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언문
조선민족대동단
대동단서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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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아래의 명단은 구체적인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분들의 성함을 밝혀둔 것입니다
[답변]

권태석(權泰錫) 권헌복(權憲復) 김병기(金炳起) 김봉양(金鳳陽) 김상설(金商說) 김세응(金世應)

김진명(金振明) 김홍진(金宖鎭) 나경섭(羅景燮) 노 준(魯 駿) 노홍제(魯弘濟) 박용주(朴龍柱) 

신도안(申道安) 신영철(申瑩澈) 신태연(申泰鍊) 염광록(廉光祿) 윤종석(尹鐘奭)

이겸용(李謙容) 이능우(李能雨) 이병우(李炳祐) 이 정(李 政) 이소후(李霄吼) 이직현(李直鉉)

전상무(田商武) 전필순(全弼淳) 전필형(全弼涥) 정규식(鄭奎植) 조형구(趙炯九)

지봉서(池鳳瑞) 한일호(韓逸浩)

 

[질문] 강경진(姜景鎭) 1893. 5. 4 ~ 1940.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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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그는 1919년 7월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한 후 김재구(金在九)·한태현(韓泰鉉) 등과 남원지방을 중심으로 조직확대에 힘을 쏟는 한편 서울의 대동단 본부로부터 교부받은 각종 선전물을 배포하면서 독립의식을 고취하였으며, 군자금을 모집하여 대동단 본부에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대동단은 1919년 3월말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 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독립운동단체로서, 본부를 서울에 두고 전국 각처에 지단을 설치하였다. 또 동단에서는 당시 사회 각층을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들 각층의 인사들을 통일·종합함으로써 범국민적 조직을 구상했다.

 

강경진 등이 활약한 남원지단에서는 주로 청년단원을 근간으로 조직활동을 벌였다. 또 이들은 자금을 수합하여 서울의 대동단본부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런 1919년 11월 대동단 본부가 주도한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 망명계획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대동단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단의 전라북도 지단도 자연 발각되었고, 이로 인하여 그는 1920년 3월 15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질문] 권태석(權泰錫) 1895. 8. 18 ~ 1948. 8. 23
[답변]

경상북도 김천사람으로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김익환의 권유로 대동단에 참여하여 자금조달과 각종 선전문건의 인쇄 및 배포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돼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뤘다.

 

조선민족대동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 지원을 위해 만든 비밀독립운동 단체로 군자금 모집, 선언문, 진정서, 포고문 등을 인쇄 배포했으며 단원은 관리, 유학자, 종교인, 청년, 학생, 부녀자 등 각계각층 11개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점조직이었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 1924년 10월 고려공산동맹 결성에 참여했고, 1926년 7월 좌파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민흥회 결성을 위한 발기 심사위원․창립 준비위원 등을 지냈다.

이후 1927년 좌우익 세력이 합작해 결성한 대표적인 항일단체인 신간회에 참가하여 서무부장 및 총무간사로 활동하였다.

 

1929년에는 좌파단체 가입 건 때문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아 5년8개월2일의 옥고를 치뤘다.

 

광복 이후, 신한민족당 교섭위원으로 한국 독립당을 창당하는데 관여하고, 당에서 조사부장이 되었다.

1947년 모스크바 3상회의 때 협의한 한국 신탁 통치안에 찬성하는 입장을 지녔으며, 1948년 남북협상 길에 올랐다가 이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김가진(金嘉鎭) 1846. 2. 25 ~ 1922.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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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문신·독립운동가. 본관은 안동. 호는 동농(東農). 예조판서 응균(應均)의 아들이다. 1877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그뒤 규장각 참서관(奎章閣參書官이) 되었다.

 

1880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1881년 장례원주부(掌禮院主簿)가 되었다. 그뒤 인천항 통상사무아문주사(通商事務衙門主事)·부수찬(副修撰)·주차일본공사관참찬관(駐箚日本公使館參贊官)과 장령(掌令)·사복시정(司僕寺正)·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고, 1887년부터 주일본판사대신(駐日本辦事大臣)으로 4년간 동경에 주재하였으며, 1891년부터 안동대도 호부부사를 지냈다. 1894년에는 군국기무처회의원(軍國機務處會議員)이 되어 내정개혁에 참여하였으며, 병조참의·외무독판서리(外務督辦署理)·전우국총판(電郵局總辦)·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농상공부대신, 1896년 중추원 1등의관을 지냈다. 갑오경장이 실패한 뒤에는 1896년 7월에 조직된 독립협회의 위원에 선임되었고, 1897년 신구법(新舊法)을 절충하기 위하여 설치한 교전소(校典所)의 지사원(知事員)과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900년 중추원의장, 1902년 궁내부특진관(宮內部特進官), 1906년 충청도관찰사를 지냈으며, 대한자강회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다.

 

1907년 규장각제학을 역임하였고, 1909년에는 대한자강회의 계승단체인 대한협회의 회장이 되어 친일단체 일진회를 성토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남작이 수여되었으나 이를 물리치고,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의 총재로 추대되어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 북로군정서 고문을 역임하였으며, 대동단 해외본부를 건립하였다. 한때 임정의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1922년 7월 4일 상해에서 서거하여 만국공원에 안장되었다.

[질문] 김사국(金思國) 1895. 11. 9 ~ 1926. 5. 8
[답변]

1910년 만주와 시베리아로 망명, 국권회복을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였고, 1919년 대동단에 가입하고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받고 출옥 후에는 노동운동을 하였으며, 1921년 4월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의 편집부 위원으로 被任되어 同年 9월 태평양회의에 즈음하여 연합회 대표로 한국의 독립을 요망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1922년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를 조직활동하다가 1923년 露領을 거쳐 만주로 망명하여 동양학원(東洋學院)과 대동학원(大同學院)을 설립하고 구국교육운동(救國敎育運動)에 전념하였으며, 이후 소련으로 가서 조선사회운동의 통일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1924년 10월 귀국하여 고려공산동맹(高麗共産同盟)을 결성하고 책임비서를 역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김영철(金永喆) 1898.10. 27 ~ 1987. 7. 28
[답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에 참여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공원을 출발하여 종로를 지나 남대문정거장 앞에 이르는 시위행진에 동참하였다. 이어 3월 5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남대문 앞의 만세시위에도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독립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년 5월에 신현구(申鉉九) 등에 의해 조직된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독립애국단은 자생적(自生的)으로 생겨난 것이었으나, 결성 초기부터 상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연결되면서 임시정부 지원단체로서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동단은 임시정부를 중심한 독립운동의 선전활동과 재정자금의 조달, 국내 조직망을 통한 임시정부 연통부(聯通府)의 역할 등을 수행했다. 한편 그를 비롯한 동단의 본부 인사들은 이무렵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 등의 단체와 교류를 통해 결속을 강화하고 있었는데 특히 그는 조선독립대동단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동단은 전협(全協), 최익환(崔益煥) 등이 독립달성을 위해 조선 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로서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단원으로 포섭하여 전국적인 조직을 계획하고 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선언문' '진정서' '방략 및 기관'이란 제목의 항일문건과 중국의 신문에서 내용을 발췌한 '포고' 등의 문서를 제작 배포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이어 '선언서' '경고문' '일본 국민에게 고함' 등의 항일문건을 제작하여 국내 각지는 물론 중국을 거쳐 파리강화회의의 각국 대표 및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김영철은 이러한 문건의 국내 배포를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처벌령, 출판법, 보안법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김용원(金庸源/金仲玉) 1892. 2.16 ~ 1934. 6. 13
[답변]

충청남도 대덕(大德) 사람이다.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면서 실력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이후에는 항상 조국 광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가던 무렵 광무황제가 독살 당하자 만세운동의 분위기가 성숙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향리에서 참여하였다가 사촌인 김태원(金泰源)과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김 구(金九) 아래에서 경무국원(警務局員)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9월부터 다음해(1920) 6월까지 황포(黃 )군관학교에 들어가 군사학을 전수(專修)하였다고 한다.

 

군관학교를 수료한 그는 1920년 7월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으며, 북경(北京)에서 박용만(朴容萬) 나창헌(羅昌憲) 등과 향후 행동계획을 상의하고 비밀히 국내에 들어와 이 강(李堈)공의 상해 탈출 공작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 강공이 만주 안동(安東)에서 체포됨에 따라 다시 상해로 도피하였다.

 

상해에서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활약하였으며, 1921년 5월에는 김 구(金九)의 후임으로 임정경무국장에 임명되고 동시에 의정원 청원 징계(請願 懲戒) 상임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동년 11월에는 태평양 회의에 관한 임시정부의 후원과 지도를 목적으로 "외교후원회"를 조직하고, 그는 박찬익(朴贊翊)의 후임으로 간사가 되어 태평양회의 축하회를 거행하는 동시에 홍 진 신익희 이진산(李震山) 등 25명과 함께 연서한 청원서를 재미 각국 대표자에게 송부하여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1922년 3월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사임하고 1923년에 다시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경에게 탐지되어 1924년 9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신병이 발생하여 형집행 정지처분으로 출옥하였다. 1925년 6월 출옥 후에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일대에서 다시 동지규합 및 군자금 모집 등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행하던 일본인 형사에게 발각되어 1927년 1월 또 다시 체포되었으며 1928년 11월에 소위 강도교사죄로 서울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4년 2월에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병보석을 받고 출옥하였으나 옥중에서 얻은 지병으로 인하여 동년 6월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하고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김의한(金毅漢) 1900. 1. 8 ~ 납북
[답변]

서울 사람이다. 1919년 10월 국내에서 비밀결사 대동단(大同團)의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부친 김가진(金嘉鎭)과 함께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8년 6월 상해에 있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中國本部韓人靑年同盟)의 상해지부 조직에 참가하여 재정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2년 5월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홍구공원(虹口公園) 폭탄의거로 포악해진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상해에서 항주(杭州)로 이전할 때 김구(金九) 등과 함께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으로 피신하여 임시정부 활동에 참가하였고, 선전위원회(宣傳委員會)의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 10월 임시정부 비서처(秘書處)의 비서와 선전위원회(宣傳委員會)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중경방송국을 통하여 국내에 있는 한인들에게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5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3당이 통합하여 신당인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립할 때 그는 이의 감찰위원회(監察委員會) 상무위원에 피선되었으며 그 후 한독당의 조직부 주임 및 선전부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40년 9월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이 중경으로 이전한 후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광복군 활동에 대한 공식적인 동의를 얻게 되자 광복군총사령부(光復軍總司令部) 주계(主計)에 선임되었으며, 1943년 8월에는 광복군 조직훈련과장을 맡았고, 1945년 6월에는 정훈처(政訓處) 선전과장으로 광복군 활동에 참가하였다. 1941년 12월 27일 임시정부 외교위원회 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질문] 김익하(金益夏) 1849. 7. 13 ~ 1936. 2. 26
[답변]

서울 사람이다. 김익하는 1908년경 구한국(舊韓國)의 인장을 위조한 죄로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에서 징역 5년에 처해져 3년간 복역하였다. 71세의 나이에 1919년 제2회 한국독립선언서의 노인대표자에 서명하고 그것을 배포시킨 일에 간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4월 13일 중국 상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국내의 독립운동 열기가 고조되어갔다. 이에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민족의 대동단결을 표방하며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고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을 조직하였다.

 

김익하는 1919년 11월 초순, 서울에서 대동단원(大同團員) 이신애(李信愛)로부터 독립운동의 거사 계획을 듣고 적극 동참하고, 김상열(金商說)·이겸용(李謙容)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거사 당일 이신애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장춘관(長春館)으로 모이라는 통보를 받고, 김상열과 함께 장춘관으로 갔다. 오후 5시를 기해 이곳에서 대표자 전부가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계획이었으나, 김익하를 포함하여 참석한 사람은 조형구(趙炯九)·정설교(鄭卨敎) 등 총 5명뿐이었다. 이들은 오후 12시까지 동지들을 기다리다가 해산하였다. 한편 나창헌·안교일·정규식(鄭奎植)이 선언서 3,000매를 각각 인쇄, 오후 5시를 기해 자동차 3대를 이용하여 신속하게 시내에 배포할 예정이었으나, 사전 정보를 입수한 일경에 의해 주모자들이 체포됨으로써 실패하였다.

 

김익하는 1919년 12월 3일 종로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고, 1919년 12월 10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취조와 신문을 받았다.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 처벌령·출판법·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미결구류 200일 통산)을 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김종진(金鍾振) 1903. 1. 13 ~ 1962. 3. 11
[답변]

평안북도 강계(江界)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의 독립만세운동과 같은 해 11월 28일의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종진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참여하여 시가(市街)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리고 그 해 3월말에 대동단(大同團)이 조직되자 여기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대동단은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이다. 1919년 3월 말 대동단 결성을 주도한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은 그 해 10월 초순경 대동단의 본부를 상해(上海)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 망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3·1독립운동과 같은 대대적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거사 내용과 방법도 3·1독립운동의 방식을 쫓아 진행시켰다.

 

이때 김종진은 자신의 숙소를 거사 논의 장소로 제공하고, 대동단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거사를 준비하던 중 의친왕(義親王)의 상해 망명계획이 일본 경찰에 사전 탐지되고, 그 해 11월 11일 만주 안동역(安東驛)에서 의친왕 일행이 피체됨으로써 대동단의 조직은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경찰의 포위망을 피한 김종진은 나머지 인사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1월 28일 김종진을 비롯한 정규식(鄭奎植)·박정선·나창헌(羅昌憲) 등은 종로 안국동(安國洞) 경찰관주재소 앞 광장에서 미리 준비해 온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체포된 김종진은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 및 출판법,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1년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김찬규(金燦奎/號:石然) 1864. 3. 9 ~1931. 12. 11
[답변]

경북 영주(榮州) 사람이다. 대한제국시기에 비서승(秘書丞) 등의 관직을 역임했던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시세를 한탄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렸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한 대동단(大同團)에 초기부터 참가하며 조직확대에 많은 힘을 쏟았다.

 

대동단은 독립달성을 위해 전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동년 3월말 서울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로서,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단원으로 포섭함으로써 전국적 조직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사회 각층을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들을 통일·종합하여 독립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다.

 

이때 그는 주로 진신(縉紳)·유림(儒林) 등의 상류층 인사를 규합하는 책임을 맡았고, 이를 위해 박영효(朴泳孝)·김가진(金嘉鎭)·민영달(閔泳達)·곽종석(郭鍾錫)·맹보순(孟輔淳) 등을 대상으로 포섭활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사들이 냉담하거나 미온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처음의 계획처럼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다만 김가진의 영입을 성사시키는데 그쳤다. 그리고 곽종석 문하(門下)의 유림들을 포섭하기 위해 동년 5월 초순 경남 거창(居昌)으로 내려갔는데, 이무렵 서울에서 최익환 등이 일경에 피체되면서 그의 행적이 드러나게 됨에 따라 피신하였다.

 

1919년 11월에 대동단의 조직이 발각된 후, 그는 1920년 가을에 신태식(申泰植)과 함께 만주(滿洲)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독립군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동단의 경상남도 단장을 맡아 동지 포섭 및 군자금 모집 활동을 폈다. 1921년 겨울 동단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되자 그는 만주로 넘어갔으며, 그후 국경을 왕래하면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계속 전개했다. 그러던 중 1922년에 남만군정서(南滿軍政署)와 연결되어 국내에 잠입하여 경북 문경(聞慶)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다가 동년 6월경에 피체되어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4년 2월에 출옥한 직후부터 다시 항일투쟁을 전개한 그는 동지 신태식(申泰植)·손병선(孫秉善)·신석원(申錫遠) 등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 군무총장(軍務總長) 노백린(盧伯麟) 명의의 지령문을 수백매 인쇄한 뒤 경남 밀양(密陽)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폈다. 이와 함께 이들은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상해(上海) 망명을 추진했는데, 사전 발각됨으로써 1925년 2월경에 피체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31년에 순국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나창헌(羅昌憲/王成俊) 1896. 1. 29 ~ 1936.6. 26
[답변]

평안북도 희천(熙川) 사람이다. 서울에 올라와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재학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교 대표로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구금되었다고 한다. 1919년 5월에 동지 안재홍 연병호 송세호 이병철 등과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 활동하였다.

 

민족운동에 첫발을 디딘 후 대동단(大同團)의 비밀단원이 되어 이 강(李堈)공(公)을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로 모셔 가려다가 발각되자 1920년 1월 상해로 탈출하여 대동단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도와 동단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곳에서 기관지 "독립"을 간행하여 독립정신을 앙양하였으며, 1920년 11월에는 노무용(盧武用) 김재희(金載熙) 등 7인과 같이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하고 그 단장이 되어 철(鐵)과 혈(血)로써 왜적을 배제(排除)해야 된다고 주창하였다.

 

그리고 김 구(金九) 손정도(孫貞道) 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창립하는데 참여하였다가, 1920년 10월 28일 동회 이사에 취임하였으며, 동년 11월 2일에는 동회(同會)의 교육부원(敎育部員)으로 노병회 설립취지를 살려 나갔다. 임시정부의 외곽지원단체인 노병회는 임시정부의 기반을 공고히 다져 나가는데 기여하였다. 이어 1924년 6월 15일에는 임노공부원(任勞工部員)으로 노병(勞兵)을 초모하고 훈련시키는데 앞장선 바 있다.

 

한편 그는 1924년 1월 12일 교민단의사회(僑民團議事會)의 학무위원(學務委員)으로 취임하여 노병회를 이끌어 가면서 상해 일대에 거주하는 한국 동포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임시정부의 지원을 호소하는 등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같은 해 9월 8일에는 교민단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어 김 구 등 임시정부 요인을 도와 민주공화제 정착과 그 활동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또한 독립운동선상의 단합을 도모하기 위한 국민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을 탄핵하기 위한 심판위원장이 되어 그해 3월 13일 드디어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여 결국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과 임정의 경무국장 내무부차장 등을 역임하면서 독립운동에 몸바쳤으며, 병인의용대장을 역임하면서 상해에 있던 일본영사관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두 동생과 같이 이를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으나 사전에 탄로가 나서 두 동생은 체포되고 그는 항주(杭州)로 피신하였다.

 

그 후 사천성만현(四川省萬縣) 성내에서 만현의원을 개설하여 의료업에 종사하였으며, 1933년 1월에는 흥사단(興士團) 원동대회에 참가하여 선우 혁(鮮于爀)과 함께 제6반에 소속되어 활동하였고, 동년 7월에는 비밀리에 상해로 돌아와 병인의용대를 부흥시키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6년 6월 그가 경영하던 만현병원(萬縣病院)에서 신병으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동창률(董昌律) 1868 ~ 1943. 4.
[답변]

서울 사람이다. 그는 3·1독립운동 직후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활동했다. 일찍이 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에 참여하여 평의원(評議員)과 경무위원장(警務委員長) 등을 지내며 민족양심에 벗어나기도 했던 그는 경술국치(庚戌國恥)이후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리던 중, 오랜 동지였던 전 협 등이 범국민적 독립운동단체를 목표로 대동단을 결성하자 이에 참여했다.

 

대동단 가입 이후 그는 독립의식의 고취를 위한 선전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의 배포에 앞장섰고, 1919년 8월 함경북도 단천(端川)에 파견되어 김병권(金秉權) 등을 동지로 포섭하는 등 조직 확대에도 힘을 쏟았다. 한편 동년 10월 대동단은 본부를 상해(上海)로 옮길 것을 계획하고, 제1단계로 동년 10월 10일 동단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상해로 망명케 한 뒤 의친왕(義親王)의 상해 망명을 추진시켰는데, 이때 그도 전 협·정남용(鄭南用) 등과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에 따라 동년 11월 9일 의친왕이 상해로 출발할 수 있었으나 이 사실이 일경에 도중 탐지됨으로써 11월 11일 만주(滿洲) 안동역(安東驛)까지 갔던 의친왕 일행은 피체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동단의 조직은 파괴당하였고,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질문] 민 강(閔 橿) 1884. 7. 23 ~ 1924. 3.
[답변]

충북 청주(淸州) 사람이다. 그는 1909년경, 기울어가는 국운을 일으키기 위해 안희제(安熙濟)·김홍량(金鴻亮)·신백우(申伯雨)·남형우(南亨祐) 등 각계 인사 80여명과 함께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을 조직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그는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남대문(南大門) 밖에 소의학교(昭儀學校)를 세워 민족교육사업의 일선에 나섰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에는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홍면희(洪冕熹)·안상덕(安商悳)·이규갑(李奎甲) 등의 인사와 함께 세칭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의 성립과 국민대회(國民大會) 개최를 추진했다. 그는 주로 연락과 준비의 임무를 맡아, 홍면희·이규갑 등과 국민대회 취지서 및 임시정부의 약법(約法) 등을 작성하여 준비를 진행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경영하는 동화약방(同化藥房)을 연락거점으로 삼아 자금조달활동을 폈다. 이일로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동년 8월에 보석으로 출옥했다.

 

출옥 직후 그는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이 주도·조직한 대동단(大同단)에 가입·활동했다. 역시 그는 동화약방을 대동단 및 연통본부(聯通本部)의 연락거점으로 제공하는 한편 대동단이 일제의 소위 천장절(天長節)인 동년 10월 31일을 기해 거행하려 한 독립만세시위에 강 매(姜邁)와 함께 서울의 7개 학생단체들의 동원책임을 맡고 이를 추진했다.

 

이때 민 강 등이 통솔한 학생청년단체는 연통단(聯通團)·중앙단(中央團)·중앙청년단(中央靑年團)·독립청년단(獨立靑年團)·불교중학학림(佛敎中央學林) 등이었다.

 

그런데 만세시위가 예정보다 연기되는 과정에서 일경에 발각됨에 따라 동년 11월 1일에 피체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1921년 3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확정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1924년 1월 교민단의사회(僑民團議事會)의 학무위원(學務委員) 등을 역임하며 활동했는데 1924년 3월 일경에 다시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박노창(朴魯昌) 1888. 12. 24 ~ 1977. 5. 6.
[답변]

경북 달성(達城) 사람이다. 1914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고 있던 시기에 만주 통화현 이도구(通化縣二道溝)에서 동지들과 함께 동화학교(東華學校)를 설립하여 민족의식과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민족교육의 실시에 힘썼다. 이후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항일투쟁을 계속하던 중 1919년 5월경 대동단원(大同團員) 정남용(鄭南用)으로부터 대동단의 결성취지를 듣고 이에 찬동하여 동단에 가입·활동하였다.

 

대동단(大同團)은 3·1운동 직후 한민족의 민족역량을 결집하여 민족적 대동단결과 실력양성을 표방하고 민족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담당할 것을 목적으로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하여 결성된 비밀결사였다.

 

동단은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여 황족·유림·종교·상공·노동·청년·군인·부인·보부상 등 전 사회 각 계층의 인사들을 규합하려던 조직으로서, 주로 각종 인쇄물의 인쇄·배포 등을 통한 독립사상의 고취와 동단의 선전 및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그는 이건호(李建鎬)의 집에 영동활판소(永同活版所)라는 비밀 인쇄소를 차려 놓고 정남용·권헌복(權憲復)·이근고(李根高)·김용의(金用儀) 등과 함께 대동단의 기관지인 〈대동신보(大同新報)〉를 제작·발행하였으며, 또한 대동단규칙(大同團規則) 등 지하 문서와 각종 선전물을 인쇄·발송하는데 힘썼다.

 

이후 정남용의 지시를 받고 동지 규합과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기 위하여 〈대동신보〉, 〈대동단규칙〉을 소지하고 부산에 거주하는 구상서(具尙瑞)를 만나 그와 함께 선전물을 배포하는 등 선전활동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활동상황이 일경에 탐지·피체되어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질문] 박원식(朴源植) 1893. 8. 6 ~ 1955. 10. 20
[답변]

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그는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졸업 후 조치원청년회 회장으로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3·1운동 때에는 홍천(洪川)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3·1운동 직후에는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가입하여 제2회 독립만세 시위계획에 참가하였다.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던 상황에서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조선민족대동단은 조선 독립을 위하여 먼저 민족 대단결을 목표로 민족사회의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망라한 조직을 구상해 갔다. 또한 동단은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 망명을 계획·추진하는 한편 3·1운동 때와 같은 만세시위를 일으키려는 계획을 추진해 갔다. 이 때 박원식은 조선민족대동단의 단원으로 만세시위 계획의 실무를 맡았다.

 

그는 나창헌(羅昌憲)·안교일(安敎一)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사용할 격문 인쇄 및 배포의 책임을 맡았으며, 거사 당일에 만세시위를 선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1차 계획은 거사 당일날 운동원간의 약속에 차질이 생겨 예정대로 만세시위를 벌이지 못하였는데, 이에 그는 이신애(李信愛)·정규식(鄭奎植) 등과 함께 재차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11월 28일 안국동 광장에서 미리 준비해 간 태극기와 '조선독립 만세'라고 쓴 깃발을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피체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1921년 3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 처벌령·출판법·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조선일보 홍성지국장으로 있으면서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운동과 학생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1925년에는 광천노동조합(廣川勞動組合)과 광천청년회·광천소년회 등의 조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9년 11월의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1930년 2월 홍성에서도 홍성공립공업전수학교 학생들에 의해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그런데 이 일이 일경에 의해 탐지되면서 10여 명의 학생이 피체되었을 때, 그는 일경의 무리한 언사와 탄압에 항의하다가 일경의 불법적 직권남용에 의해 소위 경찰범처벌규칙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구류 25일을 받았다. 한편 그는 1930년 11월 신간회(新幹會)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민족협동전선운동에 크게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박정선(朴貞善) 1874 ~ ?
[답변]

서울 동사헌 사람이다. 대동단(大同團)의 일원으로 이른바 제2차 독립선언 계획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박정선은 1919년 대동단에 가입하였다.

 

3.1운동의 토양 위에서 조직된 대동단은 전민족의 대동단결을 표방하며 한국 독립을 주창하였다. 대동단은 비밀결사로서 대동신보(大同新報)를 발행, 배포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조직을 중국 상해(上海)로 옮기고,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의 상해 망명을 추진하였으나 일제에 탐지되어 좌절되었다. 이후 대동단은 제2차 독립선언계획을 통해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3.1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일제의 야만성을 힐책(詰責)하고 한국 독립을 주창했다.

 

1919년 11월 28일 박정선은 서울 안국동 광장 등지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짖던 중 일경에 붙잡혀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백초월(白初月/白義洙/寅山) 1878. 2. 17 ~ 1944. 6.
[답변]

경남 진주(晋州) 사람이다. 1919년 4월 승려의 신분으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라는 비밀단체를 경성중앙학교(京城中央學校) 내에 조직하고 그 단체의 단장이 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및 독립군(獨立軍)을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같은해 7월에는 비밀출판물로 〈혁신공보(革新公報)〉를 간행하여 국민들의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1919년 8월 전남 천은사(泉隱寺)의 주지인 하룡하(河龍河)로부터 군자금으로 200원을 받고 동년 10월 7일에 다시 300원을 모금하여 만주 길림성(吉林省)에 있는 독립군(獨立軍)에 11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6명을 각각 선발하여 그들에게 여비를 주어 군자금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1919년 11월 25일 단군(檀君)의 건국기념일을 기하여 시위계획을 세워 종로 삼청동(三淸洞)에 태극기와 단군기념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성립에 관한 축하문과 선언서 및 포고문 등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1919년 12월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피체되었으며, 일본경찰의 가혹한 고문으로 인하여 반미친 상태의 폐인이 되어 서울 마포(麻浦)의 어느 포교실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그 후 1920년 2월 25일 일본 유학생들이 3·1독립선언 1주년을 맞이하여 일본 의회에 독립청원을 하기 위하여 활동할 때 동경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중 피체되어 1920년 3월 9일 서울로 이송되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20년 4월 6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귀국한 승려 신상완(申尙玩)과 같이 승려들을 규합하여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종로(鐘路)경찰서에 피체되었다.

 

1938년 봉천행(奉天行) 화물차에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낙서한 사건으로 연좌되어 피체됨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청주(淸州)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가혹한 고문으로 인하여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송세호(宋世浩/宋世鎬) 1893. 8. 29 ~ 1970. 6.13
[답변]

경상북도 선산(善山)사람으로 서울 종로(鍾路)로 전적하여 거주하였다. 일찍이 상해로 망명하여,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동년 4월 13일 임시정부 의정원 강원도 대표 의원에 선출되어 의정활동을 하는 한편 임정 재무부 재무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는 본래 강원도 오대산(五台山)의 월정사(月精寺) 스님으로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승려 복장으로 검색을 피해서 자주 국내를 내왕하였다.

 

또한 동년 5월에는 조용주(趙鏞周)·연병호(延秉昊) 등과 대한민국외교청년단을 조직하고 동지규합, 자금확보, 임시정부 지원 등의 목적을 수행하였으며, 그는 상해지부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그는 대동단(大同團)의 전 협(全協)과 연락하고 서울에 와서 의친왕 이 강공(義親王 李堈公)을 상해로 탈출시켜 임시정부에 참여시킬 계획을 추진하였다.

 

1919년 11월 그는 선발대로 정남용(鄭南用)과 같이 평양으로 출발하였는데 의친왕의 행방불명을 보고 받은 일경이 총동원되어 기차 등을 수색한 결과 안동에서 일행을 체포하였다. 이때 그도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1920년 6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병을 얻어 1922년 12월에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다. 그는 출옥 후에도 한용운(韓龍雲)을 쫓아 불교를 통한 자주독립정신의 고취에 전념하다가 1926년 6월에 낙원동(樂園洞)에서 다시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방면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된 그는 1931년 6월 다시 상해로 건너 가 연초공장을 경영하면서 크게 성장하여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광복 후 귀국하지 못하고 상해에 잔류하였다가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중공 땅에서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질문] 신규식(申圭植) 1879. 1. 13 ~ 1922.
[답변]

독립운동·대종교인. 한일합병 후 중국에서 교민들의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한편, 한국인과 중국인의 협력에 힘썼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 후에는 법무총장으로 국무총리대리·외무총장 등을 겸임하면서 임시정부내의 통합에 노력했다.

 

1901년부터 문동학교(文東學校)를 비롯해서 중동학교(中東學校)와 청동학교(淸東學校) 등에 관여하여 교육활동을 하는 한편,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등에 참가했다. 한일합병이 되자 1911년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기반을 구축했다. 1917년 피압박민족의 독립운동 분위기 속에서 박은식·조소앙 등과 국외 독립운동단체의 단결과 통일을 주장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작성해 각지로 보냈다. 상해 임정 수립 후 그해 9월에 법무총장에 임명되었으며, 1921년 5월부터 국무총리 대리와 외무총장직을 겸임했다.

 

1922년 태평양회의가 결말 없이 끝나고 국민대표회 운동이 전개되자 신규식 내각은 외교적인 실패 등의 이유로 총사퇴했다. 임시정부 내의 분열상태를 비관해 단식하다가 9월 25일 서거하였다. 상해 홍차오 로 만국공묘에 안장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신덕영(申德永/李伯漢/李平) 1890. 11. 25 ~ 1968. 5. 26
[답변]

서울사람이다. 1914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귀국후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다. 1920년 7월경 노형규(盧衡奎)·노석중(盧錫中) 등과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의하고 부한청년단(扶韓靑年團)을 조직하여 이에 필요한 자금 모집을 위해 지방 부호에게서 군자금을 갹출하고자 하였다.

 

그 수단으로서 동월 18일 서울에서 대동단 총재 김가진(金嘉鎭)의 명의로 포고문을 만들어 전라남도 광주 본촌면 일곡리(本村面日谷里) 노종료 등 광주의 부호들에게 각각 우송시켜 출금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광주에 내려가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92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받고,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던 중, 1923년 5월 병으로 가출옥하여 세브란스병원에서 가료 중 탈출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 1927년에는 최양옥(崔養玉)·안창남(安昌男)·김정련(金正連) 등과 함께 중국 산서성 태원부(山西省太原府)에서 공명단(共鳴團)을 조직하고 북만에서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비행학교 설립을 계획하였다.

 

이에 자금모집을 위하여 최양옥·김정련을 국내에 파견하였으나 양인이 체포됨에 따라 계획을 중지하게 되었으며, 그는 하얼빈(哈爾濱)에서 계속 지하활동을 벌이던 중 1932년 6월에 다시 체포되어 나머지 형기를 대전감옥에서 보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질문] 안교일(安敎一) 1888. 6. 1 ~ 1950. 6. 29
[답변]

서울 사람이다. 1919년 11월 서울에서 신봉균(申鳳均)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집 및 독립운동 선전을 목적으로 한 혈복단(血復團)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안교일은 동지들과 함께 충남 논산군 연산면(連山面) 연산리(連山里) 홍진유(洪鎭裕)의 집으로 가서 혈복단 규칙서 수십 매 등을 교부하고 지방 부호로부터 자금 모집을 권유하였다. 동년 11월 20일 안교일은 김일(金一) 지시로 ‘독립신문(獨立新聞)’ 호외(號外) 약 50매를 정희종(鄭喜鍾)에게 인쇄토록 하였다. 동월 25일에는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의 선언서 약 10매를 역시 정희종에게 인쇄토록 하였다. 이 문건들은 다시 김일에게 주었다. 그는 이후 이 문건들을 김일로부터 다시 받고, 동대문 부근에서 강정희(姜正熙)를 만나 정희종에게 동월 27일 만세시위가 있으니 26일 밤에 모두 배포하라고 알려주며 주었다. 또한 동월 26일 밤 김교선(金敎善)의 집에서 정희종에게 내일 자동차로 배포하라고 선언서 약 200매를 전달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된 안교일은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양정(楊楨) 1865. 11. 26 ~ ?
[답변]

평남 강서사람이다. 양정은 보부상을 했던 경력으로 1919년 제2회 한국독립선언서에 상공단의 대표자에 서명하고, 그것을 배포시킨 일에 간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민족대동단의 활동 근거지를 제공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국내의 독립운동 열기가 고조되어갔다. 이에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민족의 대동단결을 표방하며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고 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을 조직하였다. 대동단은 진신단(縉紳團)·유림단(儒林團)·군인단(軍人團)·부인단(婦人團)·상공단(商工團)·청년단(靑年團)·지방단(地方團), 기타 몇 개의 단으로 나누어 8월경부터 제2독립선언서 낭독을 위한 시위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양정은 1919년 8월경, 10년지기인 전협(全協)으로부터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의 설립 목적과 취지를 듣고 가입하여 상공단장(商工團長)이 되어, 보부상을 규합하여 인쇄물을 배포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 국내 활동이 어렵게 되자, 본부를 상해로 이전하기로 결심하고 10월 10일 총재 김가진의 상해 망명을 단행하였다. 이어 전협·김가진·정남용(鄭南用)·한기동(韓基東)·나창헌(羅昌憲) 등과 협의하여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의 상해 망명을 추진하는 등, 11월 27일 오후 5시를 기하여 광화문 앞 광장에서 제2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양정은 전국 각도에 36명의 보부상을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시킬 여비 1인당 100원, 즉 3,600원을 지출하였다. 그리고 전협으로부터 받은 540원을 주고 자기 아내의 명의로 구입한 예지동 집을 주고 근거지로 삼았다.

동지 권태석이 검거되자, 매우 낙담한 전협을 위로하며, “절대 걱정하지 마라. 무릇 중대한 일을 기획하는데 그런 정도의 장해는 흔히 있는 것이므로 굳이 비관할 필요없다. 결코 신고하지 말고 계속하여 독립운동을 해야한다”고 격려했다.

 

나창헌 등이 선언서 인쇄에 착수 중, 11월 19일경 체포되었다. 양정은 1920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출판법·보안법 위반 및 사기 등의 혐의로 공판에 회부되어 징역 2년(미결구류 200일 통산)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오세덕(吳世悳) 1897. 11. 19 ~ 1986. 10. 20
[답변]

서울 안암동(安岩洞:舊高陽郡崇仁面)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철원(鐵原)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동년 8월 강대여(姜大呂) 신원균 박건병 등과 철원 애국단(鐵原愛國團:일명 大韓獨立愛國團)을 조직하고 10월 3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정부 성립 축하회 선언서"를 배포하여 제2의 만세시위계획을 추진하였으며, 이어서 그는 애국단 대표로서 박건병과 함께 상해로 파견되었다.

 

그는 동년 11월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강원도 철원군 조사원에 임명되었다. 1922년에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주비위원회가 조직되는 등 독립운동 선상에 불화가 일어나자 그는 노령(露領)으로 가서 문창범 오창환과 같이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는데 협조하였다고 한다.

 

1923년 봉천(奉天)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된 후, 한성은행에서 근무하였으며, 이곳에서 근무하던 중 의열단(義烈團)에서 파견된 구여순(具汝淳)의 방문을 받고 군자금 모집에 협조할 것을 약속하고, 한성은행 각 지점에서 본점으로 연말 송금이 있음을 알고 이를 습격하여 탈취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구여순이 사전에 체포되어 이러한 사실이 탄로됨으로써 그도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결국 1923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이란 죄명으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유경근(劉景根) 1877. 10. 27 ~ 1956. 1. 16
[답변]

경기 강화(江華)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부내면(府內面)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주모자 색출시 서울로 피신하였다가 피체되었으나 일신상의 문제로 보석되었다.

 

그 후 노령(露領) 해삼위 신한촌(海蔘威新韓村)에서 이동휘(李東輝)로부터 독립군양성을 위해 국내지원자를 모집하라는 지령을 받아 김현구(金鉉九)와 함께 여러명의 청년을 모집하여 입대시켰다. 또한 임정의 연통제(聯通制) 조직 및 대동단(大同團)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만주광복군총영(滿洲光復軍總營)으로부터 미국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알려주기 위하여 일제기관 등의 파괴용 폭탄과 육혈포 등을 결사대장 김영철(金榮喆)이 가지고 와서 유경근의 집에 보관케한 사실이 일경에게 탐지되어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강화군(江華郡)에서 광명학교(光明學校)를 설립하고 청소년교육에 힘썼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질문] 윤용주(尹龍周) 1884. 1. 29 ~ 1949. 8. 18
[답변]

충남 아산(牙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 홍면희(洪冕熹)·이규갑(李奎甲) 등으로부터 독립운동단체를 망라한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수립을 목적하는 국민대회의 회원 되기를 권고받았다.

 

1919년 9월 서울에서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이 조직한 조선독립대동단(朝鮮獨立大同團)에 가입 지방단원 모집 담당이 되어, 임응철(林應喆)·김재구(金在九)·강경진(姜景鎭) 등에게 대동단(大同團)에 가입케 하고, 지방동지의 규합과 군자금 모집 등을 위해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政治犯處罰令)·출판법(出版法)·보안법(保安法)·사기(詐欺) 등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이 강(李 堈) 1877 ~ 1955
[답변]

조선 말기의 왕족.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평길(平吉). 호는 만오(晩悟). 의왕(義王)·의친왕(義親王) 또는 의화군(義和君)이라고도 불린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인 장씨(貴人 張氏)이다.

 

1891년(고종 28) 12월 의화군에 봉하여졌으며, 1893년 9월 김사준의 딸을 맞아 가례를 올렸다. 1895년 5월에 특파대사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8월에는 특파대사자격으로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1900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국대학교 특별과에 입학하였으며, 같은 해 8월에 의왕으로 봉하여졌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항일독립투사들과 접촉하여 1919년 대동단의 전협·최익환 등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하였으며,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도중 그해 11월 만주 안동에서 일본경찰에게 발각당하여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질문] 이건호(李建鎬/一海) 1885. 6. 5 ~ 1951. 9. 13
[답변]

충남 부여(扶餘) 사람이다. 그는 1919년 6월 전 협(全協)으로부터 대동단(大同團)의 결성 취지를 듣고 이에 찬동하여 동단에 가입·활동하였다. 대동단은 3·1운동 직후 한민족의 민족역량을 결집하여 민족적 대동단결과 실력양성을 표방하고 민족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담당할 것을 목적으로 전 협·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하여 결성된 비밀결사였다.

 

대동단은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여 황족·유림·종교인·상공인·노동자·청년·군인·보부상 등 전사회 각 계층의 인사들을 규합하려던 조직으로서, 주로 각종 인쇄물의 인쇄·배포 등을 통한 독립사상의 고취와 동단의 선전활동 및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대동단은 의친왕(義親王)을 상해로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세우고 제2의 독립만세시위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때 그는 전 협으로부터 대동단이 재정적 곤란에 처해 있다는 말을 듣고, 자금 확보를 위해 당시 전라도 금구(金溝)에 거주하던 자산가 장현식(張鉉軾)을 전 협에게 소개하여 재정적인 지원을 받게 하였으며, 이후 장현식과 하멕 서울·전남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여 3,000원의 군자금을 모집, 대동단에 전달하였다.

 

이후 동년 7월 인쇄기계·용지 등을 매입하여 자신의 집에 영동활판소(永同活版所)라는 비밀 인쇄소를 차리고 이곳에서 정남용(鄭南用) 등과 함께 동단의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를 제작·발행하였으며, 또한 '기관(機關)'·'방략(方略)' 등의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문서를 인쇄하여 권헌복(權憲復) 등과 함께 서울 일대에 배포하는 등 선전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을 펴던 중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탐지·피체되어 1921년 3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질문] 이내수(李來修) 1860. 8. 22 ~ 1933. 12. 23
[답변]

충남 논산(論山) 사람이다. 1906년 홍주(洪州)의 민종식(閔宗植) 의진(義陣)에 참가한 바 있는 그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한 후에도 계속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리다가 1916년 7월 연산(連山) 한양리(漢陽里)의 자신의 집에서 역시 홍주 의진 출신인 이용규(李容珪)·이만직(李晩稙)·윤병일(尹炳日) 등과 함께 거의(擧義)를 결심하고 각처의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배신자의 밀고로 사전 발각됨으로써 그는 1917년 4월에 피체된 뒤 전남 기자도(箕子島)로 1년간 유배형을 당하였다. 그 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이용규 등과 함께 국민대회(國民大會)를 추진하는 한편 곽종석(郭鍾錫)·김복한(金福漢) 등의 유림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독립을 청원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137인의 유림대표 중 1인으로 서명하였다.

 

또한 그는 3·1독립운동 직후 서울에서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결성한 대동단(大同團)의 유림단(儒林團) 대표로 추대되는 등 동단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대동단에서는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들 각층의 인사들을 대상으로 포섭활동을 펴갔다. 한편 대동단은 3·1독립운동처럼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3·1독립운동의 방식을 쫓아 33인의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는데, 이때 그는 민족대표 33인중의 1인으로 서명하기도 했다.

 

1919년 11월말 대동단 발각 이후 그는 일제의 포위망을 피해 1921년 5월경 논산을 거점으로 동지를 포섭한 뒤 2천여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上海)임시정부에 조달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활동 중 일경에 피체되어 1923년 8월 14일 공주지방법언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이범수(李範壽) 1893. 1. 4 ~ 1945. 9. 9
[답변]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남원읍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을 이용하여 이석기(李奭器)가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 800여명의 시위대와 함께 헌병주재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는 이성기(李成器)·이형기(李炯器)·김해근(金海根) 등과 함께 시위중 구속된 동지들의 석방을 위해 4월 4일 남원읍 장날을 이용하여 재차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선언문과 태극기 제작 등 사전 준비를 하였다.

 

그리하여 4월 4일 이범수·이성기 등은 남원 북시장(北市場)에 모여, 그곳에 운집한 천여명의 시위군중들을 주도,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문(南門)과 시장을 거쳐 헌병분견소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무차별 시위 탄압과 사격으로 인해 시위군중들은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때 그는 일본 헌병경찰의 검속을 피해 향리(鄕里)인 대신리(大新里)에 피신하였다.

 

이후 형갑수(邢甲洙)·한태현(韓泰鉉)·강경진(姜景鎭) 등과 비밀리 회합하여 독립을 위해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하고 활동하던 중 대동단원(大同團員) 김재구(金在九)의 권유를 받고, 1919년 음력 7월 중순경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다. 이때 이들은 각자의 사재를 털어 군자금으로 5백원을 마련하여 대동단에 헌금하였는데, 이범수는 2백원을 헌금하였다. 한편, 이들은 대동단 단장 전 협(全協)의 지시로 대동단 전라북도지부를 결성하였는데 그는 부지부장(副支部長)을 맡아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항일운동에 동조하는 지방의 유지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 대동단 본부에 계속하여 헌금하는 등 군자금 모금활동에 힘썼다. 그러던 중 일경에 이들의 활동상황이 탐지·피체되어 1922년 3월 14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질문] 이신애(李信愛/慈卿) 1891. 1. 20 ~ 1982. 9. 27
[답변]

평북 귀성(龜城) 사람이다. 그녀는 1913년 개성(開城)의 호수돈여학교(好壽敦女學校)를 졸업한 뒤 원산(元山)의 성경여학교(聖經女學校)를 거쳐 기독교 전도사가 되었고 3·1독립운동 때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참가했다. 1919년 9월 강우규(姜宇奎)가 조선 총독 재등실(齋藤實)을 처단하기 위해 서울에 왔을 때에는 한기동(韓基東)과 함께 강우규를 수차에 걸쳐 방문하여 거사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동년 10월 초순에는 한기동의 권유에 의해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고, 동단이 주도한 독립만세시위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등의 활동을 폈다.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1919년 3월 말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결성한 대동단은 동년 10월 초순경 동단의 본부를 상해(上海)로 이전할 계획 아래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 망명과 독립만세시위를 추진했다.

 

3·1독립운동과 같은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목적으로, 이들은 거사 내용과 방법도 3·1독립운동의 방식을 쫓아 진행시켰는데, 이때 이신애는 여성대표의 자격으로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로 서명하는 한편 박정선(朴貞善)·한일호(韓逸浩) 등 여성대표를 포섭했고 또 김상열(金商說)·김익하(金益夏) 등 다수의 인사를 동단에 가입시켰다.

 

그런데 거사를 준비하던 중 의친왕(義親王)의 상해 망명이 일경에 사전 탐지되어 동년 11월 11일 의친왕 일행이 만주 안동역(安東驛)에서 피체됨으로써 대동단의 조직은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의 포위망을 피한 그녀는 나머지 인사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강행·추진해갔다. 그리하여 동년 11월 28일 그녀를 비롯한 정규식(鄭奎植)·박정선·나창헌(羅昌憲) 등 열혈 인사들은 종로 안국동(安國洞) 광장에서 준비해 온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살포하면서 독립만세를 드높게 외쳤다.

 

만세시위 직후 현장에서 피체된 그녀는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녀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질문] 이을규(李乙奎) 1894. 2. 21 ~ 1973. 6. 11
[답변]

충남 논산(論山) 사람이다. 그는 3·1독립운동 직후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다.

 

당시 대동단은 독립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동지로 포섭하는 한편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폈다. 1919년 10월 대동단은 본부를 상해(上海)로 이전하기로 계획하고, 동년 10월 10일 동단의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1차로 망명시킨 뒤 의친왕(義親王)의 상해망명을 추진했다.

 

이러한 대동단의 계획을 위해 강태동(姜泰東)과 함께 상해에서 귀국한 그는 의친왕의 망명을 추진하는 한편 상해의 임시정부로부터 송달된 〈적의 관리(官吏)인 동포에게〉·〈남녀 학생에게〉등의 각종 선전물 3천 5백매를 배포하면서 적극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정남용(鄭南用)과 함께 의친왕을 상해까지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던 그는 준비가 완료됨에 따라 동년 11월 9일 서울을 출발했으나, 도중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을 받아 이들은 일행은 동년 11월 11일 만주 안동(安東)역에서 피검되었는데 이때 그는 일제의 포위망을 뚫고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20년 1월 재입국했다가 일경에 피체되고 말았다. 이로써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다시 상해로 건너가 무력투쟁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무지 제조 및 무장훈련에 힘을 쏟았다.

 

그 후 만주로 넘어간 그는 1929년 7월 김좌진(金佐鎭) 등이 주도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에 참여하면서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계열의 운동을 전개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질문] 이재호(李在浩/李範宰) 1878. 9. 7 ~ 1933. 9. 8
[답변]

서울 사람이다. 그는 대한제국기인 1900년경 궁내부(宮內府) 주사(主事)를 거쳐 시종(侍從)을 지낸 바 있는데,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에는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단원으로 활동했다. 대동단은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1919년 3월말 서울에서 결성한 독립운동단체였다.

 

그리하여 동단에서는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포함한 범국민적 조직을 목표로 삼아 조직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펴나갔다. 그런데 동년 5월의 1차 발각에 이어,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등의 배포로 인하여 동단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자 동년 10월초 전 협(全協) 등 동단의 주도인사들은 대동단 본부를 상해(上海)로 이전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10월 10일 제1단계로 동단의 총재 김가진(金嘉鎭)이 상해로 망명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다음에 의친왕(義親王)을 동단의 수령으로 추대한 뒤 상해 망명을 추진했는데, 이때 이재호는 일찍이 궁내부(宮內府)에 재직시 의친왕을 수행하여 일본에 갔던 경험도 있어, 의친왕의 국외망명계획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의친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던 정운복(鄭雲復)과 절친한 관계를 이용하여 쉽게 의친왕의 승낙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동년 11월 9일 정남용(鄭南用)·이을규(李乙奎) 등이 의친왕을 수행하고 서울을 출발했으나 도중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을 받아 의친왕 일행은 이틀 후인 11월 11일 만주 안동역(安東驛)에서 피체되고 말았다. 이로써 대동단 본부의 상해이전계획은 물론 대동단 조직의 대부분이 파괴당하였고, 그는 일경에 피체되어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이종욱(李鍾郁) 1884. 1. 13 ~ 1969. 11. 3
[답변]

강원도 평창(平昌) 사람이다.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월정사(月精寺)에서 승려로 있었다. 1919년 3·1독립만세 시위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4월 2일에는 인천 만국공원(仁川 萬國公園)에서 비밀리에 각 종교계 대표들과 독립지사들이 모여 국민대회를 열었는데 그는 이때 불교계의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이들은 이승만(李承晩)을 집정관으로 하는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를 수립하였다.

 

그는 동년 4월초 상해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대한적십자회 조직에 참여한 뒤 임시정부 국내특파원으로 서울에 파견되었다. 그는 안재홍(安在鴻)·송세호(宋世浩)·연병호(延秉昊) 등과 청년외교단을 조직하고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벌였으며, 이들의 건의서를 임정 국무총리 안창호(安昌浩)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

 

또한 동년 9월 서울에서 다시 특파된 그는 10월 10일에 대동단(大同團) 단장인 김가진을 서울 관수동(觀水洞) 박봉구(朴奉九)의 집에서 만나 김가진을 농민으로 가장시키고 김가진의 아들 의한(毅漢)과 함께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10월 30일 상해(上海)에 도착하였다. 김가진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 이 강(李堈)을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상해로 망명시키기 위한 임무를 띠고 선발대로 먼저 상해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의친왕의 탈출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1919년 12월 29일 그는 임시정부 내무부 참사(參事)에 임명되었으며, 1920년 3월 19일에는 임시의정원 강원도의원에 선출되었다. 이듬해 3월 26일에 그는 전국에 연통제(聯通制)를 조직 실시하기 위한 내무부 특파원에 임명되어 다시 국내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는 1920년 6월 29일 청년외교단 운동으로 대구지방 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그 뒤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하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으며, 출옥 후에는 오대산(五台山) 월정사(月精寺)에 은거하면서 송세호(宋世浩)와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지하에서 활동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이종춘(李種春) 1857 ~ ?
[답변]

1919년 11월 대동단이 주도한 제2차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이를 추진하였다. 3.1운동의 토양 위에서 조직된 대동단은 전민족의 대동단결을 표방하며 한국 독립을 주창하였다. 대동단은 비밀결사로서 <대동신보(大同新報)>를 발행, 배포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조직을 중국 상해(上海)로 옮기고,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의 상해 망명을 추진하였으나, 일제에 탐지되어 좌절되었다. 이후 대동단은 제2차 독립선언계획을 통해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3.1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일제의 야만성을 비판하고, 한국 독립을 주창하고자 했다. 이종춘은 제2차 독립선언서에 노인대표자(老人代表者)로 서명하고,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조선총독부에 당당히 요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경은 소위 보안법 등을 위반했다며 이들을 체포했다. 이종춘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임병대(林炳大) 1869. 5. 19 ~ 1936. 9. 8
[답변]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06년 임병찬(林炳瓚)의 동생으로 최익현(崔益鉉) 의병진에 가담하여 참모(參謀)로 활동하였다. 을사조약의 늑결과 더불어 면암(勉菴) 최익현이 의병 거의를 위해 태인(泰仁)에 도착한 것은 1906년 3월 24일이었다.

 

이때 임병대는 전 낙안군수(樂安郡守)인 형 임병찬과 함께 거의를 위해 태인에 집결하였고, 그밖에 100여 명의 유림 인사들이 모였다. 이들은 같은 해 4월 13일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열어 의병을 창의하였다. 이때 임병대는 최익현 의병진의 참모를 맡았다. 창의 후 이들은 태인읍을 점령하고, 각지의 군사들을 모아 의병 대열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14일 정읍으로 진군하고, 4월 16일에는 순창으로 진군하여 무장을 강화하니 의병은 600여 명에 달했다. 그런데 관군이 의병 해산을 종용하는 과정에서, 면암이 관군과의 싸움을 포기하게 되자 의병부대는 해산하고 말았다.

 

그 후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던 임병대는 3·1운동 후 1919년 서울에서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이 조직되고 정읍지방에 지부조직을 설치하며 조카 임응철(林應喆)이 정읍의 책임자로 활동하게 됨에 따라 동단에 가입하여, 동지 규합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그는 1920년 초 대동단이 발각될 때 일경에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임수명(林守明/林鏡/林作柱) 1897. 3. 7 ~ 1977. 6. 4
[답변]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조부 임병찬(林秉瓚)이 1913년 9월 서울에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결성,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던 중 피체되어 1914년 거문도(巨文道 : 전남 여주군 삼산면)로 유배(流配)되자 조부를 수행하여 1916년 임병찬이 객사순국(客死殉國)할 때 까지, 2년간에 걸쳐 봉양(奉養)하였다.

 

1919년 8월 전 협(全協)·이일영(李一榮)·윤용주(尹龍周) 등이 서울에서 비밀결사 조선독립대동단을 조직할 때 부친 임응철(林應喆)('90년, 애족장 추서)과 함께 입단하였다.

 

그는 동단에서 전라도 익산군(益山郡) 이사(理事)로 임명되어 동지규합(同志糾合)과 군자금모집을 담당, 임병대(林炳大)·김흥순(金興順)·이병호(李炳祜) 등에게 대동단 입단을 권유하여 가입케하고 김흥순으로부터 군자금으로 60원(圓)을, 이병호로부터 70원을 받아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부친 임응철(林應喆)을 통하여 대동단본부원 윤용주에게 납부케 하였으며, 김흥순을 전주군이사(全州郡理事)로 발령케 하는 등 활동하다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1920년 2월 2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검사의 공소(控訴)로 1920년 4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부분 취소되어 징역 1년에 3년간 집행유예를 받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임응철(林應喆) 1871. 3. 9 ~ 1931. 8. 28
[답변]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그는 한말 의병장 임병찬(林炳瓚)의 장남으로서 구한말에 홍문관(弘文館) 학사(學士)와 승정원(承政院) 비서승(秘書丞)을 역임하였고, 1913년 9월 임병찬이 주도하여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결성할 때 서울에 올라와 광무황제(高宗)의 밀조를 가져오는 등 의병 기의(起義)에 적극적인 활동을 폈다.

 

그 후 부친인 임병찬이 거문도(巨文島)에서 유배생활 중 1916년에 순국하자 망부(亡父)의 뜻을 계승하여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리던 중 1919년 9월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말에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대동단은 범국민적 조직을 목표로 활발한 조직활동을 벌였다.

 

동단 가입후 그는 먼저 그의 아들 임수명(林守明)과 숙부 임병대(林炳大)를 가입시켰고, 또 전주(全州)의 이병우(李炳祐), 남원(南原)의 강경진(姜景鎭)·형갑수(邢甲壽) 등을 포섭하면서 조직확대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동단의 전라북도 지단(支團)은 지단장에 임응철, 부단장에 이병우, 이사(理事)에 임수명 등이 선임되어 조직을 이끌었다.

 

이와 함께 그는 대동단 본부가 있는 서울을 수차 왕래하며 자금조달 등의 지원활동을 폈는데, 동년 11월 대동단에서 본부의 상행(上海) 이전계획과 함께 추진한 의친왕(義親王)의 상해 망명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대부분의 대동단 인사들이 피체되었고, 그도 이에 연루되어 피체되었다.

 

처음엔 증거불충분으로 일단 풀려 나왔으나 그후 그의 활동이 밝혀지면서 다시 피체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질문] 장현식(張鉉植/張鉉軾) 1896. 9. 17 ~ 납북
[답변]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항일구국의 인재를 육성할 목적으로 현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인 사립 중앙고등보통학교(私立中央高等普通學校)를 설립하고 교주(校主)가 되어 지도자 양성에 헌신하였다.

 

1919년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이 창단되자 대동단의 운영자금을 제공하고 〈대동신문(大同新聞)〉 발간의 재정운영을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1939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에는 민족어 보존을 염원하여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지원하는 자금으로 3천원을 제공하였으며 1940년 11월경까지 지인(知人) 등에게도 권유하여 1400원을 제공하게 하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되었으나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무죄로 확정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9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질문] 전대진(全大鎭) 1895. 6. 15 ~ 1963. 5. 8
[답변]

1919년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가입하여 제2회 독립만세 시위계획에 참가하였다. 3·1운동직후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결성한 조선민족대동단은 조선 독립을 위하여 먼저 민족 대단결을 목표로 민족사회의 각계 각층의 인사들을 망라한 조직을 구상해 갔다.

 

조선민족대동단에서는 일제의 포위망이 압박되는 상황에서 근거지를 상해로 옮길 것을 계획하고,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 망명을 도모하는 한편 1919년 11월 27일을 기해 3·1운동 때와 같은 만세시위를 일으키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민족대동단에서는 선언서와 만세시위에 필요한 격문을 인쇄하였는데, 전대진은 나창헌(羅昌憲)·안교일(安敎一)·정희종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사용할 격문의 배포를 맡아, 거사 전날인 11월 26일에 종로 일대의 민가에 선언서를 배포하였다.

 

 그러나 거사 당일 만세시위를 위해 계획된 시위장소로 갔으나, 약속에 차질이 생겨 예정대로 만세시위를 벌이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친왕 상해 망명의 서전 발각과 더불어 그도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처벌령·출판법·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8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질문] 전협(全協/全國煥/國煥/金東雲/韓錫東) 1876. 6 ~ 1927. 7. 11
[답변]

서울 사람이다. 1896년 농상공부(農商工部) 주사(主事)로 관계(官界)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1904년 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에 가입하여, 이후 동회의 평의원(評議員)·총무원(總務員)과 전북지부회장(全北支部會長) 등으로 활동했고 이를 바탕으로 1907년부터 1909년까지 부평군수(富平郡守)를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무렵 망국(亡國)분위기가 짙어지는 가운데 과거 자신의 반민족적 행동을 반성한 그는 1909년에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세계 정세가 변화되면서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자 그는 정세파악을 위해 상해(上海)와 미주(美洲) 등지를 돌아보기로 결심하고 1918년 가을에 일단 국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동년 12월 제1차 목적지인 상해(上海)로 출발했다. 그런데 상해 체재 중 독립의 기회가 목전에 도래함을 감지하고 미주행(美洲行)을 단념한 채 1919년 2월 귀국했으며 곧 3·1운동이 일어나자 동년 3월말 최익환(崔益煥)등과 함께 대동단(大同團)을 결성했다.

 

이들은 3·1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3·1독립운동의 경과를 통해 독립달성을 위해서는 '조선 민족의 정신 통일과 실력 양성'이 급선무라는데 뜻을 모았고 이를 위한 실천방안으로 대동단을 결성했던 것이다. 이들은 당시 사회 각층을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를 근간으로 전국적 조직을 계획하였는데, 전 협은 동단의 조직과 재정을 총괄하며 동단을 주도했다.

 

그런데 동년 5월 23일 동단의 선전활동을 주관하던 최익환(崔益煥) 등이 일경에 피체됨으로써, 조직의 일부가 발각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 협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조직을 강화해 가는 한편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를 발행하면서 계속 활동을 펴나갔다.

 

그러던 중 일제의 포위망이 압축됨에 따라 전 협 등은 동단의 본부를 상해(上海)로 이전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그 제1단계로 먼저 동단의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동년 10월 10일 상해로 망명케 했다. 그리고 의친왕(義親王)을 동단의 수령으로 추대하여 상해 망명을 추진하는 것과 함께 국내에서의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추진했다.

 

그리하여 동년 11월 9일 의친왕(義親王)의 상해 망명을 실행에 옮겼는데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을 받아 만주 안동(安東)까지 넘어갔던 의친왕의 일행이 동년 11월 11일 만주 안동역에서 피체되고 말았다. 이로써 대동단의 계획은 성사 직전에 무산되었고, 전 협은 동년 11월 19일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인하여 1927년 7월 11일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정남용(鄭南用/鄭必成/洪宇植) 1896 ~ 1921. 4. 18
[답변]

고성(高城)의 건봉사(乾鳳寺) 승려 출신인 그는 1914년 이후 서울로 올라와 휘문의숙(徽文義塾)과 중앙불교포교당(中央佛敎布敎堂)에서 수업을 쌓았다.

 

3·1독립운동 직후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조직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 활동했다. 대동단은 독립달성을 위해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로서,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단원으로 포섭하여 전국적인 조직을 계획하고 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1919년 5월 동단의 최익환이 피체된 이후 그 후임으로 선전활동을 주관하면서 동단 발행의 〈선언서(宣言書)〉와 〈임시규칙(臨時規則)〉 등 각종 문서의 인쇄 및 배포의 책임을 맡았다. 당시 대동단은 사회 각층 중 진신(縉紳)·유림(儒林)·상공(商工)·청년(靑年) 등 4개 단(團)을 중심으로 단원 포섭에 나섰는데, 그 가운데 청년단의 조직을 정남용이 주관했다.

 

그리하여 송세호(宋世浩)·나창헌(羅昌憲) 등을 가입시키는 등 조직확대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한편, 대동단은 앞서 최익환 등의 피체로 조직의 일부가 노출되었고, 또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 등의 발행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것과 함께 동단에 대한 일경의 포위망도 그만큼 압축되어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전 협·정남용 등 동단의 주도인사들은 대동단 본부를 상해(上海)로 이전할 것을 계획하였고, 그 제1단계로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동년 10월 10일에 먼저 상해로 망명케했다. 이어 의친왕(義親王)을 동단의 수령으로 추대하고 상해 망명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동년 11월 9일 정남용은 이을규(李乙奎)와 함께 의친왕을 수행하여 서울을 출발해서 만주 안동(安東)까지 갔으나,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을 받아 11월 11일 만주 안동역에서 피체되었다.

 

이로 인하여 대동단 본부의 상해 이전 계획이 무산됨은 물론, 동단의 조직도 파괴당하고 말았다. 이 일로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잔악한 고문의 여독으로 1921년 4월 18일 옥중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질문] 정두화(鄭斗和) 생몰 확인 안됨
[답변]

1919년 당시 호서은행 취체역이었던 그는 대동단 재정부장으로 대동단 활동자금의 대부분을 출연하였다. 1919년 11월부터 약 6개월간 투옥되었으나 증거불충분이란 이유로 불기소 처분되어 출옥하였다.

[질문] 정설교(鄭卨敎) 생몰 확인 안됨
[답변]

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그는 보성고보(普成高普) 3년 재학중 1919년 4월 김상옥(金相玉)이 주도가 되어 결성된 혁신단(革新團)에 가입하였다. 이 혁신단은 독립사상을 고취·선전하는 홍보(弘報)활동을 하기 위한 지하단체로서, 그 이외에도 이춘식(李春植)·윤익중(尹益重)·전우진(全宇鎭) 등 8명이 단원으로 있었다.

 

혁신단에서는 조직의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혁신공보(革新公報)〉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였는데, 그도 이에 적극 활동하였다. 그러나 〈혁신공보〉의 발행은 재정의 궁핍과 인쇄책임을 맡던 동지 서대순(徐大順)이 일경에 피체되면서 인쇄시설 또한 압수당하여 9월까지만 발행되었다.

 

1920년 그는 단원들과 협의를 거쳐 본격적인 요인암살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에의 방향을 잡고 암살단(暗殺團)의 구성에 적극 협력하였다. 그리하여 1923년 그는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의거와 삼판동(三坂洞) 사건에 연루·피체되어 1923년 10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질문] 정희종(鄭喜鐘) 1871 ~ ?
[답변]
정희종은 흥인배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19년 11월 20일경 서울 창신동에서 대동단(大同團, 朝鮮民族大同團) 단원 나창헌(羅昌憲)의 부탁을 받아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배포하였다. 대동단은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민족의 대동단결을 표방하며 조직하였다. 대동단은 진신단(縉紳團)·유림단(儒林團)·군인단(軍人團)·부인단(婦人團)·상공단(商工團)·청년단(靑年團)·지방단(地方團) 등으로 조직을 키우고, 11월 27일 오후 5시를 기하여 광화문 앞 광장에서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정희종은 1919년 11월 25일경에 나창헌의 의뢰를 받은 강정희(姜正熙)로부터 독립선언서 약 50장과 상해에서 보내온 여러 종의 선언서 약 50장을 받았다. 다음날 밤, 그것을 가지고 교회에서 알게 된 전대진(全大振)을 찾아가 27일의 시위운동 사실을 알리고 배포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된 정희종은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정치범죄처벌령), 출판법, 보안법 위반 및 사기로 징역 1년 6월(미결구류 200일 통산)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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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유공자 공훈록』과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의 자료를 근거로 기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