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언문
열린마당
보도자료
제목 '친고종 개화파' 외교관 김가진 독립운동 재조명
글쓴이

조선민족대…

등록일 21-11-26 12:17 조회 2,213

대동단 총재 김가진

장명국 지음

석탑출판

 

조선민족대동단(이하 대동단) 총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을 지낸 동농 김가진(1846~1922)은 독립운동가인가 친일파인가. 그를 도와 대동단을 이끌었던 전협·최익환은 물론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장강일기』 저자) 등 대동단 관계자 83명이 이미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바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한 신규식, 동화약품 창업자이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 연통부 기지를 제공했던 민강, 불교계의 독립운동가인 백초월 스님도 포함돼 있다.

‘대동단의 상징’이라 할 수도 있는 김가진은 독립유공 서훈에서 25년째 제외되고 있다. 『대동단 총재 김가진』은 그 점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독립운동가로서의 김가진을 재조명한다.

 

이 책의 저자가 장명국 내일신문 발행인이라는 점이 우선 눈길을 끈다. 장명국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온 후 1970~80년대 노동운동을 하면서 노동법 강의와 저술로 이름을 알렸기 때문이다. 1993년 내일신문을 창간하며 언론 사업을 계속해오고 있는 장명국이 대동단 관련 책을 쓰고 김가진을 재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명국은 우연한 기회에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이 단체의 전임 회장인 임재경 전 한겨레신문 편집인이 그에게 회장을 제안 하면서 김가진의 서훈 문제를 부탁했다고 한다. 처음엔 완곡하게 거절했지만 “독립운동을 한 대동단 총재가 서훈을 못 받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어 회장직을 승낙했다”고 한다. 저자가 한국 근대사를 다시 되돌아보게 된 계기다.

 

김가진의 서훈이 안 되는 이유를 살펴보니, 김가진의 생애에 ‘복벽주의’와 ‘친일’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그 프레임의 허상을 벗겨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김가진이 대동단 총재로 추대된 것으로 대개 알려져 있는데, 저자의 조사에 따르면 대동단은 김가진이 주도적으로 만든 지하단체였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4세였고, 과거 급제를 거쳐 대한제국의 대신까지 역임한 그를 중심으로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였다고 한다.

저자는 대동단이 비밀 점조직 결사단체였던 점을 중시하면서 그 강령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대동단은 두 차례 강령을 발표했다. 1919년 5월에 나온 1차 강령의 키워드는 ‘독립’ ‘평화’ ‘자유’였다. 9월에 나온 2차 강령은 ‘독립’ ‘평화’ ‘사회주의’였다. ‘자유’ 대신 ‘사회주의’로 강령이 바뀌었다. 이런 대동단의 강령에 대해 저자는 “자유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라고 규정했다.

 

김가진은 대한제국 대신을 지낸 고위 관료로는 드물게 중국어·일본어·영어에 능숙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 천진 주재 종사관을 거쳐 주일 공사를 4년 동안 지낸 외교관이었다.

복벽주의는 과거의 왕정(王政)을 회복하려는 사상을 가리킨다. 고종의 충신이면서 개화파였던 김가진을 저자는 ‘친(親)고종 개화파’ 외교관으로 명명하면서 “사회주의는 복벽주의와 너무 거리가 먼 관념”이라고 주장했다. 대동단이 의친왕 이강의 망명을 시도한 일로 복벽주의라고 오해를 받는 점에 대해, 이는 복벽주의가 아니라 고종이 나라를 합법적으로 이양했다고 선전하는 일제의 침략 논리를 깨부술 호재로 의친왕의 망명을 추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저자는 김가진의 독립운동을 입증하는 자료를 발굴하기도 했다. 을사늑약 이후 김가진이 ‘대한협회’ 회장을 지내던 1909년 6월 일본 잡지 ‘신공론’에 일본 침략을 규탄했던 기고문을 공개했다. 대한협회 회장 당시 부회장은 오세창이었고, 안창호·신규식·조완규 등이 평의원으로 함께 활동했는데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중요 인사가 되는 이들이다. 또 대동단 총재 때 일본 조선주차군 참모부가 일본 육군대신에게 보낸 기밀 문서에 김가진이 요주의 인물로 보고되는 기록도 공개했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과 청산리 전투를 이끈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고문으로 김가진이 추대될 수 있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김가진이 일제의 남작 작위를 받은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는 대한제국 대신을 지낸 이들에게 일제가 일방적으로 준 것이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김가진이 일제의 은사금을 받지 않았고, 고종에게 하사받은 청운동 일대의 땅 1만평을 1916년 일제에 빼앗겨 체부동에서 셋방살이를 하다가 1919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한시를 써준 일도 있는데, 고종의 가장 중요한 ‘대일 창구’였던 그의 외교 활동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1906년 충청남도 관찰사로 파견됐을 때 홍성 지역 의병을 진압했다는 비판도 그에게 따라 다닌다. 특히 이남규 의병장 부자의 순국에 관여했는지 여부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이와 관련 저자는 당시 의병 진압은 관군이 아니라 일본군에 의해 자행되었고, 『승정원일기』를 보면 김가진은 두 분이 순국하기 넉 달 전에 충남관찰사에서 해임되었다고 주장했다.

2022년은 김가진이 상하이 대한민국임정에서 타계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의 독립운동이 재평가되는 100주년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중앙선데이 배영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