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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919 한겨레] 재동경 조선 유학생들, ‘조선청년독립단’ 결성-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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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대…

등록일 19-01-09 09:24 조회 348
[기미년 통신] 개시 ① 동경의 밤

6·7일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 수백명 회합

“목숨걸고 싸우리라” 열띤 웅변…남녀 없이 만장일치





<편집자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숨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임자년(1912) 결성된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학생들은 매년 운동회와 웅변대회 등 각종 행사에서 친목을 도모하며 민족의 장래를 토론해왔다. 사진은 정사년(1917) 학우회 춘계 운동회 모습. 독립기념관

[1919년 1월8일 동경/엄지원 기자]

매서운 관동 바람이 동경 시가를 휩쓰는 혹한에도 매화는 핀다. 왜경의 삼엄한 감시 속에 조선인 유학생들이 동경 한복판에서 독립운동 시위를 준비한다는 아연할 소식이 본사에 입수돼 연초부터 기자는 긴급히 동경을 찾았다. 수백명의 재동경 조선 유학생들은 연말연시 격렬하게 시국 문제를 논의한 끝에 총 11명의 ‘조선청년독립단’을 선출했는데, 향후엔 이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시위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우리 민족은 반드시 자주 독립을 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숭고한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우리 젊은 학생들이 앞장서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오!” 지난 6일 동경 신전구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는 열띤 웅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청산(아오야마)학원의 윤창석(30)씨, 동경고등사범학교의 서춘(25)씨 등이 번갈아 변사로 연단에 서서 독립의 주장을 토해냈다. 이날의 행사는 ‘웅변대회’로 포장됐지만 기실 독립운동 전략회의였다. 연사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이어질 때마다 수백명 청년들은 흥분의 박수를 쏟아냈다.

독립의 투지가 남학생들만의 것일 리 만무하다. 이번 웅변대회에는 동경여자유학생회를 이끄는 김마리아(27·동경여자학원)씨와 황에스터(27·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씨 등 여학생 여섯명도 참석해 머리를 맞대었다. 황씨 등은 특히 남학생들이 발언을 독차지하자 “남녀는 두 개의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므로 여성도 독립운동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며 연설에 나서 과연 ‘신여성’의 면모를 과시했다.

재일 유학생들이 금번에 이토록 과감하게 시국 토론에 착수한 것은 18일부터 개막되는 파리강화회의에 우리 대표들이 참석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까닭이다. 세계대전 뒤 약소국가들의 독립 문제를 논하는 이 국제회의에 미국 한인 가운데 이승만(44) 박사 등이 민족대표로 참가한다는 소식이 여러 경로를 통해 국내외에 타전됐다. 이에 유학생들 사이에선 “우리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이때에 민족적 의사 표시가 없으면 미주에서 파견하는 우리 대표의 제소는 일찍이 왜적의 통치를 받아보지 못한 불평파 해외망명객들의 잠꼬대라고 세계가 알 것”이라는 정세적 판단이 공유돼온 터다. 경술년(1910) 국망 이후 9년, 오매불망 독립의 기회를 기다려온 조선 유학생들은 드디어 행동을 실천에 옮기기를 각오하며 소바집에서나, 공원에서나, 하숙방에서나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모의하게 된 것이다.

“제군들, 이 자리에서 독립운동 방안을 결정지읍시다.” “급히 서두르면 될 일도 아니될 것이오!” 독립을 기도하는 마음은 매한가지나 생각해온 방략은 제각기라 이날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인 재동경 조선유학생들은 진중론과 속도론으로 나뉘어 자정을 넘기도록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이때 경응대(게이오대)에 재학중인 김도연(25)씨가 나서서 진척 없는 토론을 잘랐다. “이처럼 왈가왈부만 하다가는 끝이 없겠소. 우선 대표를 뽑아 모든 문제를 대표들에게 일임하고 일단 해산하는 것이 어떻겠소?” 김씨의 의견에 참석자들 대부분이 찬성했다. 학생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10명의 대표위원이 그 자리에서 선출됐다. 대개가 웅변대회와 학우회 기관지에서 언변을 인정받아온 이들인 한편, 일제가 ‘요시찰인’으로 지목해 일거일동을 주목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면면은 다음과 같다.



최팔용(28·조도전대), 송계백(24·조도전대), 김상덕(28·조도전대), 백관수(30·명치대), 김도연(25·경응대), 전영택(25·청산학원), 윤창석(30·청산학원), 서춘(25·동경고등사범학교), 최근우(22·동경상과대), 이종근(24·동양대)

회합은 이튿날인 7일 오후 1시 같은 곳에서 이어졌다. 대표위원 10명은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독립선언서 발표와 송부를 발표했다. 선언서와 결의문을 작성한 뒤 이를 일본 정부와 각국 대사관 및 공사관, 일본 양원의 의원들에게 송부하자는 것이었다. 이날 회의에는 재동경 조선유학생 700여명 중 400명 정도가 모여들어 독립운동에 대한 유학생들의 뜨거운 관심을 증명했다. 특히 독립운동 방식을 발표하고 결의하던 중 분위기가 과열되어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고 오열할 적에 왜경이 들이닥쳐 대표위원들을 포함한 주동자 20여명을 연행하여 갔다. 현장에 있었던 명치대(메이지대) 유학생 양주흡(22)씨는 “(학생들이) 만장일치로 눈물을 흘리면서 절규할 때에 순사들이 이를 알았다. 총대(대표)로서 20명 정도가 경시청에 갔으나 내용은 알 수가 없다”고 전했다.

다행히 일제 경찰들은 ‘조롱 비소’(비웃음)하고 학생 대표들을 석방했다. 다만 8일의 회합은 일경의 제지로 강제해산됐다. 학생들은 다음을 기약할 수 없게 됐다. 그사이 학생 대표 중 한 명인 전영택씨는 신병을 이유로 사퇴했는데, 조도전대(와세다대)의 이광수(27)씨와 경응대생 김철수(26)씨가 그의 부재를 메워 총 11명의 ‘조선청년독립단’이 비로소 발족했다.

새롭게 합류한 이씨는 이른 나이에 이미 동경과 경성에서 두루 ‘천재’로 불리는 인물인데, 그는 지난 연말부터 조도전대 동문인 최팔용씨와 독립운동의 모의를 진지하게 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는 겨울방학을 이용해 중국을 여행하던 중 파리강화회의 소식 등을 듣고 급히 경성을 경유하여 동경에 돌아왔다고 한다. 이씨는 중국과 경성에서 전해들은 동경 밖의 독립운동 분위기를 유학생들에게도 전달했다. 나중에 ‘천황의 신민’을 자처하며 일제의 앞잡이가 되는 그이지만 상해와 동경, 경성을 잇는 이 청년 지식인은 앞으로 기미년(1919)의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누구보다 발빠르게 조선의 독립운동을 끌어가게 된다



△참고문헌

-김인덕, ‘일본지역 유학생의 2·8운동과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1999)

-백관수, ‘2·8독립선언약사’, <동아일보>(1958.2.8~2.9)

-김도연, <나의 인생백서>, (삼성문화사·1965)

-김마리아 신문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4>(국사편찬위원회)

-양주흡 일기,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3>(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