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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보도자료] “내년 100주기엔 ‘독립운동가 김가진 선생’ 당당히 모셔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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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대…

등록일 21-12-17 11:27 조회 1,631
<대동단 총재 김가진>(석탑출판). 제목만 봐서는 그리 새롭지 않은 역사 인물 소개서로 보인다. 그런데 여러가지로 뜻밖이다. 우선 글쓴이가 내일신문 발행인 겸 대표이사 장명국(74) 사장이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1970~80년대 <노동법 해설> 저술과 강의 등 노동운동가로 활약했던 그는 1993년 주간 <내일신문> 창간에 이어 2000년 일간지로 전환한 뒤 지금껏 무차입 흑자경영을 해와 ‘경영 귀재’로 불리운다. 그런데 비전공자가 쓴 이 역사서가 출간 두 달만에 4쇄를 찍을 정도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더 뜻밖이다.
  “1년 전만 해도 나 역시 이런 책을 쓰게 될 줄 상상도 못했어요.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대동단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달라는 뜻밖의 제안을 받고 처음엔 손사레를 쳤으니까요. 그런데 대동단 활동으로, 단일조직으로는 최다인 80여 명이 독립운동 서훈을 받았지만 정작 총재인 동농 김가진(1846~1922) 선생만 서거 100년이 되도록 서훈은 물론 유해조차 중국에서 귀국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했어요.”
  지난 8일 서울 신문로 내일신문사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언론인으로서 순수한 호기심에서 출발했다”고 말을 꺼냈다.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 회장 맡아
‘대동단 총재 김가진’ 펴내 뜻밖 반향
“25년간 7회 독립운동 서훈 무산 의아”
‘의병 탄압’ ‘친일 행적’ 등 낙인 재검증
퇴임 시점 등 기본 사실관계부터 ‘오류’
“친고종 개화파 외교관으로 재평가해야”
  “1993년 주간 <내일신문> 창간할 때 큰 도움을 주신 임재경 선배로부터 지난해 대동단기념사업회장 제안을 받었어요. 2012년부터 3대 회장을 맡아왔는데, 고령으로 더는 힘에 부치시다며, ‘숙원 사업’ 해결을 간곡하게 부탁하셨어요.”
  그 숙원 사업은 바로 ‘동농의 독립운동 인정’이었다. 대동단기념사업회는 1929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동농의 손자인 김자동 회장을 중심으로 2004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임정기념사업회)에 앞서 2003년 창립했다. 이후 지금까지 25년간 7차례 동농의 독립운동가 서훈을 신청했지만 학계 일부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한 문재인 정부들어, 독립운동 평가의 폭을 크게 넓히도록 심사기준을 완화했지만 국가보훈처에서는 같은 결정만 반복해왔다.
  “우선 대한제국 대신 가운데 유일하게 망명해 임정 고문을 지낸 인물로만 알고 있던 동농 선생의 기록을 살펴봤어요. 그런데 서훈 반대의 근거로 거론된 행적들이 실제와 다르고 일부 오류도 있다는 사실을 승정원 일기 등 사료를 통해서 발견했어요. 그래서 확신감이 생겨 지난해 말 회장을 수락하고 본격적으로 출간작업에 나섰죠.”
  그가 말한 확신은 ‘외교관 출신 대동단 총재 동농 김가진, 친고종 개화파 외교관에서 독립운동가로’라는 책의 부제에 압축되어 있다. “동농은 19세기 후반 대한제국 관리로는 드물게 중국어·일어·영어까지 능통해 고종이 순국할 때까지 가장 신임하고 의지했던 ‘대변인’이었어요. 그래서 1919년 고종이 승하한 이후에야 망명을 결행하고 독립운동에 나선 것이죠.”
책에서 그는 동농에 대한 서훈 반대 이유들을 차례차례 재검증하고 반박의 근거들을 실증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서훈 반대의 첫번째 이유인 ‘충남관찰사 시절 의병 탄압’부터 사실과 달랐어요. 1907년 1월 홍주성 의병장 민종식을 평리원으로 압송했고, 그를 숨겨준 이남규와 성우영은 집으로 돌려보냈음을 상부에 보고했어요. 이어 4월 김가진은 중추원 찬의로 발령나고 5월에는 충남재판관에서도 퇴임해 지방관직에서 완전히 벗어났어요. 민중식은 그뒤 7월 유배형을 받았고, 9월 이남규 등이 순국했어요. 4개월의 시차가 있으니, 날짜같은 기본 사실관계조차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거죠.”
  두번째로 그는 ‘친일 행적’에 대해서 적극적인 반론을 펴고 있다. 가장 강력한 친일의 낙인인 ‘작위와 은사금 문제’부터 짚고 있다.
  “1910년 한일병탄 조약을 강제로 맺은 일제는 대한제국 관료 76명에게 일방적으로 작위를 줬어요. 동농도 남작 작위를 받았는데 반납하지 않았다는 것이 친일의 근거로 발목을 잡고 있죠. 그런데 그가 고종 황제의 뜻을 따르고 개인적인 입지보다는 ‘국익’을 우선해야 하는 외교관으로서 곧바로 거부하기 어려웠다고 판단할 수도 있어요. 무엇보다 그는 은사금을 받은 기록이 없어요. 대신 그 집안의 청지기가 가산을 몰래 빼돌리는 바람에 망명 직전엔 단칸방에서 살아야 했을 정도였더군요.”
  그는 책의 부록으로 동농 집안에서 청지기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기록도 찾아서 첨부해놓았다. 또한 이른바 ‘친일시’ 지적에 대해서도, 그는 시를 실었다는 사실만으로 ‘친일’ 평가를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1908년 5월 이토 히로부미의 67살 생일에 유림 어용단체가 발행하는 잡지에 김가진의 시 ‘이토에게-시중춘색창환수’가 실려 있어요. 그런데 1889년 이토가 쓴 시에 대한 화답이었어요. 그래서 두 시를 비교해보니 ‘총칼 안 쓰고 대화한다더니 거짓이었구려’라며 대한제국을 강제로 침탈한 식민지 권력자 이토를 조롱하는 내용이었어요.”
  마지막으로 그는 ‘복벽주의자’-‘사회주의자’라는 상반된 평가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점도 역사학계의 자료를 통해 지적한다. “대동단과 김가진이 의친왕 이강의 망명을 시도한 것이 복벽주의의 주근거인데, 3·1운동을 기점으로 민본주의에 눈을 떴을 뿐 아니라, 의친왕을 임시정부의 황제로 내세우려는 계획조차 없었어요. 1919년 9월 발표한 ‘대동단 2차 강령’에 처음으로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들어갔는데, 이는 왕정을 청산하는 ‘반(反)복벽’의 뚜렷한 선언으로 볼 수 있어요.”
  장 대표는 “서거 100주기인 내년에는 상하이 홍교로 만국공묘에 홀로 묻혀 있는 유해나마 당당히 모셔와야 할 것”이라며,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에 대한 재평가가 보훈당국은 물론 역사학계에서 전향적으로 이뤄지기를 기대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보도자료] “내년 100주기엔 ‘독립운동가 김가진 선생’ 당당히 모셔와야죠”
지난 8일 장명국 내일신문 사장이 집무실에서 대동단기념사업회 회장으로서 <대동단 총재 김가진> 책을 쓰게 된 배경을 소개하고 있다. 김경애 기자
<대동단 총재 김가진>(석탑출판). 제목만 봐서는 그리 새롭지 않은 역사 인물 소개서로 보인다. 그런데 여러가지로 뜻밖이다. 우선 글쓴이가 내일신문 발행인 겸 대표이사 장명국(74) 사장이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1970~80년대 <노동법 해설> 저술과 강의 등 노동운동가로 활약했던 그는 1993년 주간 <내일신문> 창간에 이어 2000년 일간지로 전환한 뒤 지금껏 무차입 흑자경영을 해와 ‘경영 귀재’로 불리운다. 그런데 비전공자가 쓴 이 역사서가 출간 두 달만에 4쇄를 찍을 정도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더 뜻밖이다.

  “1년 전만 해도 나 역시 이런 책을 쓰게 될 줄 상상도 못했어요.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대동단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달라는 뜻밖의 제안을 받고 처음엔 손사레를 쳤으니까요. 그런데 대동단 활동으로, 단일조직으로는 최다인 80여 명이 독립운동 서훈을 받았지만 정작 총재인 동농 김가진(1846~1922) 선생만 서거 100년이 되도록 서훈은 물론 유해조차 중국에서 귀국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했어요.”

  지난 8일 서울 신문로 내일신문사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언론인으로서 순수한 호기심에서 출발했다”고 말을 꺼냈다.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 회장 맡아
‘대동단 총재 김가진’ 펴내 뜻밖 반향
“25년간 7회 독립운동 서훈 무산 의아”
‘의병 탄압’ ‘친일 행적’ 등 낙인 재검증
퇴임 시점 등 기본 사실관계부터 ‘오류’
“친고종 개화파 외교관으로 재평가해야”
대한제국 고종 황제를 마지막까지 대변한 외교관 동농 김가진의 60살 때 대례복 차림. 그는 1919년 대신으로는 유일하게 망명해 상하이 임시정부 고문을 지내고 대동단을 창설했으나 지금껏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석탑출판 제공

  “1993년 주간 <내일신문> 창간할 때 큰 도움을 주신 임재경 선배로부터 지난해 대동단기념사업회장 제안을 받었어요. 2012년부터 3대 회장을 맡아왔는데, 고령으로 더는 힘에 부치시다며, ‘숙원 사업’ 해결을 간곡하게 부탁하셨어요.”

  그 숙원 사업은 바로 ‘동농의 독립운동 인정’이었다. 대동단기념사업회는 1929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동농의 손자인 김자동 회장을 중심으로 2004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임정기념사업회)에 앞서 2003년 창립했다. 이후 지금까지 25년간 7차례 동농의 독립운동가 서훈을 신청했지만 학계 일부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한 문재인 정부들어, 독립운동 평가의 폭을 크게 넓히도록 심사기준을 완화했지만 국가보훈처에서는 같은 결정만 반복해왔다.

  “우선 대한제국 대신 가운데 유일하게 망명해 임정 고문을 지낸 인물로만 알고 있던 동농 선생의 기록을 살펴봤어요. 그런데 서훈 반대의 근거로 거론된 행적들이 실제와 다르고 일부 오류도 있다는 사실을 승정원 일기 등 사료를 통해서 발견했어요. 그래서 확신감이 생겨 지난해 말 회장을 수락하고 본격적으로 출간작업에 나섰죠.”

  그가 말한 확신은 ‘외교관 출신 대동단 총재 동농 김가진, 친고종 개화파 외교관에서 독립운동가로’라는 책의 부제에 압축되어 있다. “동농은 19세기 후반 대한제국 관리로는 드물게 중국어·일어·영어까지 능통해 고종이 순국할 때까지 가장 신임하고 의지했던 ‘대변인’이었어요. 그래서 1919년 고종이 승하한 이후에야 망명을 결행하고 독립운동에 나선 것이죠.”
책에서 그는 동농에 대한 서훈 반대 이유들을 차례차례 재검증하고 반박의 근거들을 실증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서훈 반대의 첫번째 이유인 ‘충남관찰사 시절 의병 탄압’부터 사실과 달랐어요. 1907년 1월 홍주성 의병장 민종식을 평리원으로 압송했고, 그를 숨겨준 이남규와 성우영은 집으로 돌려보냈음을 상부에 보고했어요. 이어 4월 김가진은 중추원 찬의로 발령나고 5월에는 충남재판관에서도 퇴임해 지방관직에서 완전히 벗어났어요. 민중식은 그뒤 7월 유배형을 받았고, 9월 이남규 등이 순국했어요. 4개월의 시차가 있으니, 날짜같은 기본 사실관계조차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거죠.”

  두번째로 그는 ‘친일 행적’에 대해서 적극적인 반론을 펴고 있다. 가장 강력한 친일의 낙인인 ‘작위와 은사금 문제’부터 짚고 있다.

  “1910년 한일병탄 조약을 강제로 맺은 일제는 대한제국 관료 76명에게 일방적으로 작위를 줬어요. 동농도 남작 작위를 받았는데 반납하지 않았다는 것이 친일의 근거로 발목을 잡고 있죠. 그런데 그가 고종 황제의 뜻을 따르고 개인적인 입지보다는 ‘국익’을 우선해야 하는 외교관으로서 곧바로 거부하기 어려웠다고 판단할 수도 있어요. 무엇보다 그는 은사금을 받은 기록이 없어요. 대신 그 집안의 청지기가 가산을 몰래 빼돌리는 바람에 망명 직전엔 단칸방에서 살아야 했을 정도였더군요.”

  그는 책의 부록으로 동농 집안에서 청지기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기록도 찾아서 첨부해놓았다. 또한 이른바 ‘친일시’ 지적에 대해서도, 그는 시를 실었다는 사실만으로 ‘친일’ 평가를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1908년 5월 이토 히로부미의 67살 생일에 유림 어용단체가 발행하는 잡지에 김가진의 시 ‘이토에게-시중춘색창환수’가 실려 있어요. 그런데 1889년 이토가 쓴 시에 대한 화답이었어요. 그래서 두 시를 비교해보니 ‘총칼 안 쓰고 대화한다더니 거짓이었구려’라며 대한제국을 강제로 침탈한 식민지 권력자 이토를 조롱하는 내용이었어요.”

  마지막으로 그는 ‘복벽주의자’-‘사회주의자’라는 상반된 평가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점도 역사학계의 자료를 통해 지적한다. “대동단과 김가진이 의친왕 이강의 망명을 시도한 것이 복벽주의의 주근거인데, 3·1운동을 기점으로 민본주의에 눈을 떴을 뿐 아니라, 의친왕을 임시정부의 황제로 내세우려는 계획조차 없었어요. 1919년 9월 발표한 ‘대동단 2차 강령’에 처음으로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들어갔는데, 이는 왕정을 청산하는 ‘반(反)복벽’의 뚜렷한 선언으로 볼 수 있어요.”

  장 대표는 “서거 100주기인 내년에는 상하이 홍교로 만국공묘에 홀로 묻혀 있는 유해나마 당당히 모셔와야 할 것”이라며,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에 대한 재평가가 보훈당국은 물론 역사학계에서 전향적으로 이뤄지기를 기대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