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언문
열린마당
보도자료
제목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27)한국 정치 ‘흑역사’의 기원-경향신문
글쓴이

조선민족대…

등록일 18-10-13 01:21 조회 217

공권력 테러·극우단체 득세 등 미군정기 형성된 정치 병폐들…70년 넘는 세월 동안 ‘도돌이표’

미군정이 해체된 이후에도 공권력의 테러와 극우단체의 득세 등 한국 정치의 병폐는 그 모습을 바꾸어가며 지금까지 계속되어왔다. ‘사법살인’에 희생된 진보 정치인 조봉암, 5·18 민주화운동에서 희생당한 시민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기각을 요구하는 보수 단체 회원들(왼쪽부터).

미군정이 해체된 이후에도 공권력의 테러와 극우단체의 득세 등 한국 정치의 병폐는 그 모습을 바꾸어가며 지금까지 계속되어왔다. ‘사법살인’에 희생된 진보 정치인 조봉암, 5·18 민주화운동에서 희생당한 시민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기각을 요구하는 보수 단체 회원들(왼쪽부터).

“한·미관계는 평온했던 적이 없었다. 사실, 강한 의견의 불일치나 양자에게 중요한 문제에 대한 상호 간의 의심이 과거 20년간 한·미관계의 주요한 면모였다. 이승만은 격렬하게 휴전협정을 반대했고,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계속해서 싸우기를 원했다. 우리는 그가 공공연히 주장한 북진정책에 대해 두려워했으며, 반대했다. 서울에 있는 우리 대사관은 처음에는 박 장군이 일으킨 1960년(1961년의 오기: 필자)의 쿠데타를 반대했으며, 1963년에는 박이 선거를 갖도록 하기 위해 최고의 압력을 넣었다. 푸에블로호의 피랍과 청와대 습격에 대한 우리의 대응의 차이는 박을 격노케 하였다.”(미 국무부 브리핑 비망록 ‘하비브의 편지’, 1972년 5월26일자)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27)한국 정치 ‘흑역사’의 기원

하지와 버치의 예상은 적중했다. 미군정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막지 못했다. 미국의 대한정책은 번번이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과 미국은 동맹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다. 둘 사이의 불신은 60년이 넘는 동맹 기간 동안 서로가 상대방을 의심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었던 1952년과 1953년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제거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한반도에 왔는데, 한국 정부가 민주적 정부가 아니었다는 사실(1952년), 그리고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 신임 미국 대통령의 약속이었는데, 이에 반대하여 한국의 대통령이 반공포로석방을 단행한 것(1953년)은 미국 행정부를 실망시킨 결정적 장면이었다. 위의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 편지에서 ‘편안한 날이 없었던 한·미관계’의 첫 번째 사례가 바로 이승만과의 갈등 문제였다. 

이승만 대통령 제거계획은 모두 실행되지 못했다. 전쟁 중에 정권을 교체한다는 것, 그것도 내부의 민주주의적 절차가 아닌 외부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교체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전쟁 중 국내 질서가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가도 의문이었지만, 세계 여론의 눈도 신경을 써야 했다.

더 중요한 점은 이승만을 대체할 수 있는 지도자가 있는가의 문제였다. 1952년과 1953년의 시점에서 이승만과 경쟁할 수 있는 지도자가 없었다. 김규식은 1950년 인천상륙작전 직후 북한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납북되었다. 주미 한국대사를 지낸 장면은 합리적이었고 가톨릭 신자였지만,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아니었다. 한국민주당과 손을 잡은 신익희는 아직 대중적 인지도가 낮았다.

1950년 시점에서 버치에 의하면 이승만을 대신할 수 있는 지도자로는 신익희와 조소앙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의 지지를 받는 새로운 지도자로서 조봉암도 가능성이 있었다. (1950년 10월9일자 ‘Foreign Policy Affairs’ 기고문. 버치문서 박스 3) 실제로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은 이승만의 유일한 경쟁자가 되었다. 조봉암은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고, 인지도나 정치 경험 면에서 다른 정치인들보다 위에 있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로서의 그의 경력이 문제가 되었다.

이승만 집권 기반인 기득권 세력 
4·19혁명으로 바꾸기엔 역부족
5·16 쿠데타 일으킨 군인들도 
결국은 새로운 기득권층에 안주

결국 이승만은 1960년 국민들에 의해 경무대로부터 쫓겨날 때까지 집권하였다. 4·19혁명 이후 민주당이 잠시 집권하였지만, 짧은 기간 동안 미군정기에 형성되고 한국전쟁을 통해 강화된 경찰, 청년단, 친일지주 중심의 기득권 세력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5·16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은 불법적으로 정권을 탈취했지만,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보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 시기 비주류였던 쿠데타 주체세력들은 민주공화당 창당과정에서 김종필을 중심으로 지방에서 새로운 인물들을 선택하고자 했다. 부산·경남지역에서 발탁된 예춘호는 그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 

이들의 꿈은 1969년 삼선개헌을 통해 물거품이 되기 시작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는 새로운 정치를 만들기보다는 새로운 기득권층이 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줄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옹호했다. 민주공화당에 합류한 신진 세력은 삼선개헌에 반대했고, 결국 탈당했다. 예춘호도 탈당했다. 민주공화당은 다시 구태의 기득권 세력, 그리고 8·3조치를 통해 구제해 준 대기업과 손을 잡았다. 

구태의 기득권 세력은 민주화 이후에도 생존했다.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어야 했건만, 민주화는 역풍을 맞았다. 기득권을 옹호하는 언론과 재벌은 ‘이승만과 나라세우기’를 시작했고, 민주화 이후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이승만과 박정희를 ‘건국’과 ‘산업화’라는 슬로건하에서 영웅적 지도자로 치켜세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국현대사를 ‘건국→산업화→민주화→>선진화’라는 구도로 정식화하고, 각각의 단계에 필요한 지도자들이 시대 과제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하면서 과오를 덮었다.

2000년대 들어 ‘과거사’를 바로잡기 위한 움직임이 정부로부터 시작되었다. 오랜 정치활동에도 야당에서조차 주류가 되지 못했던 김대중이나 노무현은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방을 장악해 온 기득권 세력을 바꾸고자 했다. 그러나 그 노력 역시 역풍을 맞았다. 김대중 정부는 기득권 세력 없이 정권을 수립하고 유지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고, 노무현 정부는 기득권 세력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을 만들지 못했다. 결국 ‘주류 교체’ 프로젝트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구태 뒷받침한 수단인 가짜뉴스 
한국현대사의 전 과정서 계속돼
보수로 탈바꿈한 반개혁세력 
남한에서 주류 기득권을 차지

이렇게 미군정기에 형성된 구태 정치의 원형은 유지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태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가짜뉴스’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안이 미국이 아닌 소련이 주도한 신탁통치안으로 알려졌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1946년 말 이승만이 미국을 갔을 때 가짜뉴스는 가장 많이 판을 쳤다. 1947년 초 버치 문서에는 가짜뉴스와 관련된 내용이 많았다. ‘미국이 한국에 대규모 원조를 하기로 했는데, 이는 이승만의 공이다.’ ‘이승만이 귀국하면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아 대통령이 될 것이다.’ 버치는 가짜뉴스에 분노했지만, 그 뉴스는 이미 빠르게 대중들 사이에 퍼졌다.

한국현대사의 전 과정에서 가짜뉴스는 계속되어 왔다. 뉴스를 만들어내거나, 아니면 있는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 방식이다. 가짜뉴스가 심각한 점은 이를 통해 기득권 세력들이 원하는 방향의 정치구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정치구도는 개혁과 반개혁의 구도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기득권 언론들은 이러한 정치구도를 왜곡했다. 개혁과 반개혁이 아니라 진보/보수, 좌/우 대립구도가 된 것이다. 이런 구도 속에서 반개혁 세력은 청산대상이 아니라 보수와 우익이라는 모습으로 그 힘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해방정국의 모습이 이러한 정치구도 왜곡의 원형을 보여준다. 해방 후 한국 사회는 독립과 친일의 구도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신탁통치안으로 왜곡한 가짜뉴스들은 이 구도를 좌우 간의 대립구도로 만들었다. 

합리적 정치인에 대한 테러는 
수많은 ‘사법살인’으로 반복
서북청년단은 극우단체들이 
친일지주 자리는 재벌이 차지

이 과정에서 합리적인 정치인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가장 합리적인 정치인이었던 김규식과 여운형이 정치로부터 멀어져가는 과정은 한국현대사의 어느 시대에나 비슷하게 나타났다. 미군정이 해체된 이후 김구가 암살되었다. 이승만을 가장 위협했던 조봉암은 ‘사법살인’이라는 테러를 당했다. 독재정부를 비판했던 지식인들은 투옥되었고, 사형당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도 공산주의자들을 감옥에서 고문으로 죽일지언정 사형을 선고한 적이 없었건만, 대한민국 정부하에서는 수많은 ‘사법살인’이 발생했다. 

그래도 1948년 이후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하면서 테러가 없어진 것 아닌가? 청년단이 없어진 것 아닌가? 농지개혁을 통해 친일지주들도 없어지지 않았는가? 아니다.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바꾸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서북청년단 대신 수많은 극우단체들이 나타났다. 그 많은 극우단체들은 독재 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전경련의 지원을 받았다. 가스통을 들고 시위에 나서는 사람들. 촛불을 든 평화적 시위를 위협하고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 이들 모두 미군정기 청년단의 모습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친일지주는 없어졌다. 그 자리에 대기업이 자리했고, 이들은 재벌로 성장했다. 그들은 정치가, 관료와의 결탁을 통해서 불공정한 경쟁을 통해 한국 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재벌은 공정경쟁이라는 자본주의 시장의 기본 원칙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들은 부동산으로 기업의 부를 늘려갔다. 1969년 부실기업 위기, 1980년 경제위기의 주요한 원인의 하나가 대기업과 재벌의 부동산투기였다. 전근대적 지주의 행태와 다른 것이 없었다. 

버치 문서, 미군정기 실패와 함께 
한국 사회 좌절의 역사 보여줘
한반도의 중대한 전환점에서 
소중한 기회 상실, 다시는 안돼

버치가 손으로 쓴 명함.

버치가 손으로 쓴 명함.

버치의 보고서를 분석하고 정리한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미군정기의 상황을 보다 실증적이고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현재 한국정치에서 나타나는 폐단의 기원을 찾는 것이었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그 기원은 하나같이 미군정기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왜 70년이 넘도록 이러한 현상은 고쳐지지 않은 것일까? 그 당시와 지금의 한국 상황을 동일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군정기에 형성된 한국 정치의 병폐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왜 그런가? 이는 무엇보다도 기득권 주류 세력이 갖고 있는 힘을 대체할 수 있는, 그리고 정상적 자본주의 사회를 이끌 건전한 세력이 나타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가 얘기하는 이성적 비판지성으로서의 공론장, 즉 시민 사회가 성장했지만 시민 사회는 물적 토대를 갖고 있지 못하다.

한국 사회는 네 번에 걸쳐 주류 교체를 시도해왔다. 세계 어떤 나라의 현대사에서도 없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시민사회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자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시민 사회가 시도하는 개혁은 사상누각에 불과할 것이다. 2017년 이전 세 차례의 극적인 변화, 즉 4·19 혁명,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그리고 6월항쟁이 사회 개혁의 흐름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좌절을 겪어야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버치 문서는 미군정기의 실패와 함께 한국 사회가 겪었던 좌절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곧 해방과 독립이라는 너무나 소중한 기회를 상실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기회의 상실은 곧 전쟁이라는 위기로 다가왔으며, 또다시 그런 경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의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는 오늘, 버치 문서를 통해 보는 미군정기 한국 사회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더 소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북핵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이는 곧 위기로 전환될 것이다. 

1978년에 찍은 버치 부인(오른쪽)의 사진. 왼쪽은 딸로 보이며, 버치 문서를 하버드대에 기증한 가족의 일원인 것 같다.

1978년에 찍은 버치 부인(오른쪽)의 사진. 왼쪽은 딸로 보이며, 버치 문서를 하버드대에 기증한 가족의 일원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버치 문서가 하버드대에 기증될 수 있도록 그의 가족들을 만났고, 기증된 문서를 처음으로 접할 수 있도록 허가해주신 하버드대의 에컬트 교수님, 희귀문서 사고에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일정을 도와주신 옌칭도서관의 강미경 선생님, 문서를 읽고 스캔하는 과정을 도와준 아내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아울러 이러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연구년을 허가해주신 학교 당국과 국제대학원 교수님들, 그리고 이렇게 재미없고 긴 글의 연재를 허가해주신 경향신문께도 감사드린다.

<시리즈 끝>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