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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터뷰│ ‘상하이 일기’ 저자 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신탁통치는 미국이 제안했다 -내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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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대…

등록일 12-12-21 15:46 조회 20,301
루스벨트 대통령이 얄타회담서 제안 … 비밀문서 공개돼 알려져
하지 중장이 '미국은 즉시독립, 소련이 신탁통치 주장했다' 왜곡

해방직후 극심한 국론분열의 원인이 됐던 신탁통치안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관되게 주장해 관철시켰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주장해 관철시킨 신탁통치안에 대해, 당시 맥아더 장군과 하지 중장이 반대해 이를 무력화 시켰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는 김자동(85) 선생은 '상하이 일기-임정의 품안에서'란 자서전에서 이같은 사실을 자세히 기록했다.

김자동 선생은 1928년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인근에서 태어나 임정의 품안에서 자란 임정의 산 증인이다. 조선일보와 민족일보 등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신탁통치를 둘러싼 역사적 진실을 추적하기도 했다. 김 선생을 만나 이에 대해 들어봤다.

■신탁통치는 미국에서 제안했다고 하는데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1943년 11월27일 발표된 카이로선언은 한국의 독립을 처음으로 국제적으로 보장한 회의였다. 하지만 전제가 있었다. '적절한 절차에 따라(in due course)'란 조건이 있었다. 이는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안에 따라 포함된 단어다.

■카이로선언문 초안은 다르게 돼있다던데

미국 영국 중국이 참여한 카이로회담에서는 한국 문제가 주요의제도 아니었고, 논의 시간도 길지 않았다. 그러나 선언문에 담을 한국독립의 시기를 두고 초안을 몇 번 고쳤다. 최초 미국 초안은 '가능한 한 가장 이른 시일(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로 돼 있었다. 다음날 루스벨트는 이것을 '적당한 시기(at the proper moment)'로 고쳐서 제출했다. 이것을 영국이 '적당한 절차에 따라'로 바꾼 것이다.

■루스벨트가 '적당한 시기'란 주장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피식민국가들은 신탁통치를 거쳐 독립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카이로회담에 앞서 그는 미국이 필리핀에 독립을 약속하고 40년 이상 후견했는데도 아직 독립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는데, 40년 가까이 일본 지배를 받고 있는 한국이야 당연히 후견기간을 거쳐야 된다는 주장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루스벨트는 한국이 필리핀과 다를 뿐 아니라, 2천년 이상 지속된 국가라는 사실을 잊었던지 몰랐던 것이다.

■카이로선언에 대해 임시정부는 어떤 입장이었나.

임시정부 어른들은 선언문의 내용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지만 즉시 해줄 수는 없다는 저의를 즉시 간파했다. 당시 충칭에서는 한인들이 여기에 대한 항의집회도 열었고, 임정 간행물에도 이에 반박하는 글을 실었다.

■얄타회담에서 신탁통치 문제가 최초로 논의됐다고 하는데

1945년 2월초 미국 루스벨트, 영국 처칠, 소련 스탈린이 모인 얄타회담에서 신탁통치안이 처음으로 논의됐다.

이 때 루스벨트는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주장했다. 소련은 즉시 독립시켜야 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3개 혹은 4개국에 의해 적어도 50년의 후견기간을 거쳐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때 스탈린은 루스벨트 주장을 반대하는 대신 신탁통치는 아주 짧게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는 회담 말미에 적어도 5년 이상의 신탁통치는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스탈린은 그것보다 짧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서로 의견교환을 끝냈다.

■당시 이같은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대외적으로 공포되지 않은 의제가 소련의 대일본전쟁 참여문제였다. 소련은 일본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대일전과 극동문제에 관한 대화는 비밀에 붙여졌다. 특히 조선문제는 의견교환에 그쳤을 뿐 정식 합의된 바 없었다. 그래서 공개되지 않았다.

■얄타회담 대화 내용은 어떻게 알게 됐나.

1956년 뉴욕타임스가 얄타회담 전문을 입수해 보도하려하자 미 국무성이 전문을 공개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때 64개면 특집으로 전문을 공개했다. 그때 나는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던 중 미 대사관에서 뉴욕타임스를 구해 이같은 내용을 알게 됐다. 1945년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에서 정식으로 채택된 조선의 신탁통치 결정은 사실상 얄타에서 잉태된 것이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무엇인가.

1945년 12월27일 미영소 3국 외상은 모스크바에서 한국문제에 대한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한반도를 미영소중 4개국의 신탁통치 지역으로 삼고, 4개국 관리하에 임시정부를 세워 점차적으로 권력을 이양시키며, 최장 5년 안에 완전독립을 시킨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얄타에 이어 한국의 즉시독립을 주장했고, 미국은 5년 이상신탁통치를 주장하다가 최대 5년으로 합의한 것이다. 미 국무성에서는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됐다고 만족해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정반대로 알려졌다.

당시 일부 언론들은 미국이 조선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으나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식으로 사실과 정반대되는 허위보도를 했다. 이 보도로 우리 국민 대부분은 내용도 제대로 모르면서 우선 반대하는 쪽으로 몰렸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그런 잘못된 보도가 나오게 됐나.

브루스 커밍스가 쓰고 내가 번역한 '한국전쟁의 기원'이란 책을 보면 다 나온다.

당시 극동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미국이 주도한 신탁통치안에 대해 이를 파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련과는 어떠한 타협도 안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당시 미군정청 사령관이었던 하지 중장도 맥아더와 같은 생각이었다. 미군정이 언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던 상황이라, 국내 언론의 왜곡보도를 못 본 척 했다. 자신들의 앞잡이인 존스턴 기자를 통해 허위보도가 나가도록 조장해 여론을 교묘하게 조작했다.

■맥아더와 하지가 미 정부의 입장과 반대로 행동했다는 것인가.

그렇다. 당시 루스벨트와 미 국무성은 자신들이 주도한 신탁통치를 관철하려는 입장이다. 하지만 루스벨트가 1945년 4월 사망한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그때까지도 국무성은 루스벨트의 입장을 따르려 했지만, 맥아더와 하지는 반공 반소 노선을 강화했다.

결국 신탁통치안은 무력화되고 미국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걷게 됐다.


김자동 선생은
1928년 중국 상하이시 출생
1949년 보성중학교(6년제) 졸업
1949년 서울대 법대 입학
1950~1954년 주한미군 통역관
1954~1958년 조선일보사 기자
1961년 민족일보 기자
2004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초대회장, 현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