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후 오늘, 그날의 현장
![[신년기획]다·만·세 100년,1919. 2. 8…일제의 심장에서 독립을 외치다](http://img.khan.co.kr/news/2019/02/08/l_2019020801000409500033841.jpg)
100년 전 오늘, 나라를 되찾으려는 청년들의 비분강개한 결의에 감동한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렸다. 적국의 심장부, 도쿄(東京)의 하늘에 함박눈은 흔치 않았다고 했다. 조선 유학생 600여명이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였다. 오후 2시 학우회 백남규 회장이 유학생대회 개회를 선언했다.
사회를 맡은 최팔용은 오늘의 모임을 조선청년독립단 대회라고 밝혔다. 백관수가 단상에 올라 문서를 펼쳤다. 11명의 조선청년독립단원이 서명한 2·8 독립선언서였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만국 앞에 독립됨을 선언하노라!” 선언 낭독 후 김도연이 결의문을 읽었다.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100년 전 2·8 독립선언식이 열린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 모습. 다른 건물이 들어선 그 자리를 배경으로 당시 독립선언을 주도한 조선인 유학생들의 기념사진을 놓고 사진을 찍었다(위 사진). 도쿄 | 김창길 기자
“앞의 모든 항목의 요구가 실패될 때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해 영원한 혈전을 선언한다. 이것으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우리 민족이 그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
조선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이 대회장에 들이닥쳤다. 유학생들과 경찰의 난투극이 벌어졌고, 주동자 27명이 연행됐다. 청년독립단 지도부가 검속됐지만 적국 심장부에서 외친 독립선언의 메아리는 조선 땅까지 울려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표지석도 없는 항일투쟁의 그 자리…그래도 역사는 살아있다 조선에서 3·1운동이 횃불처럼 번지자 도쿄에서도 애국지사들의 반일활동이 이어졌다. 의거 현장의 현재 모습에 당시 애국지사들의 사진을 놓고 찍었다. 1924년 1월5일 김지섭 의사가 폭탄 3개를 던진 일본 왕궁인 ‘고쿄’ 입구 니주바시 다리, 1921년 2월16일 양근환 의사가 친일파 민경식을 처단한 도쿄역 호텔, 1932년 1월8일 이봉창 의사가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진 고쿄 남쪽 사쿠라다문(왼쪽부터). 도쿄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글로, 토론으로, 폭탄으로…‘3·1운동’ 디딤돌 된 조선청년독립단
일제의 심장에서 ‘조선 독립’을 외치다
2·8 독립선언을 기념하는 비석은 반세기가 훌쩍 지난 1982년 재일본한국YMCA회관 입구에 세워졌다. 하지만 독립선언식이 거행된 곳은 기념비가 세워진 장소와 다르다. 일제강점기의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은 현재의 회관 서쪽으로 600여m 떨어진 곳, 일본 왕궁인 ‘고쿄(皇居)’와 지척 거리에 있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됐다. 고쿄에서 북쪽으로 15분을 걸어 기독교청년회관 터를 찾았다. 허망했다. 몇 번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2·8 독립선언을 기리는 작은 표지판 하나 없었다. 단지 빌딩 숲의 뒷골목일 뿐이었다. 골목의 두꺼운 아스팔트와 빌딩 외벽은 100년 전 독립의 함성을 봉인하고 있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독립선언식 나흘 후인 12일 100여명의 유학생들이 히비야 공원에 집결했다. 이달 등 새로운 독립단 실행위원을 선출한 유학생들은 이곳에서 조선 독립을 외쳤다. 외침을 들은 것은 일왕이 아니라 경찰이었다. 급파된 일경은 13명의 학생들을 구속하고 집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24일에도 150여명의 유학생들이 히비야 공원에 모여 민족대회 소집 촉진부 취지서를 배포했다. 경찰은 이날도 16명의 학생들을 끌고 갔다. 히비야 공원 서쪽으로는 최고재판소, 법무성, 국회, 도쿄경시청 등 일본 정부 청사들이 포진해 있다. 가히 적진의 심장이라 할 만한 위치인데, 조선 유학생들의 기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재일 한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거사가 아니었다. 1912년 결성된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유학생들은 조국 독립의 뜻을 모으고 있었다. 학우회는 1914년부터 잡지 ‘학지광’을 발간해 서구 문명과 사상들을 소개하며 민족의식과 역량 강화를 도모했다. 신년회, 신입생 환영회 등 크고 작은 학우회의 모임은 조선 독립을 위한 웅변대회가 됐다. 1915년 졸업생 축하회에 참석한 메이지(明治)대학 이경준은 학우들에게 말했다. “제군들은 장래에 반드시 펜 대신 칼을 들고 귀향할 것을 원한다. 즉 적을 격퇴할 펜을 가질 것을 희망한다.” 191 8년 4월에 열린 학우회 운동회에서 유학생들은 한반도 지도를 그린 후 ‘단군의 소유’라고 썼다.
나라를 빼앗긴 유학생들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민감했다. 1917년 러시아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고, 이듬해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됐다. 승전국들은 파리 강화회의를 개최했고, 미국 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했다. ‘민족자결’, 비록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학생들은 조선 독립을 위한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1919년 1월6일 학우회는 도쿄 유학생들의 사랑방인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웅변대회를 열었다. 연사로 나선 윤창석, 이종근, 박정식 등은 당시 정세가 조선독립운동의 적합한 시기라며 밤늦게까지 열변을 토했다. 토론은 결실을 맺었다. 독립운동을 위한 임시실행위원 10명이 선출됐다. 최팔용, 서춘 등 10명의 학우 중 전영택이 병으로 사임하고, 이광수와 김철수가 추가돼 11명의 실행위원으로 조직된 조선청년독립단이 결성됐다.

1919년 2월8일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발표한 독립선언서 마지막 장. 조선청년독립단원 11명의 서명이 들어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독립선언문의 초안은 이광수가 작성했다. 송계백은 1월 말 헝겊에 적은 독립선언서를 품에 안고 서울에 도착해 도쿄의 독립운동 계획을 전달했다. 이광수는 2월 초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영국·미국·프랑스에 조선의 독립선언을 타전하고, ‘차이나 프레스’와 ‘노스차이나 데일리 뉴스’에 도쿄의 독립운동 기사를 배포했다. 2·8 독립선언 당일 오전 10시 독립단원들은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과 일본 국회의원, 조선총독부와 일본 언론에 우편으로 발송했다. 필사한 독립선언서 10여장을 기모노 오비(허리띠) 속에 숨겨 넣은 김마리아는 현해탄을 건너 15일 부산에 도착해 3·1운동 준비에 착수했다.
조선 땅에서 3·1운동이 횃불처럼 번지자 도쿄의 유학생들도 반일활동을 이어갔다. 3월9일 조선청년독립단은 본국의 독립운동에 합류하기 위한 휴학을 촉구하는 동맹휴학 촉진부 격문을 띄웠다. 일본 경찰 기록에 따르면 359명의 유학생이 귀국했다. 조선고학생동우회 서상한은 1920년 일제 수뇌부 암살을 계획했다. 4월29일 예정된 영친왕 이은과 일본 왕족 이본궁 방자의 결혼식에 참여한다는 총독부 고관들과 친일파 이완용을 향해 폭탄을 던지려고 결심했던 것. 하지만 서상한의 거사는 밀정의 신고로 수포로 돌아갔다.
일왕을 향한 대담한 거사가 실행됐다. 도쿄로 잠입한 의열단원 김지섭은 1924년 1월5일 고쿄 입구인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 3개를 던졌다. 하지만 습기를 먹은 폭탄은 불발됐다. 1932년 1월8일 한인애국단 이봉창도 고쿄의 남쪽 입구 사쿠라다문 앞에서 일왕을 기다렸다. 신년 관병식 참관을 마친 일왕 히로히토를 태운 마차가 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봉창은 지금의 경시청 앞 대로로 추정되는 곳에 폭탄을 던졌다. 불발은 아니었지만 궁내대신의 마차가 전복됐다. 고쿄 동쪽에 마주한 도쿄역 호텔은 양근환 의사의 거사가 성공한 곳이다. 1921년 2월16일 양근환 의사는 호텔에 머물고 있던 친일파 단체 국민협회장 민병식을 칼로 처단했다.
100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의 몸과 마음으로 반추하기에는 너무 아득했다. 하지만 집단의 기억은 다를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기념비를 세우고 표지석을 꽂는 것은 집단의 기억에 쐐기를 박는 일이 아닐까? 아쉽게도 일본의 심장부에는 항일 투쟁의 쐐기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만 젊었던 애국지사들의 사진으로 한 세기 전의 기억들을 이곳에서 붙잡아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