입하여 각지에 산재한 군인들을 집결·훈련시켜 군사단체를 통일하고 독립전쟁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1925년 하와이로 가서 군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1926년 6월 중국 북경으로 돌아와서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해 북경 근방의 땅을 구매하여 대륙농간공사(大陸農墾公司)를 설립하고 수전(水田)과 정미소를 경영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928년 10월 17일 북경에서 활동을 계속하던 중 오해를 받고 피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29) 박원식(朴源植) 1893. 8. 6 ~ 1955. 10. 20
[답변]

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그는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졸업 후 조치원청년회 회장으로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3·1운동 때에는 홍천(洪川)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3·1운동 직후에는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가입하여 제2회 독립만세 시위계획에 참가하였다.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던 상황에서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조선민족대동단은 조선 독립을 위하여 먼저 민족 대단결을 목표로 민족사회의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망라한 조직을 구상해 갔다. 또한 동단은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 망명을 계획·추진하는 한편 3·1운동 때와 같은 만세시위를 일으키려는 계획을 추진해 갔다. 이 때 박원식은 조선민족대동단의 단원으로 만세시위 계획의 실무를 맡았다.


그는 나창헌(羅昌憲)·안교일(安敎一)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사용할 격문 인쇄 및 배포의 책임을 맡았으며, 거사 당일에 만세시위를 선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1차 계획은 거사 당일날 운동원간의 약속에 차질이 생겨 예정대로 만세시위를 벌이지 못하였는데, 이에 그는 이신애(李信愛)·정규식(鄭奎植) 등과 함께 재차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11월 28일 안국동 광장에서 미리 준비해 간 태극기와 '조선독립 만세'라고 쓴 깃발을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피체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1921년 3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 처벌령·출판법·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조선일보 홍성지국장으로 있으면서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운동과 학생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1925년에는 광천노동조합(廣川勞動組合)과 광천청년회·광천소년회 등의 조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9년 11월의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1930년 2월 홍성에서도 홍성공립공업전수학교 학생들에 의해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그런데 이 일이 일경에 의해 탐지되면서 10여 명의 학생이 피체되었을 때, 그는 일경의 무리한 언사와 탄압에 항의하다가 일경의 불법적 직권남용에 의해 소위 경찰범처벌규칙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구류 25일을 받았다. 한편 그는 1930년 11월 신간회(新幹會)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민족협동전선운동에 크게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30) 박정선(朴貞善) 1874 ~ ?
[답변]

서울 동사헌 사람이다. 대동단(大同團)의 일원으로 이른바 제2차 독립선언 계획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박정선은 1919년 대동단에 가입하였다.


3.1운동의 토양 위에서 조직된 대동단은 전민족의 대동단결을 표방하며 한국 독립을 주창하였다. 대동단은 비밀결사로서 대동신보(大同新報)를 발행, 배포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조직을 중국 상해(上海)로 옮기고,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의 상해 망명을 추진하였으나 일제에 탐지되어 좌절되었다. 이후 대동단은 제2차 독립선언계획을 통해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3.1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일제의 야만성을 힐책(詰責)하고 한국 독립을 주창했다.


1919년 11월 28일 박정선은 서울 안국동 광장 등지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짖던 중 일경에 붙잡혀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31) 박제웅(朴濟雄) 1877. 10. 11 ~ 1941. 10. 6
[답변]

박제웅은 1919년 12월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고생 끝에 대한민보(大韓民報) 기자인 이원렬(李元烈)의 소개로 임시정부 교통부 총장 남형우(南亨佑), 차장 김철(金澈)을 만나 평소 자신의 조선독립에 대한 결의를 밝혀 드디어 임시정부원이 되었다. 박제웅은 충청남북도와 전라남북도에 임시 지방교통국의 건설을 위해 교통부의 임시특파원으로 국내에 파견되었다. 수일 후 대동단원(大同團員) 나창헌(羅昌憲)의 소개로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만나서 군자금 모집을 부탁받고 모집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20년 3월 30일 교통사무국장 임명서, 대동단 지단장 신임장, 독립신문 등을 소지하고 상해를 출발하여 4월 12일 인천(仁川)에 도착하였다. 이어 인천을 근거지로 삼아 동월 14일경 충남 대전의 조성민(趙成珉)에게 임시정부원이 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고, 15일 전남 광주의 이득수(李得洙)에게 동일한 권유를 했으나 거절당하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곧 이재연(李在淵)을 방문하고 군자금 모집원이 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이후 서울에서 나창헌을 만나 지금까지의 활동내용과 향후 일정을 협의하고, 군자금 모집증 및 신임장, 여비 등을 받았으며, 이재연을 전라남도 지역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파견된 이재연이 체포되자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아 결국 1920년 6월경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박제웅은 1921년 7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25년 5월 만기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32) 백초월(白初月/白義洙/寅山) 1878. 2. 17 ~ 1944. 6.
[답변]

경남 진주(晋州) 사람이다. 1919년 4월 승려의 신분으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라는 비밀단체를 경성중앙학교(京城中央學校) 내에 조직하고 그 단체의 단장이 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및 독립군(獨立軍)을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같은해 7월에는 비밀출판물로 〈혁신공보(革新公報)〉를 간행하여 국민들의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1919년 8월 전남 천은사(泉隱寺)의 주지인 하룡하(河龍河)로부터 군자금으로 200원을 받고 동년 10월 7일에 다시 300원을 모금하여 만주 길림성(吉林省)에 있는 독립군(獨立軍)에 11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6명을 각각 선발하여 그들에게 여비를 주어 군자금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1919년 11월 25일 단군(檀君)의 건국기념일을 기하여 시위계획을 세워 종로 삼청동(三淸洞)에 태극기와 단군기념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성립에 관한 축하문과 선언서 및 포고문 등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1919년 12월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피체되었으며, 일본경찰의 가혹한 고문으로 인하여 반미친 상태의 폐인이 되어 서울 마포(麻浦)의 어느 포교실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그 후 1920년 2월 25일 일본 유학생들이 3·1독립선언 1주년을 맞이하여 일본 의회에 독립청원을 하기 위하여 활동할 때 동경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중 피체되어 1920년 3월 9일 서울로 이송되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20년 4월 6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귀국한 승려 신상완(申尙玩)과 같이 승려들을 규합하여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종로(鐘路)경찰서에 피체되었다.


1938년 봉천행(奉天行) 화물차에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낙서한 사건으로 연좌되어 피체됨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청주(淸州)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가혹한 고문으로 인하여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33) 선백중(宣百仲) 1890. 7. 15 ~ 1931. 1. 4
[답변]

1921년 6월경 비밀결사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에 가입하여 10월부터 12월까지 전북 익산군(益山郡)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1년 6월부터 김재원(金在元, 金在天)ㆍ이열호(李烈鎬)ㆍ김한복(金漢福) 등과 함께 충남 논산군(論山郡) 소재 송종빈(宋鍾斌)의 집을 거점으로 독립운동에 대해 협의하였다. 송종빈은 홍주의병(洪州義兵),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 대동단(大同團) 등에 참여했던 유림 이내수(李來修)의 사돈이었다. 이내수는 1921년 5월경 대동단 사건 이후 고향인 논산으로 내려와, 비밀결사 조선독립단의 단장을 맡고 있었다.

1919년 음력 7월 이전에 조직된 조선독립단은 중국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지원하기 위해, 1919년 9월부터 1922년 10월까지 전북 익산군, 충남 논산ㆍ연기(燕崎)ㆍ공주(公州)ㆍ청양군(靑陽郡), 충북 영동(永同)ㆍ옥천(沃川)ㆍ제천군(堤川郡), 경북 문경(聞慶)ㆍ봉화군(奉化郡), 강원 영월군(寧越郡)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조선독립단에서는 대한국민군본부인(大韓國民軍本部印)ㆍ사령관인(司令官印) 등을 제작하고 일제가 조선을 유린한 한(恨)과 국권회복을 위한 의연금을 독려하는 격서문(檄書文)ㆍ유고문(諭告文) 등을 배포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특히 이내수가 단장을 맡은 1921년 5월 이후 독립운동자금의 모집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선백중 등도 이 무렵 조선독립단에 가입하여 활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선백중은 1921년 10월 25일 김재원ㆍ김한복ㆍ임종만(林鍾萬) 등과 함께 익산군 망성면(望城面) 어량리(漁梁里)에 있는 민가에 들어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이때 그는 김재원과 집 밖에서 망을 보았다. 집 안으로 들어간 동지들은 조선독립에 관한 격서문 등을 낭독한 후 180원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11월 25일 이후에도 논산ㆍ익산군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 1921년 12월 26일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2년 1월 25일 강경지청(江景支廳)에서 공주지방법원(公州地方法院)으로 이송되었다. 같은 해 3월 27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1919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강도죄, 협박 및 장물수수(臟物收受) 등으로 징역 6년을 받고 공소했지만,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기각되었다. 1924년 칙령 10호에 의거하여 징역 4년 6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르다 1926년 5월 28일 공주형무소(公州刑務所)에서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34) 송세호(宋世浩/宋世鎬) 1893. 8. 29 ~ 1970. 6. 13
[답변]

경상북도 선산(善山)사람으로 서울 종로(鍾路)로 전적하여 거주하였다. 일찍이 상해로 망명하여,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동년 4월 13일 임시정부 의정원 강원도 대표 의원에 선출되어 의정활동을 하는 한편 임정 재무부 재무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는 본래 강원도 오대산(五台山)의 월정사(月精寺) 스님으로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승려 복장으로 검색을 피해서 자주 국내를 내왕하였다.


또한 동년 5월에는 조용주(趙鏞周)·연병호(延秉昊) 등과 대한민국외교청년단을 조직하고 동지규합, 자금확보, 임시정부 지원 등의 목적을 수행하였으며, 그는 상해지부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그는 대동단(大同團)의 전 협(全協)과 연락하고 서울에 와서 의친왕 이 강공(義親王 李堈公)을 상해로 탈출시켜 임시정부에 참여시킬 계획을 추진하였다.


1919년 11월 그는 선발대로 정남용(鄭南用)과 같이 평양으로 출발하였는데 의친왕의 행방불명을 보고 받은 일경이 총동원되어 기차 등을 수색한 결과 안동에서 일행을 체포하였다. 이때 그도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1920년 6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병을 얻어 1922년 12월에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다. 그는 출옥 후에도 한용운(韓龍雲)을 쫓아 불교를 통한 자주독립정신의 고취에 전념하다가 1926년 6월에 낙원동(樂園洞)에서 다시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방면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된 그는 1931년 6월 다시 상해로 건너 가 연초공장을 경영하면서 크게 성장하여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광복 후 귀국하지 못하고 상해에 잔류하였다가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중공 땅에서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질문] (35) 신규식(申圭植) 1879. 1. 13 ~ 1922.
[답변]

독립운동·대종교인. 한일합병 후 중국에서 교민들의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한편, 한국인과 중국인의 협력에 힘썼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 후에는 법무총장으로 국무총리대리·외무총장 등을 겸임하면서 임시정부내의 통합에 노력했다.


1901년부터 문동학교(文東學校)를 비롯해서 중동학교(中東學校)와 청동학교(淸東學校) 등에 관여하여 교육활동을 하는 한편,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등에 참가했다. 한일합병이 되자 1911년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기반을 구축했다. 1917년 피압박민족의 독립운동 분위기 속에서 박은식·조소앙 등과 국외 독립운동단체의 단결과 통일을 주장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작성해 각지로 보냈다. 상해 임정 수립 후 그해 9월에 법무총장에 임명되었으며, 1921년 5월부터 국무총리 대리와 외무총장직을 겸임했다.


1922년 태평양회의가 결말 없이 끝나고 국민대표회 운동이 전개되자 신규식 내각은 외교적인 실패 등의 이유로 총사퇴했다. 임시정부 내의 분열상태를 비관해 단식하다가 9월 25일 서거하였다. 상해 홍차오 로 만국공묘에 안장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36) 신덕영(申德永/李伯漢/李平) 1890. 11. 25 ~ 1968. 5. 26
[답변]

서울사람이다. 1914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귀국후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다. 1920년 7월경 노형규(盧衡奎)·노석중(盧錫中) 등과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의하고 부한청년단(扶韓靑年團)을 조직하여 이에 필요한 자금 모집을 위해 지방 부호에게서 군자금을 갹출하고자 하였다.


그 수단으로서 동월 18일 서울에서 대동단 총재 김가진(金嘉鎭)의 명의로 포고문을 만들어 전라남도 광주 본촌면 일곡리(本村面日谷里) 노종료 등 광주의 부호들에게 각각 우송시켜 출금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광주에 내려가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92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받고,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던 중, 1923년 5월 병으로 가출옥하여 세브란스병원에서 가료 중 탈출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 1927년에는 최양옥(崔養玉)·안창남(安昌男)·김정련(金正連) 등과 함께 중국 산서성 태원부(山西省太原府)에서 공명단(共鳴團)을 조직하고 북만에서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비행학교 설립을 계획하였다.


이에 자금모집을 위하여 최양옥·김정련을 국내에 파견하였으나 양인이 체포됨에 따라 계획을 중지하게 되었으며, 그는 하얼빈(哈爾濱)에서 계속 지하활동을 벌이던 중 1932년 6월에 다시 체포되어 나머지 형기를 대전감옥에서 보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질문] (37) 신종선(申鍾善) 1876. 5. 24 ~ 1936. 7. 31
[답변]

신종선은 3,1운동 이후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 조선지부에 관계하면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다. 대동단은 '조선민족대동단'을 말하는 것으로 1919년 3월 말 민족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민족의 정신통일 및 실력양성'을 표방하며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서울에서 결성한 단체이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라도 일대에 지부를 설치되었으며, 김가진(金嘉鎭)이 총재로 추대되었다.

신종선은 전국적으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고 있던 1919년 봄 서울 시내에서 신덕영(申德永)의 부탁으로 황대수(黃大洙)에게 대동단 통고문(通告文) 및 포고문(怖告文)을 받아 전달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동단 활동을 원조하였다. 당시 중국 상해에 망명한 대동단 총재 김가진은 통고문 및 포고문 등을 국내운동에 보내고 있었다.

그후 신종선은 1920년 음력 7월경 김병연(金秉璉)의 의뢰를 받아 대동단 조선지부장 신덕영에게서 봉투를 받아 그것을 김병연에게 건넸다. 그가 신덕영에게서 받은 봉투 안에는 대동단 총재 김가진 명의로 된 대동단 군자금 영수증 2통이 들어 있었다. 신종선이 건네 준 대동단 군자금 영수증은 다시 김두백(金枓白)에게 주어져 군자금 모집에 사용되었다. 또한 조선지부장 신덕영은 김가진의 통고문 6~7장을 전라남도 담양,광주,화순에 있는 5명에게 그것을 보내어 제2의 독립운동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하던 신종선은 1921년 2월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대정 8년 제령 7호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22년 1월 26일에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38) 신현구(申鉉九) 1882. 12. 8 ~ 1930. 7. 13
[답변]

충남 논산(論山) 사람이다. 일찍이 고향인 논산의 각처에 개척교회를 세우며 전도사업을 벌였던 그는 1906년경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즈(williams)를 만나게 되면서 공주(公州) 영명학교(永明學校)의 교사로 활동했다.

이후 그는 1915년경 서울에 올라와 이화학당(梨花學堂) 부속 여학교의 교사로서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3·1독립운동을 맞이하여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독립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 추진체로서 동년 5월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을 결성, 단장(團長)으로 활약했다.

이러한 대한독립애국단은 자생적(自生的)으로 생겨난 것이었으나, 결성 초기부터 상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연결되면서 임시정부 지원단체로서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동단은 임시정부를 중심한 독립운동의 선전활동과 재정자금의 조달, 국내 조직망을 통한 임시정부 연통부(聯通府)의 역할 등을 수행했다. 동단은 본부를 서울에 두고 강원도·충청도·전라도 등지에 지단을 설치하고 있었는데, 그중 강원도단의 경우 속칭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그를 중심한 동단의 본부는 이무렵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대동단(大同團)·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 등의 단체와 교류를 통해 결속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단체는 1919년 11월 3·1독립운동과 같은 대규모의 만세시위를 연합하여 거행하기로 하고 이를 추진해 갔는데, 도중 대동단의 조직이 파괴당하고 신현구도 11월 20일에 일경에 붙잡혔다.

이로써 만세시위는 당초의 계획에서 크게 어긋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때까지 대한독립애국단의 조직이 발각되지 않았으나 1920년 1월 강원도단의 조직이 드러나면서 동단 조직 전모가 알려졌고, 이에 따라 그는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만기출옥 후에도 계속 항일운동에 참여하던 중 1927년 1월 잡지 ≪심경(心鏡)≫에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글을 실었다가 다시 일경에 붙잡혀 징역 3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말미암아 1931년 6월 17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39) 안교일(安敎一) 1888. 6. 1 ~ 1950. 6. 29
[답변]

서울 사람이다. 1919년 11월 서울에서 신봉균(申鳳均)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집 및 독립운동 선전을 목적으로 한 혈복단(血復團)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안교일은 동지들과 함께 충남 논산군 연산면(連山面) 연산리(連山里) 홍진유(洪鎭裕)의 집으로 가서 혈복단 규칙서 수십 매 등을 교부하고 지방 부호로부터 자금 모집을 권유하였다. 동년 11월 20일 안교일은 김일(金一) 지시로 ‘독립신문(獨立新聞)’ 호외(號外) 약 50매를 정희종(鄭喜鍾)에게 인쇄토록 하였다. 동월 25일에는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의 선언서 약 10매를 역시 정희종에게 인쇄토록 하였다. 이 문건들은 다시 김일에게 주었다. 그는 이후 이 문건들을 김일로부터 다시 받고, 동대문 부근에서 강정희(姜正熙)를 만나 정희종에게 동월 27일 만세시위가 있으니 26일 밤에 모두 배포하라고 알려주며 주었다. 또한 동월 26일 밤 김교선(金敎善)의 집에서 정희종에게 내일 자동차로 배포하라고 선언서 약 200매를 전달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된 안교일은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40) 안이현(安履賢) 1891 ~ 미상
[답변]

1919년 4월 함남 이원에서 대동단에 가입하고 상해를 거쳐 간도로 건너간 뒤 1920년 3월 중국 화룡현의 대한국민회에 가입하여 1920년 10월부터 1921년 4월 까지 함경도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4월 하순 함남 이원(利原)에서 광부로 일하던 중, 대동단(大同團) 단원 홍성일(洪聖一)의 권유로 대동단에 가입하였으며, 1920년 1월 상순 상해를 거쳐 간도로 건너가 같은 해 3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하였다.

대한국민회는 3·1운동 이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더불어 북간도지역을 대표하는 항일독립운동단체로, 연길현 춘양향(春陽鄕)에 본부를 설치하고, 동· 서·남·북·중 등 5개 지방회와 70개에 달하는 지회를 설치하였다.

화룡현(和 龍縣) 소재 대한국민회 서부지방총회(西部地方總會)에 가입한 그는 서무부장 홍 정도(洪正道) 휘하에 배속되어 서무부 서기로 활동하였고, 같은 해 10월 서부지 방총회장 한대진(韓大震)으로부터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국내로 파견되었다.

1921년 4월까지 함경남북도 일대를 순회하며 무산(茂山)의 김약연(金若淵), 명천 (明川)의 김계태(金桂太)·김한송(金漢松), 길주(吉州)의 문희종(文鍾熙), 성진(城 津)의 이효근(李孝根)·양진홍(梁珍鴻)·이화선(李化善)·이왕담(李王錟), 함흥(咸 興)의 이배식(李培式) 등을 동지로 규합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여 약 1,000여 원을 모집하였다.

1921년 4월 21일 함흥 읍내에서 삼성병원(三省病院) 이배식을 위장 방문하였 으나, 매복한 함흥경찰서 경찰에게 발각되어 격투 끝에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1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폭발물취체벌칙 위반·대정(大 正)8년제령(制令)제7호 위반으로 징역 8년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8월 3 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취하로 형이 확정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 다 1927년 5월 5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41) 양인묵(梁仁黙) 1877. 6. 19 ~ 1962. 12. 18.
[답변]

전남 광산(光山) 사람이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그는 일제를 이땅에서 구축하기 위해 이듬해인 1906년 광주(光州)에서 기의(起義)한 김태원(金泰元) 의병장의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에는 고향인 전남 광산군(光山郡) 임곡면(林谷面)에서 군중들을 주도하며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이후 항일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20년 10월 서울 소격동(昭格洞)에 거주하는 신덕영(申德永)의 권유에 따라 대동단(大同團)에 가입, 동지들을 규합하여 광주(光州)·곡성(谷城)·화순(和順) 등지의 부호에게 경고문을 발송하고 군자금 모금운동을 위해 활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1921년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그해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 항소심에서 무죄방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질문] (42) 양정(楊楨) 1865. 11. 26 ~ ?
[답변]

평남 강서사람이다. 양정은 보부상을 했던 경력으로 1919년 제2회 한국독립선언서에 상공단의 대표자에 서명하고, 그것을 배포시킨 일에 간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민족대동단의 활동 근거지를 제공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국내의 독립운동 열기가 고조되어갔다. 이에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민족의 대동단결을 표방하며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고 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을 조직하였다. 대동단은 진신단(縉紳團)·유림단(儒林團)·군인단(軍人團)·부인단(婦人團)·상공단(商工團)·청년단(靑年團)·지방단(地方團), 기타 몇 개의 단으로 나누어 8월경부터 제2독립선언서 낭독을 위한 시위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양정은 1919년 8월경, 10년지기인 전협(全協)으로부터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의 설립 목적과 취지를 듣고 가입하여 상공단장(商工團長)이 되어, 보부상을 규합하여 인쇄물을 배포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 국내 활동이 어렵게 되자, 본부를 상해로 이전하기로 결심하고 10월 10일 총재 김가진의 상해 망명을 단행하였다. 이어 전협·김가진·정남용(鄭南用)·한기동(韓基東)·나창헌(羅昌憲) 등과 협의하여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의 상해 망명을 추진하는 등, 11월 27일 오후 5시를 기하여 광화문 앞 광장에서 제2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양정은 전국 각도에 36명의 보부상을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시킬 여비 1인당 100원, 즉 3,600원을 지출하였다. 그리고 전협으로부터 받은 540원을 주고 자기 아내의 명의로 구입한 예지동 집을 주고 근거지로 삼았다.

동지 권태석이 검거되자, 매우 낙담한 전협을 위로하며, “절대 걱정하지 마라. 무릇 중대한 일을 기획하는데 그런 정도의 장해는 흔히 있는 것이므로 굳이 비관할 필요없다. 결코 신고하지 말고 계속하여 독립운동을 해야한다”고 격려했다.


나창헌 등이 선언서 인쇄에 착수 중, 11월 19일경 체포되었다. 양정은 1920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출판법·보안법 위반 및 사기 등의 혐의로 공판에 회부되어 징역 2년(미결구류 200일 통산)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43) 유경근(劉景根) 1877. 10. 27 ~ 1956. 1. 16
[답변]

경기 강화(江華)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부내면(府內面)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주모자 색출시 서울로 피신하였다가 피체되었으나 일신상의 문제로 보석되었다.


그 후 노령(露領) 해삼위 신한촌(海蔘威新韓村)에서 이동휘(李東輝)로부터 독립군양성을 위해 국내지원자를 모집하라는 지령을 받아 김현구(金鉉九)와 함께 여러명의 청년을 모집하여 입대시켰다. 또한 임정의 연통제(聯通制) 조직 및 대동단(大同團)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만주광복군총영(滿洲光復軍總營)으로부터 미국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알려주기 위하여 일제기관 등의 파괴용 폭탄과 육혈포 등을 결사대장 김영철(金榮喆)이 가지고 와서 유경근의 집에 보관케한 사실이 일경에게 탐지되어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강화군(江華郡)에서 광명학교(光明學校)를 설립하고 청소년교육에 힘썼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질문] (44) 유두엽(柳斗燁) 1899. 8. 28 ~ 1971. 3. 19
[답변]

전라남도 영광(靈光)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날 당시 서울에서 유학하던 중,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같은 유학생인 조철현(曺喆鉉)과 함께 3월 5일 귀향하였다. 귀향후 읍내의 노동조합장인 정인영(鄭仁英)과 보통학교 선생인 이병영(李秉英)·박태엽(朴泰燁) 등을 만나 서울의 독립만세시위 상황을 알려주고 영광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제의하여 찬성을 얻었다.

3월 10일 정오에 영광읍 장터에서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그는 정인영·조철현과 함께 주민의 연락·동원을 담당하였으며, 이병영과 박태엽은 학교생도의 참가를 분담하였다.

한편,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국장(國葬)을 참례하러 서울에 올라간 읍내 유지 이좌근(李左根)이 귀향하여 조병현(曺炳鉉)·조맹환(曺孟煥)·노 준(魯駿)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이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박병문(朴炳文)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며 9일 밤 그 일부를 배포하였다.

이튿날인 10일 정오경 영광읍 장터에 수백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시위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철현의 국내외 정세에 대한 연설이 있은 다음, 정인영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의 선두에 서서 장터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제의 무력행사로 말미암아 강제로 해산되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때 몸을 피하여 노 준·조철현과 함께 상경하여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결국 체포되었다. 이해 8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질문] (45) 윤용주(尹龍周) 1884. 1. 29 ~ 1949. 8. 18
[답변]

충남 아산(牙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 홍면희(洪冕熹)·이규갑(李奎甲) 등으로부터 독립운동단체를 망라한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수립을 목적하는 국민대회의 회원 되기를 권고받았다.


1919년 9월 서울에서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이 조직한 조선독립대동단(朝鮮獨立大同團)에 가입 지방단원 모집 담당이 되어, 임응철(林應喆)·김재구(金在九)·강경진(姜景鎭) 등에게 대동단(大同團)에 가입케 하고, 지방동지의 규합과 군자금 모집 등을 위해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政治犯處罰令)·출판법(出版法)·보안법(保安法)·사기(詐欺) 등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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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OR

※ 『독립유공자 공훈록』과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의 자료를 근거로 기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