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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윤종석(尹鍾奭) 1896. 3. 4. ~ 1927. 11.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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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0월 경성부(京城府)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제(聯通制) 본부를 직하기 위해 활동하고, 동년 11월의 대동단(大同團)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치렀다.
1919년 10월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聯合醫學專門學校) 2년생으로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 이종욱(李鍾郁)의 임시 거처인 경성부 연건동(蓮建洞)의 숙소에서 이종욱·나창헌(羅昌憲)·송세호(宋世浩)·전필순(全弼淳) 등과 수 차례 만났다.
이 회합에서 독립운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조선 내의 각종 비밀단체와 연락하며, 또한 경성에 본부, 지방에 지부를 설치하여 상해에서 송치되는 각종 문서의 접수와 배포의 임무를 담당하고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연통제를 시행할 것을 협의하고 서약하였다.
이에 전필순은 본부에서 회계 사무를 담당하고, 윤종석은 송세호·나창헌 등과 함께 각도 감찰부(監察部)의 임무를 관장하기로 하였다. 이어 윤종석은 이종욱으로부터 상해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내방하는 동지를 접대하고 문서를 접수할 장소의 설치와 기관 선정을 부탁 받자, 동월 경성부 화천정(和泉町) 5번지 민강(閔?)의 집에 들어가 동 취지를 밝히고 상해 방면에서의 내방자가 암호를 사용하여 오면 동지로 인정하고 이를 윤종석에게 통보할 것, 기밀문서는 자기의 영업장소인 경성부 남대문통 5정목 7번지 공성운송점 사무실 남창우(南昌祐)의 집 박춘식(朴春植) 앞으로 보낸 뒤 통보할 것을 약속받았다.
동월 30일 안동현(安東縣) 방면에서 박만식(朴萬植)이 와서 암호를 사용하자 민강은 이를 윤종석에게 통보하였다.
1919년 3월 말경 최익환(崔益煥)·전협(全協) 등이 경성부 봉익동(鳳翼洞) 전협의 집에서 "조선을 일제의 통치하에서 벗어나게 하여 독립국을 만들 것", "세계는 영원한 평화를 확보할 것", "사회주의를 철저히 실행할 것" 등의 3대 강령을 제창하고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을 조직하여, 단원과 자금을 모집하고 각종 선언서·기관방략(機關方略)·포고문 등을 등사하여 전국에 배포하면서 독립운동을 선전하였다. 이후 1919년 11월 대동단(단장 전협)이 주동이 되어 고종의 아들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상해로 망명시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도자로 추대하려다가 요녕성(遼寧省) 안동현에서 일본 경찰에게 간부 전원이 체포되었는데, 윤종석도 체포되었다.
1919년 12월 8일 구류되어 1921년 5월 7일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소위 1919년 제령(制令) 제7호(政治에 관한 犯罪處罰의 件)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미결 200일 통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2년 2월 9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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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이건호(李建鎬/一海) 1885. 6. 5 ~ 1951. 9.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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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扶餘) 사람이다. 그는 1919년 6월 전 협(全協)으로부터 대동단(大同團)의 결성 취지를 듣고 이에 찬동하여 동단에 가입·활동하였다. 대동단은 3·1운동 직후 한민족의 민족역량을 결집하여 민족적 대동단결과 실력양성을 표방하고 민족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담당할 것을 목적으로 전 협·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하여 결성된 비밀결사였다.
대동단은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여 황족·유림·종교인·상공인·노동자·청년·군인·보부상 등 전사회 각 계층의 인사들을 규합하려던 조직으로서, 주로 각종 인쇄물의 인쇄·배포 등을 통한 독립사상의 고취와 동단의 선전활동 및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대동단은 의친왕(義親王)을 상해로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세우고 제2의 독립만세시위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때 그는 전 협으로부터 대동단이 재정적 곤란에 처해 있다는 말을 듣고, 자금 확보를 위해 당시 전라도 금구(金溝)에 거주하던 자산가 장현식(張鉉軾)을 전 협에게 소개하여 재정적인 지원을 받게 하였으며, 이후 장현식과 하멕 서울·전남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여 3,000원의 군자금을 모집, 대동단에 전달하였다.
이후 동년 7월 인쇄기계·용지 등을 매입하여 자신의 집에 영동활판소(永同活版所)라는 비밀 인쇄소를 차리고 이곳에서 정남용(鄭南用) 등과 함께 동단의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를 제작·발행하였으며, 또한 '기관(機關)'·'방략(方略)' 등의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문서를 인쇄하여 권헌복(權憲復) 등과 함께 서울 일대에 배포하는 등 선전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을 펴던 중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탐지·피체되어 1921년 3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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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이규병(李奎炳) 1845. 3. 14. ~ 1920. 4.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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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명천(明川) 사람이다. 북간도(北間島) 지역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서 활약하였다.
1913년에 중국 길림성(吉林省) 연길현(延吉縣) 용정(龍井)에서 봉명학교(鳳鳴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19년에는 구춘선(具春先) 등이 중심이 되어 북간도 지역에 조직된 대한국민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대한국민회는 3·1운동 이후 북간도지역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단체 중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로서 평가되고 있다. 대한국민회는 이념적으로는 공화주의(共和主義)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대한국민회의 성격이 자치기구이지만 무장활동을 통하여 일제를 물리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금의 모집, 독립군의 양성 등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무장활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규병은 이같은 대한국민회 중부지방회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1919년 10월에는 대동단(大同團) 간도중부회 회장으로서 김승국(金承國)·최준명(崔濬明)·허운서(許雲瑞)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0년 4월에는 연변한인대표로서 구춘선·강구우·양도헌·마용하·한대진·박우창·김일제·김윤덕 등과 함께 중국 각계 인사들에게 경고하는 내용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는 대한국민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다 1920년 4월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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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이근옥(李根玉) 1884. 2. 16. ~ 1959. 12.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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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양양(襄陽) 사람이다. 그는 3·1독립운동 때 향리인 양양군 토성면 윤봉리에서 만세시위를 고무하는 격문 '충고동포(忠告同胞)'를 지어 각 마을의 게시판에 붙이는 등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앞장섰다.
동년 10월초 김형석(金亨錫)의 권유에 의해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양양군단(襄陽郡團)에 가입하였으며, 가입 직후 김연수(金延洙)·문명섭(文明燮)·이석규(李錫圭) 등을 단원으로 포섭하였다.
1919년 5월 서울에서 신현구(申鉉九) 등이 주도·결성한 대한독립애국단은 임시정부 지원단체로서 본부를 서울에 두고 강원도·충청도·전라도 등지에 도단(道團)을 설치하고, 다시 그 아래 군단(郡團)을 두었는데 양양군단은 강원도단 속칭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 의 산하조직이었다.
동단의 활동은 주로 임시정부의 선전활동과 재정자금의 조달, 그리고 국내 조직망을 통한 임시정부 연통부(聯通府)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동년 10월 하순에 그는 앞서의 동지 김연수·이석규·문명섭 등과 함께 상해(上海)로 넘어가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할 것을 결의하고 서울에 올라왔다. 이때 이들은 서울의 대한독립애국단 본부를 경유하여 상해로 갈 계획이었으나, 당시 신현구(申鉉九) 등 본부 단원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다니던 상황이었으므로 연락이 두절된 채 다른 동지들은 귀향하고 그만 혼자 서울에 체류하였다.
서울 체재중 그는 대동단(大同團)이 주도·작성한 〈독립선언서〉와 그외 선전물을 박화진(朴華鎭)으로부터 전달받고, 이를 지참하고 내려와 강원도 고성(高城)의 건봉사(乾鳳寺) 등지를 다니며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그런데 1920년 1월 강원도단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혀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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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50) 이내수(李來修) 1860. 8. 22 ~ 1933. 12.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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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論山) 사람이다. 1906년 홍주(洪州)의 민종식(閔宗植) 의진(義陣)에 참가한 바 있는 그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한 후에도 계속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리다가 1916년 7월 연산(連山) 한양리(漢陽里)의 자신의 집에서 역시 홍주 의진 출신인 이용규(李容珪)·이만직(李晩稙)·윤병일(尹炳日) 등과 함께 거의(擧義)를 결심하고 각처의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배신자의 밀고로 사전 발각됨으로써 그는 1917년 4월에 피체된 뒤 전남 기자도(箕子島)로 1년간 유배형을 당하였다. 그 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이용규 등과 함께 국민대회(國民大會)를 추진하는 한편 곽종석(郭鍾錫)·김복한(金福漢) 등의 유림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독립을 청원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137인의 유림대표 중 1인으로 서명하였다.
또한 그는 3·1독립운동 직후 서울에서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결성한 대동단(大同團)의 유림단(儒林團) 대표로 추대되는 등 동단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대동단에서는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들 각층의 인사들을 대상으로 포섭활동을 펴갔다. 한편 대동단은 3·1독립운동처럼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3·1독립운동의 방식을 쫓아 33인의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는데, 이때 그는 민족대표 33인중의 1인으로 서명하기도 했다.
1919년 11월말 대동단 발각 이후 그는 일제의 포위망을 피해 1921년 5월경 논산을 거점으로 동지를 포섭한 뒤 2천여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上海)임시정부에 조달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활동 중 일경에 피체되어 1923년 8월 14일 공주지방법언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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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51) 이범수(李範壽) 1893. 1. 4 ~ 1945. 9.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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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남원읍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을 이용하여 이석기(李奭器)가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 800여명의 시위대와 함께 헌병주재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는 이성기(李成器)·이형기(李炯器)·김해근(金海根) 등과 함께 시위중 구속된 동지들의 석방을 위해 4월 4일 남원읍 장날을 이용하여 재차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선언문과 태극기 제작 등 사전 준비를 하였다.
그리하여 4월 4일 이범수·이성기 등은 남원 북시장(北市場)에 모여, 그곳에 운집한 천여명의 시위군중들을 주도,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문(南門)과 시장을 거쳐 헌병분견소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무차별 시위 탄압과 사격으로 인해 시위군중들은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때 그는 일본 헌병경찰의 검속을 피해 향리(鄕里)인 대신리(大新里)에 피신하였다.
이후 형갑수(邢甲洙)·한태현(韓泰鉉)·강경진(姜景鎭) 등과 비밀리 회합하여 독립을 위해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하고 활동하던 중 대동단원(大同團員) 김재구(金在九)의 권유를 받고, 1919년 음력 7월 중순경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다. 이때 이들은 각자의 사재를 털어 군자금으로 5백원을 마련하여 대동단에 헌금하였는데, 이범수는 2백원을 헌금하였다. 한편, 이들은 대동단 단장 전 협(全協)의 지시로 대동단 전라북도지부를 결성하였는데 그는 부지부장(副支部長)을 맡아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항일운동에 동조하는 지방의 유지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 대동단 본부에 계속하여 헌금하는 등 군자금 모금활동에 힘썼다. 그러던 중 일경에 이들의 활동상황이 탐지·피체되어 1922년 3월 14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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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52) 이신애(李信愛/慈卿) 1891. 1. 20 ~ 1982. 9.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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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귀성(龜城) 사람이다. 그녀는 1913년 개성(開城)의 호수돈여학교(好壽敦女學校)를 졸업한 뒤 원산(元山)의 성경여학교(聖經女學校)를 거쳐 기독교 전도사가 되었고 3·1독립운동 때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참가했다. 1919년 9월 강우규(姜宇奎)가 조선 총독 재등실(齋藤實)을 처단하기 위해 서울에 왔을 때에는 한기동(韓基東)과 함께 강우규를 수차에 걸쳐 방문하여 거사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동년 10월 초순에는 한기동의 권유에 의해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고, 동단이 주도한 독립만세시위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등의 활동을 폈다.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1919년 3월 말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결성한 대동단은 동년 10월 초순경 동단의 본부를 상해(上海)로 이전할 계획 아래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 망명과 독립만세시위를 추진했다.
3·1독립운동과 같은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목적으로, 이들은 거사 내용과 방법도 3·1독립운동의 방식을 쫓아 진행시켰는데, 이때 이신애는 여성대표의 자격으로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로 서명하는 한편 박정선(朴貞善)·한일호(韓逸浩) 등 여성대표를 포섭했고 또 김상열(金商說)·김익하(金益夏) 등 다수의 인사를 동단에 가입시켰다.
그런데 거사를 준비하던 중 의친왕(義親王)의 상해 망명이 일경에 사전 탐지되어 동년 11월 11일 의친왕 일행이 만주 안동역(安東驛)에서 피체됨으로써 대동단의 조직은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의 포위망을 피한 그녀는 나머지 인사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강행·추진해갔다. 그리하여 동년 11월 28일 그녀를 비롯한 정규식(鄭奎植)·박정선·나창헌(羅昌憲) 등 열혈 인사들은 종로 안국동(安國洞) 광장에서 준비해 온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살포하면서 독립만세를 드높게 외쳤다.
만세시위 직후 현장에서 피체된 그녀는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녀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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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53) 이을규(李乙奎) 1894. 2. 21 ~ 1973. 6. 11 |
| [답변] |
충남 논산(論山) 사람이다. 그는 3·1독립운동 직후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다.
당시 대동단은 독립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동지로 포섭하는 한편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폈다. 1919년 10월 대동단은 본부를 상해(上海)로 이전하기로 계획하고, 동년 10월 10일 동단의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1차로 망명시킨 뒤 의친왕(義親王)의 상해망명을 추진했다.
이러한 대동단의 계획을 위해 강태동(姜泰東)과 함께 상해에서 귀국한 그는 의친왕의 망명을 추진하는 한편 상해의 임시정부로부터 송달된 〈적의 관리(官吏)인 동포에게〉·〈남녀 학생에게〉등의 각종 선전물 3천 5백매를 배포하면서 적극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정남용(鄭南用)과 함께 의친왕을 상해까지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던 그는 준비가 완료됨에 따라 동년 11월 9일 서울을 출발했으나, 도중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을 받아 이들은 일행은 동년 11월 11일 만주 안동(安東)역에서 피검되었는데 이때 그는 일제의 포위망을 뚫고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20년 1월 재입국했다가 일경에 피체되고 말았다. 이로써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다시 상해로 건너가 무력투쟁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무지 제조 및 무장훈련에 힘을 쏟았다.
그 후 만주로 넘어간 그는 1929년 7월 김좌진(金佐鎭) 등이 주도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에 참여하면서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계열의 운동을 전개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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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54) 이일영(李一榮) 1865. ~ 1925. 1. 15. |
| [답변] |
1913년 서울에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 참여하고, 1919년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단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독립의군부는 항일의병투쟁을 계승한 독립군 단체로서 중앙에는 중앙순무총장(中央巡撫總將), 각 도에는 도순무총장(道巡撫總將), 각 군에는 군수(郡守), 면에는 향장(鄕長)을 두었다.
이일영은 1912년 12월부터 1913년 1월 사이에 윤상보(尹尙普)ㆍ전용규(田鎔圭) 등으로부터 독립의군부 가입을 권유받고 2월경에 가입하였다. 2월 23일 전용규 등과 함께 독립의군부정헌(獨立義軍府正憲)을 제정하고 회계총감(會計總監)을 맡아, 독립운동자금 400원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월 조선민족대동단이 결성되자 같은 지역 출신인 윤주룡(尹龍周) 등과 가입하여, 단원으로서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약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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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55) 이재연(李在淵) 1866. 9. 24. ~ 1944. 6. 18. |
| [답변] |
이재연은 1919년 음 3월 중 인천에서 대동단원 나창헌(羅昌憲)의 권유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원이 되어 대동단 총재 김가진(金嘉鎭)의 서장(書狀)과 신임장 1통을 받아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4월 하순, 동지 조성민(趙成珉) 방에서 나창헌이 박제웅(朴齊雄)에게 맡긴 군자금모집증 23통, 신임장 3통을 받고, 5월 5일 박제웅과 함께 서울로 가 활동할 여비 30원을 받았다. 이어 전북 익산·임실·전주·남원 지방에서 군자금 및 동지 확보에 나섰고, 전남 곡성군 곡성면 조명식(趙明植) 방에서 노치현(盧治鉉)에게 대동단원이 될 것을 권유하였다. 6월경, 구례에서 군자금 모집 중 구례경찰서 경찰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이재연은 1921년 7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4년 4월 27일 출소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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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56) 이재호(李在浩/李範宰) 1878. 9. 7. ~ 1933. 9. 8. |
| [답변] |
서울 사람이다. 그는 대한제국기인 1900년경 궁내부(宮內府) 주사(主事)를 거쳐 시종(侍從)을 지낸 바 있는데,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에는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단원으로 활동했다. 대동단은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1919년 3월말 서울에서 결성한 독립운동단체였다.
그리하여 동단에서는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포함한 범국민적 조직을 목표로 삼아 조직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펴나갔다. 그런데 동년 5월의 1차 발각에 이어,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등의 배포로 인하여 동단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자 동년 10월초 전 협(全協) 등 동단의 주도인사들은 대동단 본부를 상해(上海)로 이전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10월 10일 제1단계로 동단의 총재 김가진(金嘉鎭)이 상해로 망명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다음에 의친왕(義親王)을 동단의 수령으로 추대한 뒤 상해 망명을 추진했는데, 이때 이재호는 일찍이 궁내부(宮內府)에 재직시 의친왕을 수행하여 일본에 갔던 경험도 있어, 의친왕의 국외망명계획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의친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던 정운복(鄭雲復)과 절친한 관계를 이용하여 쉽게 의친왕의 승낙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동년 11월 9일 정남용(鄭南用)·이을규(李乙奎) 등이 의친왕을 수행하고 서울을 출발했으나 도중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을 받아 의친왕 일행은 이틀 후인 11월 11일 만주 안동역(安東驛)에서 피체되고 말았다. 이로써 대동단 본부의 상해이전계획은 물론 대동단 조직의 대부분이 파괴당하였고, 그는 일경에 피체되어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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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57) 이정(李政) 1874. 12. 10. ~ 1959. 2.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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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4월 13일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국내의 독립운동 열기가 고조되어갔다. 이에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민족의 대동단결을 표방하며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고 대동단(大同團, 朝鮮民族大同團)을 조직하였다. 대동단은 8월경부터 제2 독립선언 시위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 국내활동이 어렵게 되자, 10월 10일 총재 김가진은 상해로 망명했다. 이어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의 상해 망명을 추진하는 한편, 11월 27일 광화문 앞에서 제2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정은 1919년 10월경, 전협(全協)으로부터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의 설립 목적과 취지를 듣고 유림단의 대표자로 가입하였다. 그리고 11월 27일, 나창헌·안교일(安敎一)·정규식(鄭奎植)이 선언서 3,000매를 각각 인쇄, 오후 5시를 기해 자동차 3대를 이용하여 신속하게 시내에 배포할 예정이었다. 이정은 거사 당일 배재학당에서부터 서대문정을 통과하여 종로 2정목 보신각 앞까지 시위에 참가하려다가 일경에 의해 체포되었다.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정치범죄처벌령)·출판법·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 200일 통산)를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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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58) 이종춘(李種春) 185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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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1월 대동단이 주도한 제2차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이를 추진하였다. 3.1운동의 토양 위에서 조직된 대동단은 전민족의 대동단결을 표방하며 한국 독립을 주창하였다. 대동단은 비밀결사로서 <대동신보(大同新報)>를 발행, 배포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조직을 중국 상해(上海)로 옮기고,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의 상해 망명을 추진하였으나, 일제에 탐지되어 좌절되었다. 이후 대동단은 제2차 독립선언계획을 통해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3.1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일제의 야만성을 비판하고, 한국 독립을 주창하고자 했다. 이종춘은 제2차 독립선언서에 노인대표자(老人代表者)로 서명하고,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조선총독부에 당당히 요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경은 소위 보안법 등을 위반했다며 이들을 체포했다. 이종춘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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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59) 임병대(林炳大) 1869. 5. 19. ~ 1936. 9.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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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06년 임병찬(林炳瓚)의 동생으로 최익현(崔益鉉) 의병진에 가담하여 참모(參謀)로 활동하였다. 을사조약의 늑결과 더불어 면암(勉菴) 최익현이 의병 거의를 위해 태인(泰仁)에 도착한 것은 1906년 3월 24일이었다.
이때 임병대는 전 낙안군수(樂安郡守)인 형 임병찬과 함께 거의를 위해 태인에 집결하였고, 그밖에 100여 명의 유림 인사들이 모였다. 이들은 같은 해 4월 13일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열어 의병을 창의하였다. 이때 임병대는 최익현 의병진의 참모를 맡았다. 창의 후 이들은 태인읍을 점령하고, 각지의 군사들을 모아 의병 대열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14일 정읍으로 진군하고, 4월 16일에는 순창으로 진군하여 무장을 강화하니 의병은 600여 명에 달했다. 그런데 관군이 의병 해산을 종용하는 과정에서, 면암이 관군과의 싸움을 포기하게 되자 의병부대는 해산하고 말았다.
그 후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던 임병대는 3·1운동 후 1919년 서울에서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이 조직되고 정읍지방에 지부조직을 설치하며 조카 임응철(林應喆)이 정읍의 책임자로 활동하게 됨에 따라 동단에 가입하여, 동지 규합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그는 1920년 초 대동단이 발각될 때 일경에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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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60) 임수명(林守明/林鏡/林作柱) 1897. 3. 7 ~ 1977. 6.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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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조부 임병찬(林秉瓚)이 1913년 9월 서울에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결성,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던 중 피체되어 1914년 거문도(巨文道 : 전남 여주군 삼산면)로 유배(流配)되자 조부를 수행하여 1916년 임병찬이 객사순국(客死殉國)할 때 까지, 2년간에 걸쳐 봉양(奉養)하였다.
1919년 8월 전 협(全協)·이일영(李一榮)·윤용주(尹龍周) 등이 서울에서 비밀결사 조선독립대동단을 조직할 때 부친 임응철(林應喆)('90년, 애족장 추서)과 함께 입단하였다.
그는 동단에서 전라도 익산군(益山郡) 이사(理事)로 임명되어 동지규합(同志糾合)과 군자금모집을 담당, 임병대(林炳大)·김흥순(金興順)·이병호(李炳祜) 등에게 대동단 입단을 권유하여 가입케하고 김흥순으로부터 군자금으로 60원(圓)을, 이병호로부터 70원을 받아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부친 임응철(林應喆)을 통하여 대동단본부원 윤용주에게 납부케 하였으며, 김흥순을 전주군이사(全州郡理事)로 발령케 하는 등 활동하다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1920년 2월 2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검사의 공소(控訴)로 1920년 4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부분 취소되어 징역 1년에 3년간 집행유예를 받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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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61) 임응철(林應喆) 1871. 3. 9 ~ 1931. 8.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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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그는 한말 의병장 임병찬(林炳瓚)의 장남으로서 구한말에 홍문관(弘文館) 학사(學士)와 승정원(承政院) 비서승(秘書丞)을 역임하였고, 1913년 9월 임병찬이 주도하여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결성할 때 서울에 올라와 광무황제(高宗)의 밀조를 가져오는 등 의병 기의(起義)에 적극적인 활동을 폈다.
그 후 부친인 임병찬이 거문도(巨文島)에서 유배생활 중 1916년에 순국하자 망부(亡父)의 뜻을 계승하여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리던 중 1919년 9월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말에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대동단은 범국민적 조직을 목표로 활발한 조직활동을 벌였다.
동단 가입후 그는 먼저 그의 아들 임수명(林守明)과 숙부 임병대(林炳大)를 가입시켰고, 또 전주(全州)의 이병우(李炳祐), 남원(南原)의 강경진(姜景鎭)·형갑수(邢甲壽) 등을 포섭하면서 조직확대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동단의 전라북도 지단(支團)은 지단장에 임응철, 부단장에 이병우, 이사(理事)에 임수명 등이 선임되어 조직을 이끌었다.
이와 함께 그는 대동단 본부가 있는 서울을 수차 왕래하며 자금조달 등의 지원활동을 폈는데, 동년 11월 대동단에서 본부의 상행(上海) 이전계획과 함께 추진한 의친왕(義親王)의 상해 망명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대부분의 대동단 인사들이 피체되었고, 그도 이에 연루되어 피체되었다.
처음엔 증거불충분으로 일단 풀려 나왔으나 그후 그의 활동이 밝혀지면서 다시 피체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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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62) 장현식(張鉉植/張鉉軾) 1896. 9. 17 ~ 납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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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항일구국의 인재를 육성할 목적으로 현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인 사립 중앙고등보통학교(私立中央高等普通學校)를 설립하고 교주(校主)가 되어 지도자 양성에 헌신하였다.
1919년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이 창단되자 대동단의 운영자금을 제공하고 〈대동신문(大同新聞)〉 발간의 재정운영을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1939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에는 민족어 보존을 염원하여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지원하는 자금으로 3천원을 제공하였으며 1940년 11월경까지 지인(知人) 등에게도 권유하여 1400원을 제공하게 하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되었으나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무죄로 확정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9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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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63) 전대진(全大鎭) 1895. 6. 15 ~ 1963. 5. 8 |
| [답변] |
1919년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가입하여 제2회 독립만세 시위계획에 참가하였다. 3·1운동직후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결성한 조선민족대동단은 조선 독립을 위하여 먼저 민족 대단결을 목표로 민족사회의 각계 각층의 인사들을 망라한 조직을 구상해 갔다.
조선민족대동단에서는 일제의 포위망이 압박되는 상황에서 근거지를 상해로 옮길 것을 계획하고,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 망명을 도모하는 한편 1919년 11월 27일을 기해 3·1운동 때와 같은 만세시위를 일으키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민족대동단에서는 선언서와 만세시위에 필요한 격문을 인쇄하였는데, 전대진은 나창헌(羅昌憲)·안교일(安敎一)·정희종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사용할 격문의 배포를 맡아, 거사 전날인 11월 26일에 종로 일대의 민가에 선언서를 배포하였다.
그러나 거사 당일 만세시위를 위해 계획된 시위장소로 갔으나, 약속에 차질이 생겨 예정대로 만세시위를 벌이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친왕 상해 망명의 서전 발각과 더불어 그도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처벌령·출판법·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8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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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64) 전협(全協/全國煥/國煥/金東雲/韓錫東) 1876. 6. ~ 1927. 7.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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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람이다. 1896년 농상공부(農商工部) 주사(主事)로 관계(官界)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1904년 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에 가입하여, 이후 동회의 평의원(評議員)·총무원(總務員)과 전북지부회장(全北支部會長) 등으로 활동했고 이를 바탕으로 1907년부터 1909년까지 부평군수(富平郡守)를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무렵 망국(亡國)분위기가 짙어지는 가운데 과거 자신의 반민족적 행동을 반성한 그는 1909년에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세계 정세가 변화되면서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자 그는 정세파악을 위해 상해(上海)와 미주(美洲) 등지를 돌아보기로 결심하고 1918년 가을에 일단 국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동년 12월 제1차 목적지인 상해(上海)로 출발했다. 그런데 상해 체재 중 독립의 기회가 목전에 도래함을 감지하고 미주행(美洲行)을 단념한 채 1919년 2월 귀국했으며 곧 3·1운동이 일어나자 동년 3월말 최익환(崔益煥)등과 함께 대동단(大同團)을 결성했다.
이들은 3·1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3·1독립운동의 경과를 통해 독립달성을 위해서는 '조선 민족의 정신 통일과 실력 양성'이 급선무라는데 뜻을 모았고 이를 위한 실천방안으로 대동단을 결성했던 것이다. 이들은 당시 사회 각층을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를 근간으로 전국적 조직을 계획하였는데, 전 협은 동단의 조직과 재정을 총괄하며 동단을 주도했다.
그런데 동년 5월 23일 동단의 선전활동을 주관하던 최익환(崔益煥) 등이 일경에 피체됨으로써, 조직의 일부가 발각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 협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조직을 강화해 가는 한편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를 발행하면서 계속 활동을 펴나갔다.
그러던 중 일제의 포위망이 압축됨에 따라 전 협 등은 동단의 본부를 상해(上海)로 이전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그 제1단계로 먼저 동단의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동년 10월 10일 상해로 망명케 했다. 그리고 의친왕(義親王)을 동단의 수령으로 추대하여 상해 망명을 추진하는 것과 함께 국내에서의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추진했다.
그리하여 동년 11월 9일 의친왕(義親王)의 상해 망명을 실행에 옮겼는데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을 받아 만주 안동(安東)까지 넘어갔던 의친왕의 일행이 동년 11월 11일 만주 안동역에서 피체되고 말았다. 이로써 대동단의 계획은 성사 직전에 무산되었고, 전 협은 동년 11월 19일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인하여 1927년 7월 11일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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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65) 정남용(鄭南用/鄭必成/洪宇植) 1896. ~ 1921. 4.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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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高城)의 건봉사(乾鳳寺) 승려 출신인 그는 1914년 이후 서울로 올라와 휘문의숙(徽文義塾)과 중앙불교포교당(中央佛敎布敎堂)에서 수업을 쌓았다.
3·1독립운동 직후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조직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 활동했다. 대동단은 독립달성을 위해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로서,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단원으로 포섭하여 전국적인 조직을 계획하고 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1919년 5월 동단의 최익환이 피체된 이후 그 후임으로 선전활동을 주관하면서 동단 발행의 〈선언서(宣言書)〉와 〈임시규칙(臨時規則)〉 등 각종 문서의 인쇄 및 배포의 책임을 맡았다. 당시 대동단은 사회 각층 중 진신(縉紳)·유림(儒林)·상공(商工)·청년(靑年) 등 4개 단(團)을 중심으로 단원 포섭에 나섰는데, 그 가운데 청년단의 조직을 정남용이 주관했다.
그리하여 송세호(宋世浩)·나창헌(羅昌憲) 등을 가입시키는 등 조직확대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한편, 대동단은 앞서 최익환 등의 피체로 조직의 일부가 노출되었고, 또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 등의 발행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것과 함께 동단에 대한 일경의 포위망도 그만큼 압축되어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전 협·정남용 등 동단의 주도인사들은 대동단 본부를 상해(上海)로 이전할 것을 계획하였고, 그 제1단계로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동년 10월 10일에 먼저 상해로 망명케했다. 이어 의친왕(義親王)을 동단의 수령으로 추대하고 상해 망명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동년 11월 9일 정남용은 이을규(李乙奎)와 함께 의친왕을 수행하여 서울을 출발해서 만주 안동(安東)까지 갔으나,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을 받아 11월 11일 만주 안동역에서 피체되었다.
이로 인하여 대동단 본부의 상해 이전 계획이 무산됨은 물론, 동단의 조직도 파괴당하고 말았다. 이 일로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잔악한 고문의 여독으로 1921년 4월 18일 옥중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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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66) 정설교(鄭卨敎) 1894. 4. 2. ~ 1969. 12.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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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그는 보성고보(普成高普) 3년 재학중 1919년 4월 김상옥(金相玉)이 주도가 되어 결성된 혁신단(革新團)에 가입하였다. 이 혁신단은 독립사상을 고취·선전하는 홍보(弘報)활동을 하기 위한 지하단체로서, 그 이외에도 이춘식(李春植)·윤익중(尹益重)·전우진(全宇鎭) 등 8명이 단원으로 있었다.
혁신단에서는 조직의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혁신공보(革新公報)〉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였는데, 그도 이에 적극 활동하였다. 그러나 〈혁신공보〉의 발행은 재정의 궁핍과 인쇄책임을 맡던 동지 서대순(徐大順)이 일경에 피체되면서 인쇄시설 또한 압수당하여 9월까지만 발행되었다.
1920년 그는 단원들과 협의를 거쳐 본격적인 요인암살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에의 방향을 잡고 암살단(暗殺團)의 구성에 적극 협력하였다. 그리하여 1923년 그는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의거와 삼판동(三坂洞) 사건에 연루·피체되어 1923년 10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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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67) 정수현(鄭壽賢) 1887.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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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서울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한 수단으로 구입한 모형 권총을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일명 大同團) 간부 신덕영(申德永)에게 전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조선민족대동단은 1919년 3월 말경 서울에 있는 전협(全協)의 집에서 결성된 비밀결사였다. 첫째, 한국을 일본제국의 통치에서 이탈하게 해 독립국을 형성하게 할 것, 둘째,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확보할 것, 셋째, 사회주의를 철저히 실행할 것 등의 3대 강령을 내걸었다.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귀족ㆍ관리ㆍ유학자ㆍ종교인ㆍ상공인ㆍ청년ㆍ학생ㆍ부녀자 등 각계각층의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었으며, 전국 각지와 만주에 지부를 설치하고 비밀 유지를 위해 점조직으로 운영되었다. 1919년 4월부터 1년간 지하문서를 배포했으며, 『대동신보(大同新報)』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정수현은 1920년 이동녕(李東寧)ㆍ박은식(朴殷植)의 지시로 국내로 들어와 군자금 모집을 위해 대동단에 가입해 활동하던 신덕영의 거사 계획에 찬성하여 동지가 되었다.
대동단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직접 완구용 권총을 구입하여, 당시 전남 광주(光州)에 내려가 있던 신덕영에게 편지를 보내 권총을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전하였다. 1920년 10월 22일경 권총 2정을 자신의 짐 속에 숨겨 최양옥(崔養玉)과 함께 광주로 내려가 신덕영에게 전달하였다.
192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1919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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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68) 정정화(鄭靖和) 1900. 8. 3. ~ 1991. 11.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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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연기(燕岐) 사람이다. 시부(媤父)인 대동단(大同團)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따라 1919년 3·1독립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갔다.
정정화는 1930년까지 임시정부의 재정 지원을 위하여 6회에 걸쳐서 국내를 왕복하면서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고 한다.
1932년에는 윤봉길(尹奉吉)의 상해(上海) 홍구공원(虹口公園) 의거 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임시정부가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으로 이동함에 따라 이동녕(李東寧) 김 구(金九) 엄항섭(嚴恒燮) 등과 함께 이동하여 임시정부를 도왔다.
1934년에는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에 입당하여 활동하였으며, 1940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창당요원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또한 같은 1940년에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을 조직하고 그 간부로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41년에는 임시정부의 보호 하에 있는 중경(重慶) 3 1유치원(幼稚園)의 교사로 임명되어 독립운동가 자녀들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였다.
1943년 2월 23일에는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 산하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의 재건조직에 참여하여 훈련부장에 선출되었으며, 국내외 한인 부녀의 총단결과 조국광복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방송을 통하여 국내외에 있는 동포여성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고, 혹은 위문 금품을 거두어 일선에 있는 독립군을 위문하며, 혹은 적진 중에 끼어 있다가 포로수용소를 통하여 넘어오는 동포 여성들을 계몽 교육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또 전란과 병고로 고생하는 동포들을 찾아 정성어린 위문과 부조로 천애이역(天涯異域)에서 동포애의 꽃을 피우기도 하였으며, 멀리는 미주 한국여성단체들과의 긴밀한 연락으로 재미(在美) 각계 동포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성원을 두터이 하는 데에도 공헌하였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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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69) 정희종(鄭喜鐘) 1871 ~ ? |
| [답변] |
정희종은 흥인배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19년 11월 20일경 서울 창신동에서 대동단(大同團, 朝鮮民族大同團) 단원 나창헌(羅昌憲)의 부탁을 받아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배포하였다. 대동단은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민족의 대동단결을 표방하며 조직하였다. 대동단은 진신단(縉紳團)·유림단(儒林團)·군인단(軍人團)·부인단(婦人團)·상공단(商工團)·청년단(靑年團)·지방단(地方團) 등으로 조직을 키우고, 11월 27일 오후 5시를 기하여 광화문 앞 광장에서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정희종은 1919년 11월 25일경에 나창헌의 의뢰를 받은 강정희(姜正熙)로부터 독립선언서 약 50장과 상해에서 보내온 여러 종의 선언서 약 50장을 받았다. 다음날 밤, 그것을 가지고 교회에서 알게 된 전대진(全大振)을 찾아가 27일의 시위운동 사실을 알리고 배포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된 정희종은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정치범죄처벌령), 출판법, 보안법 위반 및 사기로 징역 1년 6월(미결구류 200일 통산)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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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70) 조병철(曺秉喆) 1877. 11. 8. ~ 1939. 1. 6. |
| [답변] |
1920년 10월 전남 광주군(光州郡)에서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일명 大同團) 간부 신덕영(申德永)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조선민족대동단은 1919년 3월 말경 서울에서 전협(全協)의 집에 모여 결성된 비밀결사였다. 첫째, 한국을 일본제국의 통치에서 이탈하게 해 독립국을 형성하게 할 것, 둘째,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확보할 것, 셋째, 사회주의를 철저히 실행할 것 등의 3대 강령을 내걸었다.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귀족ㆍ관리ㆍ유학자ㆍ종교인ㆍ상공인ㆍ청년ㆍ학생ㆍ부녀자 등 각계각층의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었으며, 전국 각지와 만주에 지부를 설치하고 비밀 유지를 위해 점조직으로 운영되었다. 1919년 4월부터 1년간 지하문서를 배포했으며, 『대동신보(大同新報)』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1920년 이동녕(李東寧)ㆍ박은식(朴殷植)의 지시로 국내로 들어온 신덕영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 대동단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최양옥(崔養玉)ㆍ노형규(盧衡奎)ㆍ노석중(盧錫仲) 등을 동지로 규합하여 간부진을 구성하고 1920년 7월경부터 활동하였다. 또한 노형규와 협의하여 미리 전남 지역 부호(富戶)들에게 군자금을 준비하라는 문서를 보내기로 하고, 전남으로 내려와 광주군 본촌면(本村面) 일곡리(日谷里)에 있는 노석중의 집을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유선주(劉善柱, 일명 박일봉)와 조병렬(曺秉烈) 등을 동지로 규합하고 광주ㆍ화순ㆍ곡성ㆍ담양ㆍ보성군 등 전남 각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조병철은 같은 해 10월경 신덕영의 동지가 되어 양인묵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그리고 양인묵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할 부호로 양지봉(梁志鳳)ㆍ양하묵ㆍ임승호(林承鎬)ㆍ민영두(閔泳斗)ㆍ기근섭(奇近燮)ㆍ박동춘(朴東春) 외 여러 명을 추천받아, 신덕영에게 그 명단을 건네주어 미리 문서를 발송하도록 권유하는 등의 지원을 하였다.
192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1919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20년 10월 전남 광주군(光州郡)에서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일명 大同團) 간부 신덕영(申德永)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조선민족대동단은 1919년 3월 말경 서울에서 전협(全協)의 집에 모여 결성된 비밀결사였다. 첫째, 한국을 일본제국의 통치에서 이탈하게 해 독립국을 형성하게 할 것, 둘째,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확보할 것, 셋째, 사회주의를 철저히 실행할 것 등의 3대 강령을 내걸었다.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귀족ㆍ관리ㆍ유학자ㆍ종교인ㆍ상공인ㆍ청년ㆍ학생ㆍ부녀자 등 각계각층의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었으며, 전국 각지와 만주에 지부를 설치하고 비밀 유지를 위해 점조직으로 운영되었다. 1919년 4월부터 1년간 지하문서를 배포했으며, 『대동신보(大同新報)』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1920년 이동녕(李東寧)ㆍ박은식(朴殷植)의 지시로 국내로 들어온 신덕영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 대동단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최양옥(崔養玉)ㆍ노형규(盧衡奎)ㆍ노석중(盧錫仲) 등을 동지로 규합하여 간부진을 구성하고 1920년 7월경부터 활동하였다. 또한 노형규와 협의하여 미리 전남 지역 부호(富戶)들에게 군자금을 준비하라는 문서를 보내기로 하고, 전남으로 내려와 광주군 본촌면(本村面) 일곡리(日谷里)에 있는 노석중의 집을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유선주(劉善柱, 일명 박일봉)와 조병렬(曺秉烈) 등을 동지로 규합하고 광주ㆍ화순ㆍ곡성ㆍ담양ㆍ보성군 등 전남 각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조병철은 같은 해 10월경 신덕영의 동지가 되어 양인묵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그리고 양인묵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할 부호로 양지봉(梁志鳳)ㆍ양하묵ㆍ임승호(林承鎬)ㆍ민영두(閔泳斗)ㆍ기근섭(奇近燮)ㆍ박동춘(朴東春) 외 여러 명을 추천받아, 신덕영에게 그 명단을 건네주어 미리 문서를 발송하도록 권유하는 등의 지원을 하였다.
192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1919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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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71) 조용선(趙龍善) 1894. 2. 11. ~ 1981. 5. 31. |
| [답변] |
대구(大邱)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에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의 무차별 시위 탄압과 사격으로 인해 부상을 당하여 서울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이후 계속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항일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중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조직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동단은 한민족의 민족역량을 결집하여 민족적 대동단결과 실력양성을 표방하고 민족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담당할 것을 목적으로 황족·유림·종교·상공·노동·청년·군인·부인 등 전사회 각 계층의 인사들을 규합하려던 조직으로서, 주로 각종 인쇄물의 인쇄·배포 등을 통한 독립사상의 고취와 동단의 선전 및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그는 윤인중(尹寅重)·송황규(宋黃奎)·홍인표(洪仁杓) 등과 함께 조국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자는데 뜻을 같이하고, 그러한 요지의 호소문 및 각종 선전물을 서울 일대에서 배포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20년 4월경에는 윤인중·홍인표 등과 함께 충남 대전(大田)·논산(論山)·공주(公州)·전북 전주(全州)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 3,000여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여 김영진(金永津)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활동상황이 일경에 탐지, 붙잡혀 1920년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출판물법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 6월형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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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72) 조종환(趙鍾桓) 1888. 1. 24. ~ 1937. 10. 1. |
| [답변] |
경기도 강화(江華) 사람이다. 1919년 3월 9일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온수리(溫水里) 교회당에서 서울에서의 3·1독립만세시위 상황에 관하여 연설하고 "강화도에서만 있을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주민들을 고무하였는바, 3월 19일 읍내시장에서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지게끔 하는 직접적인 자극을 주었다.
1919년 5월말에 서울에서 비밀결사 대동단(大同團)의 단원 유경근(劉景根)을 만나 시국문제에 관한 대담을 하던 중, 노령(露領)에서 이동휘(李東輝)가 독립군 장병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음과 아울러 그에 대한 협조 요청을 받고서 6월 15일경 노준(魯駿) 외 2명의 노령행 지망자를 유경근에게 소개하여 그들이 국외로 탈출할 수 있게 해 주었다.
1919년 11월 대동단 조직이 일경에 포착됨으로써 다수 단원에 대한 검거 선풍이 불어닥쳤을 때 피체된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처벌령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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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73) 조철현(曺喆鉉) 1898. 2. 27. ~ 1922. 9. 21. |
| [답변] |
그는 서울에서 3·1운동에 참가한 뒤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인 영광에 내려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영광읍에서의 만세운동은 두 갈래의 계통에서 추진되었다. 하나는 서울에 유학하던 조철현·유일(柳一) 등이 서울의 3·1운동에 참가한 뒤 선언서를 가지고 3월 5일 고향에 돌아와 읍내 노동조합장 정인영(鄭仁英)과 보통학교 훈도 이병영(李秉英)·박태엽(朴泰燁) 등에게 소식을 알리면서 추진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장(國葬) 참여차 서울에 갔던 읍내 유지 이좌근(李佐根)이 조병현과 조맹환(趙孟煥)·노준(魯俊) 등에게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알리면서 만세운동을 계획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로의 계획을 알게된 이들 두 갈래의 인사들은 3월 10일 읍내 장날에 연대시위를 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 오후 1시경 독립선언식이 거행될 때, 조철현은 모인 군중들에게 당시의 정세를 설명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이어 수백 명의 군중을 인솔하여 영광경찰서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시위가 해산된 뒤 일경의 검거망을 피한 그는, 재차 만세운동을 계획하여 3월 14일 영광보통학교 학생 1백 20여 명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거행하였다.
이후 일경의 포위망을 피해 서울로 올라간 그는 영광출신으로 당시 중앙학교(中央學校) 교사로 있던 고경진(高景鎭)과 독립운동의 구체적 방도를 협의하고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가입하였다.
조선민족대동단은 3·1운동 직후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민족대단결에 의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조직한 항일비밀결사로써, 1919년 10월 경 재차 3·1운동과 같은 거족적 규모의 제2차만세운동을 계획하는 한편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 망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의친왕의 상해 망명 계획이 일경에 사전 발각됨으로써 단원의 대부분이 붙잡혔는데, 이 때 조철현은 서울에서 일경에 붙잡혔다.
붙잡힌 후 그는 '대동단 사건' 뿐아니라 영광에서의 '만세운동건' 까지 연루되어 1920년 2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3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1922년 9월 21일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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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74) 최익환(崔益煥/號:九田) 1889. 2. 12 ~ 1959. 7. 25 |
| [답변] |
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1905년 서울의 광무일어학교(光武日語學校)에 들어가 2년간 수학한 뒤 1907년 가을에 종사도량형사무국(從事度量衡事務局) 통영관을 거쳐 탁지부(度支部) 세무주사(稅務主事)와 충남 서천군(徐川郡) 재무주사(財務主事)를 지냈다.
1909년 서천군 재무주사 재직중, 그는 한때 일진회(一進會)에 관계했던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며 국외 망명을 결심하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공금 3천여원을 사취했다가 이일이 발각됨으로써 징역 7년형을 받았다.
1915년 출옥한 이후 만주 봉천(奉天) 등지를 왕래하던 그는 1917년경부터 세계정세가 급변되면서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자 독립 달성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1918년 봄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랜 동지 전 협(全協)과 결합하여 독립운동의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들은 독립달성을 위해서, '조선 민족의 정신 통일과 실력 양성'이 급선무라는데 뜻을 모으고 그의 실천 방안으로서 대동단(大同團)'을 결성했다. 이들은 당시 사회 각층을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전국적 조직을 목표로 하고 활발한 조직 및 선전활동을 펴나갔다.
이때 최익환은 동단의 선전활동을 주관하면서 동단 발행의 각종 인쇄물 등을 작성·배포하였다. 그런데 이무렵 그가 자금 모집을 위해 관여했던 거간(居間) 중매가 금품 사취로 되어 동년 5월 23일 일경에 피체되었다.
일제도 처음에 이들이 대동단과 관련된 것을 몰랐으나 조사 과정에서 대동단원으로 밝혀짐에 따라 최익환을 비롯해 선전물의 작성, 인쇄 배포에 참여했던 권태석(權泰錫)·나경섭(羅景燮)·김영철(金永喆) 등도 피체되었는데, 이를 보통 대동단사건이라 부른다. 이일로 그는 소위 보안법(保安法) 및 출판법(出版法) 위반죄로 징역 6년형을 언도받았다.
출옥 후 1925년에 대동단의 동지였던 권태석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폈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될 때에는 발기인으로 참여 활동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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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75) 최전구(崔銓九) 1850. 6. 5 ~ 1938. 9. 26 |
| [답변] |
전라북도 고창(高敞)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의진에 입대하여 시종을 함께 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상실되자 일제침략자들을 10대죄목(十大罪目)으로 성토하다가 체포되어 경남 욕지도(欲知島)로 유배되어 1년간 유형을 치렀다.
1914년 2월에는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가 결성되자 특파내외순찰사(特派內外巡察使)에 임명되어 계속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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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76) 최창섭(崔昌燮) 1893. 1. 19. ~ 1969. 5. 25. |
| [답변] |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직후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 결성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항일활동을 폈다.
대동단은 한민족의 민족역량을 결집하여 민족적 대동단결과 실력양성을 표방하고 민족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담당할 것을 목적으로,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을 규합, 주로 각종 인쇄물의 인쇄·배포 등을 통한 독립사상의 고취와 동단의 선전 및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20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서 파견되어 군자금 모집 및 조직확대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허 영(許瑛)을 만나 그로부터 임시정부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 중이나 군자금 조달이 어려워 재정곤란에 처해 있다는 말과 함께 조선 청년 모두가 이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이에 공명하여 군자금 모금활동을 펴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허 영의 지시를 받고 동향(同鄕)의 최경로(崔敬老)·황인수(黃麟秀)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기로 뜻을 모으고, 경기도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제1차로 2만원을, 그후 제2차로 몇천원의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로 송달하며 활동을 계속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1921년 5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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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77) 한기동(韓基東) 1898. 3. 13 ~ ? |
| [답변] |
평남 평양(平壤)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에 경기도 장단군 진남면(長湍郡 津南面)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3월 26일 밤 장단군의 이창영(李昶永)·정순만(鄭順萬)·백태산(白泰山)·이성구(李成九)·양세영(梁世瑛) 등 100여명의 군중들과 함께 동장리(東場里)에 있는 사립 성화학교(聖化學校)를 출발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부근 일대를 시위 행진하였다.
이후 계속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항일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중, 3·1독립운동 직후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조직한 비밀결사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동단(大同團)은 한민족의 민족역량을 결집하여 민족적 대동단결과 실력양성을 표방하고 민족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담당할 것을 목적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그는 김가진·전 협·정남용(鄭南用)·송세호(宋世浩)·이을규(李乙奎) 등과 함께 의친왕(義親王)을 상해로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세워 제2의 독립만세시위를 추진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1919년 10월 김가진이 먼저 상해로 망명한 후, 동년 11월 9일 한기동은 전 협의 지시에 따라 정남용·송세호·이을규 등과 함께 의친왕을 수행하여 상해로 출발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11월 11일 수색역(水色驛)을 출발, 안동(安東)으로 향하였는데, 이때 한기동은 중간상황을 전 협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개성(開城)에서 하차하여 서울로 되돌아왔다. 이러한 의친왕 망명 계획은 일경에 탐지되어 추격을 받아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피체되었고,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위반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고 1922년 8월 15일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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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78) 한위건(韓偉健) 1896~1937 |
| [답변] |
서울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1919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 학생대표로 3·1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서울에서는 1919년 1월부터 각 전문학교 학생대표로 구성된 지도부가 구성되었는데, 이때 그는 경성의학전문 대표로 참가했다. 또한 그는 만세운동을 위해 종교단측과 연합전선 형성을 위한 모임에 학생대표로 참석하면서 만세시위에 앞장서 나갔다.
3·1운동 후 일제의 체포망을 피한 그는 서울에서 생겨난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상하이[上海]에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내무위원,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함경도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승만(李承晩)의 위임통치 청원과 여운형(呂運亨)의 일본 방문에 비판적 태도를 보이면서, 신채호(申采浩)가 상해에서 발간하던 주간신문『신대한(新大韓)』발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20년 잠시 귀국한 그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일본 유학 당시인 1923년 조선인유학생학우회(朝鮮人留學生學友會)에 참가하여 위원·총무 등을 맡았으며 국내 순회강연도 벌였다. 이 무렵 그는 조선기독교청년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1924년 1월 이광수(李光洙)가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을 게재하자, 재동경조선인대회 명의로 동아일보사의 사죄 및 논설 취소를 요구했다.
1924년 귀국한 뒤 시대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 등 사회단체에 가입하면서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공감해 오던 사회주의 사상의 실천을 위해 1926년 11월 정우회(正友會)에 가입하여 안광천(安光泉)과 함께 ‘정우회 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12월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 초 신간회(新幹會) 발기에 참가하여 창립총회에서 간사로 선정되었으며, 조선공산당 선전부장을 맡았고,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중국에 머물면서 잡지『계급투쟁』을 발간하면서 당 재건운동과 항일투쟁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이론가로 활동하는 한편 이철부(李鐵夫)라는 중국식 이름을 사용하면서, 공산주의자협의회(共産主義者協議會)·학생공산당(學生共産黨)·노동계급사(勞動階級社)·북평반제동맹(北平反帝同盟) 등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3년 한때 중국국민당 정부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출옥 후 중국공산당 허베이성[河北省] 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다. 노선상의 차이로 중국공산당과 잠깐동안 단절한 뒤에도 1935년 12월 천진에서 항일집회 및 시위운동에 참가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36년 봄 중공 북방국(北方局) 서기 유소기(劉少奇)에 의해 하북성위 서기 겸 텐진[天津]시위 서기로 임명되었으며, 1937년 5월 연안에서 소비에트구역 당대표대회가 열릴 때 국민당지구 대표로서 참석했다. 건강이 좋지 않던 그는 대회가 끝난 후 옌안[延安] 요양소에서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서울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1919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 학생대표로 3·1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서울에서는 1919년 1월부터 각 전문학교 학생대표로 구성된 지도부가 구성되었는데, 이때 그는 경성의학전문 대표로 참가했다. 또한 그는 만세운동을 위해 종교단측과 연합전선 형성을 위한 모임에 학생대표로 참석하면서 만세시위에 앞장서 나갔다.
3·1운동 후 일제의 체포망을 피한 그는 서울에서 생겨난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상하이[上海]에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내무위원,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함경도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승만(李承晩)의 위임통치 청원과 여운형(呂運亨)의 일본 방문에 비판적 태도를 보이면서, 신채호(申采浩)가 상해에서 발간하던 주간신문『신대한(新大韓)』발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20년 잠시 귀국한 그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일본 유학 당시인 1923년 조선인유학생학우회(朝鮮人留學生學友會)에 참가하여 위원·총무 등을 맡았으며 국내 순회강연도 벌였다. 이 무렵 그는 조선기독교청년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1924년 1월 이광수(李光洙)가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을 게재하자, 재동경조선인대회 명의로 동아일보사의 사죄 및 논설 취소를 요구했다.
1924년 귀국한 뒤 시대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 등 사회단체에 가입하면서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공감해 오던 사회주의 사상의 실천을 위해 1926년 11월 정우회(正友會)에 가입하여 안광천(安光泉)과 함께 ‘정우회 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12월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 초 신간회(新幹會) 발기에 참가하여 창립총회에서 간사로 선정되었으며, 조선공산당 선전부장을 맡았고,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중국에 머물면서 잡지『계급투쟁』을 발간하면서 당 재건운동과 항일투쟁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이론가로 활동하는 한편 이철부(李鐵夫)라는 중국식 이름을 사용하면서, 공산주의자협의회(共産主義者協議會)·학생공산당(學生共産黨)·노동계급사(勞動階級社)·북평반제동맹(北平反帝同盟) 등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3년 한때 중국국민당 정부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출옥 후 중국공산당 허베이성[河北省] 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다. 노선상의 차이로 중국공산당과 잠깐동안 단절한 뒤에도 1935년 12월 천진에서 항일집회 및 시위운동에 참가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36년 봄 중공 북방국(北方局) 서기 유소기(劉少奇)에 의해 하북성위 서기 겸 텐진[天津]시위 서기로 임명되었으며, 1937년 5월 연안에서 소비에트구역 당대표대회가 열릴 때 국민당지구 대표로서 참석했다. 건강이 좋지 않던 그는 대회가 끝난 후 옌안[延安] 요양소에서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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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79) 한태현(韓泰鉉) 1878. 9. 12. ~ 1951. 2. 21. |
| [답변] |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8월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한 이후 고향인 남원 지방을 중심으로 조직활동을 벌였다.
동단의 조직 확대를 위해 그는 남원군내에 청년단(靑年團)을 조직하고 단장의 일을 맡으면서 주로 청년 단원의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대동단은 1919년 3월 말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 조선 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독립운동단체로서, 본부를 서울에 두고 전국 각처에 지단을 설치하였다. 또 이들은 당시 사회 각층을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와 같은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통일·종합함으로써 범국민적 조직을 구상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그는 동지 김재구(金在九)·강경진(姜景鎭) 등과 함께 동지를 포섭하였고, 또 자금모금 활동도 전개했다.
그런데 1919년 11월 대동단 본부가 주도한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 망명계획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대동단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어 동단의 전라북도 지단도 자연 발각되었고, 이로 인하여 그는 1920년 3월 15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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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80) 허운서(許雲瑞) 미상 ~ 1920 |
| [답변] |
1920년경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일경에 의해 피살된 인물이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이 지역에 근거하여 국내에 진공하고 있는 한국독립군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1920년 8월 이른바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간도침입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1920년 10월 2일 왕사해(王四海) 등을 두목으로 한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그들의 훈춘(琿春) 영사관 분관을 습격하도록 하였다. 이를 구실로 일본정부는 영사관 및 거류민 보호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1920년 10월 7일 급속히 군대를 간도로 출병시켰다.
출동지구는 제1 훈춘방면, 제2 왕청(汪淸)방면, 제3 용정(龍井)방면, 제4는 도문강(圖們江) 대안부근이었다. 훈춘방면은 기림(磯林)소장이, 왕청방면은 대촌(大村)대좌가, 용정방면을 동소장(東少將)이, 도문강 대안은 경찰관, 헌병 및 수비대에서 수시로 강을 건너 진출하여 독립군을 소탕할 계획이었다.
즉 일본은 동쪽에서는 블라디보스톡 파견군인 제11, 13, 14사단의 6,000여 명, 서쪽에서는 관동군의 보병과 기병을 합한 1,200여 명, 남쪽에서는 조선군 제19사단에서 9,000여 명, 제20사단에서 700여 명, 북쪽에서는 북만주에 파견되었던 안서(安西)지대의 1,000여 명의 병력 등 합계 약 18,000명에서 20,000명으로 추정할 수 있는 병력을 사방에서 침입시켰다. 이들 침략군들은 1920년 10월 12일부터 간도를 향해 4면에서 포위해 들어왔다.
일본군은 이 작전에서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그에 대한 보복 행위로 독립군의 모체인 한인사회와 항일단체·학교·교회 등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실시하여「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 불리는 간도지역의 한인 참살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1920년 10월경 북간도 연길현(延吉縣) 상의향(尙義鄕)에서 대동단(大同團) 간도 중부회(間島中部會)의 기부금 수령계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허운서도 간도에 침입한 일제에 의해 희생되었다. 김강(金剛)·김재형(金在亨)·이송(李松) 등과 함께 연길현(延吉縣) 동불사(銅佛寺) 북구(北溝)에서 일본관헌에 의해 피살 순국하였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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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81) 형갑수(邢甲洙) 1892. 10. 9 ~ 1973. 7. 10 |
| [답변] |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그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남원에서 남원읍 장날인 4월 4일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 후 동년 8월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김재구(金在九)·강경진(姜景鎭) 등과 함께 남원 지방을 중심으로 동단의 조직 확대에 힘을 쏟는 한편 각종 선전물의 배포를 통하여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대동단은 1919년 3월 말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 조선 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독립운동단체로서,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 각처에 지단을 설치하였다. 또 동단에서는 당시 사회 각층을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들은 각층의 인사들을 통일·종합함으로써 범국민적 조직을 구상했다.
형갑수 등이 활약한 남원 지단에서는 주로 청년 단원을 근간으로 조직 활동을 벌였고, 이들은 자금을 수합하여 서울의 대동단 본부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1919년 11월 대동단 본부가 주도한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 망명계획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대동단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어 동단의 전라북도 지단도 자연 발각되었고, 이로 인하여 그는 1921년 3월 14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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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82) 황인수(黃麟秀) 1886. 1. 3. ~ 1945. 9. 6. |
| [답변] |
경기 파주(坡州) 사람이다. 1919년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으로부터 군자금모금 지령을 받은 동지 최창섭(崔昌燮)과 함께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대중을 규합하는 등 항일투쟁을 계획하였다.
동년 6월 20일경 그는 최창섭과 함께 경기 연천군(漣川郡) 왕등면(旺登面) 강서리(江西里)에 거주하는 고안중(高安中)의 집에 침입하여 70원을 모금하였고 동년 7월초에 다이나마이트로 고안중을 위협, 60원을 다시 징수하여 군자금을 상해임시정부에 송부하였다.
1921년 6월 20일 최창섭과 재차 회동하고 다시 고안중으로부터 60원을 추가징수하다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21년 7월 13일 소위 제령 7호 위반 및 폭발물 소지 혐의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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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83) 황창오(黃昌五) 1896. 4. 6 ~ 1982. 4. 21 |
| [답변] |
황해 해주(海州)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해주군 동운면(東雲面) 삼정리(參井里)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군중을 지도하며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나 일경의 감시와 추적으로 신변이 위험해지다 1920년 5월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동년 7월 상해에서 대동단(大同團)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만나 대동단에 가입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대동단은 3·1독립운동 직후 한민족의 민족역량을 결집하여 민족적 대동단결과 실력양성을 표방하고 민족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담당할 것을 목적으로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한 비밀결사였다.
동단은 황족·유림·종교·상공·노동·청년·군인·부인·보부상 등 전사회 각 계층의 인사들을 규합하려던 조직으로서, 주로 각종 인쇄물의 인쇄·배포 등을 통한 독립사상의 고취와 동단의 선전 및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대동단은 의친왕(義親王)을 상해로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세우고 제2의 독립만세시위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대동단의 지령을 받고 신현필(申鉉弼)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할 목적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던 중 그러한 사실이 일경에 탐지, 피체되어 1921년 7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이에 불복·공소하였으나 , 징역 1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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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김가진(金嘉鎭) 1846. 2. 25 ~ 1922. 7. 4 |
| [답변] |
조선 말기의 문신·독립운동가. 본관은 안동. 호는 동농(東農). 예조판서 응균(應均)의 아들이다. 1877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그뒤 규장각 참서관(奎章閣參書官이) 되었다.
1880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1881년 장례원주부(掌禮院主簿)가 되었다. 그뒤 인천항 통상사무아문주사(通商事務衙門主事)·부수찬(副修撰)·주차일본공사관참찬관(駐箚日本公使館參贊官)과 장령(掌令)·사복시정(司僕寺正)·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고, 1887년부터 주일본판사대신(駐日本辦事大臣)으로 4년간 동경에 주재하였으며, 1891년부터 안동대도 호부부사를 지냈다. 1894년에는 군국기무처회의원(軍國機務處會議員)이 되어 내정개혁에 참여하였으며, 병조참의·외무독판서리(外務督辦署理)·전우국총판(電郵局總辦)·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농상공부대신, 1896년 중추원 1등의관을 지냈다. 갑오경장이 실패한 뒤에는 1896년 7월에 조직된 독립협회의 위원에 선임되었고, 1897년 신구법(新舊法)을 절충하기 위하여 설치한 교전소(校典所)의 지사원(知事員)과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900년 중추원의장, 1902년 궁내부특진관(宮內部特進官), 1906년 충청도관찰사를 지냈으며, 대한자강회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다.
1907년 규장각제학을 역임하였고, 1909년에는 대한자강회의 계승단체인 대한협회의 회장이 되어 친일단체 일진회를 성토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남작이 수여되었으나 이를 물리치고,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의 총재로 추대되어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 북로군정서 고문을 역임하였으며, 대동단 해외본부를 건립하였다. 한때 임정의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1922년 7월 4일 상해에서 서거하여 만국공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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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오세덕(吳世悳) 1897. 11. 19 ~ 1986. 10. 20 |
| [답변] |
서울 안암동(安岩洞:舊高陽郡崇仁面)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철원(鐵原)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동년 8월 강대여(姜大呂) 신원균 박건병 등과 철원 애국단(鐵原愛國團:일명 大韓獨立愛國團)을 조직하고 10월 3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정부 성립 축하회 선언서"를 배포하여 제2의 만세시위계획을 추진하였으며, 이어서 그는 애국단 대표로서 박건병과 함께 상해로 파견되었다.
그는 동년 11월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강원도 철원군 조사원에 임명되었다. 1922년에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주비위원회가 조직되는 등 독립운동 선상에 불화가 일어나자 그는 노령(露領)으로 가서 문창범 오창환과 같이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는데 협조하였다고 한다.
1923년 봉천(奉天)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된 후, 한성은행에서 근무하였으며, 이곳에서 근무하던 중 의열단(義烈團)에서 파견된 구여순(具汝淳)의 방문을 받고 군자금 모집에 협조할 것을 약속하고, 한성은행 각 지점에서 본점으로 연말 송금이 있음을 알고 이를 습격하여 탈취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구여순이 사전에 체포되어 이러한 사실이 탄로됨으로써 그도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결국 1923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이란 죄명으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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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이 강(李 堈) 1877 ~ 1955 |
| [답변] |
조선 말기의 왕족.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평길(平吉). 호는 만오(晩悟). 의왕(義王)·의친왕(義親王) 또는 의화군(義和君)이라고도 불린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인 장씨(貴人 張氏)이다.
1891년(고종 28) 12월 의화군에 봉하여졌으며, 1893년 9월 김사준의 딸을 맞아 가례를 올렸다. 1895년 5월에 특파대사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8월에는 특파대사자격으로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1900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국대학교 특별과에 입학하였으며, 같은 해 8월에 의왕으로 봉하여졌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항일독립투사들과 접촉하여 1919년 대동단의 전협·최익환 등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하였으며,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도중 그해 11월 만주 안동에서 일본경찰에게 발각당하여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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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이종욱(李鍾郁) 1884. 1. 13 ~ 1969. 11. 3 |
| [답변] |
강원도 평창(平昌) 사람이다.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월정사(月精寺)에서 승려로 있었다. 1919년 3·1독립만세 시위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4월 2일에는 인천 만국공원(仁川 萬國公園)에서 비밀리에 각 종교계 대표들과 독립지사들이 모여 국민대회를 열었는데 그는 이때 불교계의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이들은 이승만(李承晩)을 집정관으로 하는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를 수립하였다.
그는 동년 4월초 상해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대한적십자회 조직에 참여한 뒤 임시정부 국내특파원으로 서울에 파견되었다. 그는 안재홍(安在鴻)·송세호(宋世浩)·연병호(延秉昊) 등과 청년외교단을 조직하고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벌였으며, 이들의 건의서를 임정 국무총리 안창호(安昌浩)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
또한 동년 9월 서울에서 다시 특파된 그는 10월 10일에 대동단(大同團) 단장인 김가진을 서울 관수동(觀水洞) 박봉구(朴奉九)의 집에서 만나 김가진을 농민으로 가장시키고 김가진의 아들 의한(毅漢)과 함께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10월 30일 상해(上海)에 도착하였다. 김가진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 이 강(李堈)을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상해로 망명시키기 위한 임무를 띠고 선발대로 먼저 상해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의친왕의 탈출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1919년 12월 29일 그는 임시정부 내무부 참사(參事)에 임명되었으며, 1920년 3월 19일에는 임시의정원 강원도의원에 선출되었다. 이듬해 3월 26일에 그는 전국에 연통제(聯通制)를 조직 실시하기 위한 내무부 특파원에 임명되어 다시 국내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는 1920년 6월 29일 청년외교단 운동으로 대구지방 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그 뒤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하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으며, 출옥 후에는 오대산(五台山) 월정사(月精寺)에 은거하면서 송세호(宋世浩)와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지하에서 활동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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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정두화(鄭斗和) 생몰 확인 안됨 |
| [답변] |
1919년 당시 호서은행 취체역이었던 그는 대동단 재정부장으로 대동단 활동자금의 대부분을 출연하였다. 1919년 11월부터 약 6개월간 투옥되었으나 증거불충분이란 이유로 불기소 처분되어 출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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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그 외 대동단 관련 인물 |
| [답변] |
권헌복(權憲復) 김병기(金炳起) 김봉양(金鳳陽) 김상설(金商說) 김세응(金世應)
김진명(金振明) 김홍진(金宖鎭) 나경섭(羅景燮) 노 준(魯 駿) 노홍제(魯弘濟) 박용주(朴龍柱)
신도안(申道安) 신영철(申瑩澈) 신태연(申泰鍊) 염광록(廉光祿) 윤종석(尹鐘奭)
이겸용(李謙容) 이능우(李能雨) 이병우(李炳祐) 이 정(李 政) 이소후(李霄吼) 이직현(李直鉉)
전상무(田商武) 전필순(全弼淳) 전필형(全弼涥) 정규식(鄭奎植) 조형구(趙炯九)
지봉서(池鳳瑞) 한일호(韓逸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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