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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26)버치의 통치과정 평가-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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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대…

등록일 18-10-13 01:17 조회 205

미군정 실패는 한국상황 외면한 정책 오판·우익의 비협조가 원인

미군정 요원이던 버치는 중위라는 낮은 계급에도 불구, 한국 현대 정치사에 영향을 미쳤다. 사진은 서울 신당동의 집에서 세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버치의 모습이다.

미군정 요원이던 버치는 중위라는 낮은 계급에도 불구, 한국 현대 정치사에 영향을 미쳤다. 사진은 서울 신당동의 집에서 세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버치의 모습이다.

“우리는 긴급하게 왔다. 일본으로 가는 것과 상해에 해군을 보내는 것이 무엇보다 급한 일이었다. 그로 인해 1945년 12월까지 충분한 군인이 주둔하지 못했고, 그것이 중요한 장애가 되었다. (중략) 훈련받은 미군들이 많지 않았다. 전투병과의 군인들이 군정청의 핵심적 지위에서 일해야 했다.”(1947년 7월23일 하지 사령관의 기자회견, 버치문서 박스 5)

미 본국서 충분한 지원 못 받아 
군정청, 정책 추진 어려움 겪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인가? 미군정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자리에서 하지는 미군정이 시작부터 많은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실이었다. 한반도 전체를 통치하기에는 미군의 수가 모자랐다. 1946년 1월 주한 미군정청이 설치됐고, 각 도에 군정단이 파견됐다. 군정단 아래에 군정중대를 둬 시, 군에 파견했다. 군정단은 대체로 장교 13명·사병 26명, 군정중대는 장교 12명·사병 60명으로 구성됐다. 이 정도 숫자로 도와 시·군을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26)버치의 통치과정 평가

또 본국에서의 재정지원이 충분하지 않아 조선은행권을 계속 발행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일본인들은 미군 도착 전에 금과 물자를 이미 외부로 옮겨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문제는 미군정 측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 사령관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인들의 태도도 문제였다. “한국인들은 (카이로선언에서 언급한) ‘적절한 시기’를 ‘며칠 내’로 해석했다. 우리는 어떠한 사고도 없이 18만6000명의 일본군을 6주 안에 나가게 했다. 그 후 50만명의 일본 민간인이 떠났고, 이후 더 많은 일본인이 북으로부터 내려왔다. 가능하면 일본인 기술자들을 한국에 머물도록 하려 했지만, 한국인들은 그들과 일하지 않으려고 했다. (중략) 신탁통치는 ‘과거 적국의 영토’에서 실시된다는 것인데, 한국인들은 스스로 ‘과거 적국의 영토’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중략) 한국인들은 ‘최대 5년간의 신탁을 위한 준비과정’이라는 (3상회의 결정에서의) 용어를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 

한국인들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언급돼 있는 신탁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우익들은 ‘신탁통치가 한국인들이 스스로 통치하는 시대가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었고, ‘남한에서 분리된 정부를 세우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의 경우 “그가 처음 왔을 때 통합을 위한 구심점이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다”. 이승만은 미군정이 남한을 그에게 넘기지 않는 것에 화가 났으며, ‘그는 매우 독재적이며, 참을성이 없다’. 또한 통치를 위해서는 전문인력들이 필요한데 모든 일본인을 본국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외부 귀환·월남 275만명 달해 
한국 사회 질서·위생문제 악화

하지에 의하면 이러한 한국인들의 태도는 미국과 미군정의 정책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외부로부터 귀환한 175만명과 북으로부터 월남한 100만명은 한국 사회의 질서와 위생문제를 더 어렵게 했다. 치안을 위해 필요했던 경찰도 문제였다. “우리에게는 경험자가 필요했는데, 그들은 일본인 아래에서 교육받은 경찰들이었다. 깨끗한 기록을 갖고 있는 사람만 남기고자 했는데, 그들의 수는 200명밖에 되지 않는다. (중략) 아시아의 경찰들은 나쁜 짓을 서슴지 않고 해왔다.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식민지 시기의) 예전 한국의 경찰은 최악이었다.” 이상과 같은 1947년 7월에 있었던 하지의 인터뷰는 미군정의 정책이 왜 실패했는가를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치안 위해 필요한 경찰 인력도 
일제 때 근무한 자들로 채워져

버치 역시 이러한 생각에 공감하고 있었다. 한국을 떠난 직후 쓴 글에서 그는 특히 미군정의 정책에 대해 비판했다. 즉 친일파를 기용한 미국의 정책, 미군정 요원들의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대한 잘못된 태도 등은 미군정이 실패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됐다고 판단했다.

판사 임용과 관련된 버치의 메모. 김병로는 되는데, 김용무는 안된다는 내용이 주목된다.

판사 임용과 관련된 버치의 메모. 김병로는 되는데, 김용무는 안된다는 내용이 주목된다.

“(미군정의 실패로) 한국인들은 오히려 일제강점기에 대한 향수를 느끼기까지 했다. (중략)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성공적이었다. 우리는 진정한 한국의 독립을 원했고, 러시아는 한국을 흡수하고자 했다. 우리는 많은 돈을 투자했고, 러시아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한국에서의 점령 태도’, 1948년 11월3일자, 버치문서 박스 3)

그럼에도 불구, 대한민국 정부의 관할권을 1948년 5월10일 총선이 실시된 지역에 한정한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평가했다. 

“(38선 이북으로 북진한 이후) 새로운 처방을 위해 가장 중요한 점은 1948년 유엔위원단의 권고에서 나타나듯 새로운 남쪽의 정부를 지리적으로 그 정도까지만 한정했다는 것이며, 이것은 국가의 재통합이 허용되는 상황이 왔을 때 더 혁신적 해결책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됐다.”(버치의 ‘Foreign Policy Affairs’ 기고문, 1950년 9월29일자, 버치문서 박스 3)

책임은 러시아에도 있었다. 미군정의 입장에서 볼 때 러시아는 협상을 할 의지가 없었다.

“우리가 러시아인들과 합의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항복하는 것이었다. (중략) 그들은 북쪽에서 자신들의 통제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지역에서 최대한 많은 문제를 만들어낼 것이고, 그때까지 미소공동위원회를 이용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워싱턴은 이러한 러시아의 입장에 대한 미군정 측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 행정부가 순진했다고 할 수 있다.”(버치의 1973년 12월3일자 편지, 버치문서 박스 3)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미군정의 실패 요인을 쌀 수집에서 찾았다. 그에 의하면 쌀 수집은 한국 사회에서 미국의 인기를 하루아침에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도록 만들었다.

‘신탁 거부’ 한국인들 태도에다 
러시아 방해 겹쳐 결국 궁지에

전체적으로 버치가 소장한 문서들과 한국을 떠난 이후 작성한 편지들을 보면, 미 본국의 소극적 지원과 한국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미군정의 정책, 한국인들의 태도, 특히 미국을 지지할 것으로 예상했던 보수 우익 정치인들의 비협조, 러시아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과 선동이 미군정 실패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이러한 버치의 평가는 객관적이고, 미군정 관련자들의 전반적인 평가라 볼 수 있을까? 버치의 평가는 그 자신만의 평가는 아니었다. 군정청 내 다른 요원들의 평가도 그 문서 속에 들어있고, 그는 군정 요원뿐 아니라 다양한 한국인들로부터 의견을 청취했다. 그럼에도 불구,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은 미군정 내에 버치를 반대하는 요원들도 적지 않았고, 그들은 버치의 좌우합작위원회 지원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친일파 경찰들에 대한 버치의 메모. 노덕술의 이름이 보인다.

친일파 경찰들에 대한 버치의 메모. 노덕술의 이름이 보인다. 

김규식과 여운형을 지원했기에 이승만 그룹의 집중 비난을 받기도 했다. 미국에서 이승만을 돕고 있었던 임병직(이승만 정부에서 주미 한국대사와 외무부 장관 역임)은 버치 뒷조사를 했고, 그를 공산주의자이며 군 입대 전에 오하이오에서 변호사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미군정의 적산 관리인들은 좌우합작위원회에 관계된 정치인과 정당에 버치가 적산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버치가 미군정 소속이면서 변호사로 활동하려 한 점 역시 미군정 내에서 문제가 됐다.

버치 본인도 독특한 인물이었다. 1910년 텍사스에서 태어난 그는 홀리크로스대학에서 영어와 사회학을 전공했고, 하버드 법대를 나온 후 오하이오주의 아크론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1942년부터 아크론 시정부에서 일한 그는 무엇 때문인지 1944년 법무담당관으로서 ‘Army Service Forces’에 입대했고, 텍사스의 휴스턴에서 1945년 6월 수료했으며 우수생도상을 받았다. 한국의 미군정에 배치된 버치는 중위라는 낮은 계급이었음에도 하지 사령관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그는 곧 한국 정치지도자들을 만나 그들과 의견을 교환한 후 이를 보고하는 역할과 함께 민주의원과 좌우합작위원회의 조직을 돕고, 이 조직들과 미군정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중위’의 지위에서 할 일은 아니었다. 버치 스스로도 자신이 하지에게 특별한 역할을 부여받았다고 회고한다. 

이 과정에서 버치는 한국 정치인들 사이에서 명사가 됐다. 많은 한국인들은 적산 문제는 물론 경찰에 불법체포된 사람들을 풀어달라는 요청 등을 계속했다. 이런 요청은 보수적이었던 러치 군정장관이나 한국 경찰에 의해 무시되거나 거부되기도 했다. 가톨릭 신도였던 그는 교회 활동에도 관여했다. 한국에 근무하는 동안 버치 부부는 아들과 딸을 한 명씩 낳았는데, 이들은 노기남 대주교로부터 영아세례를 받았다. 한국인 신부의 미국 유학을 적극 지원했고, 이화여대의 재산 관련 분쟁 등에도 관여했다. 36세의 젊은 중위가 한국의 고위급 정치인들, 종교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상황이 영관급 이상의 미군정 요원들에게 어떻게 비쳐졌을까? 

흥미로운 점은 그의 자동차 운전과 관련된 경력이다. 임병직의 뒷조사에 의하면 버치는 아크론에서 1938년 7월 교통사고를 냈으며, 벌금을 부과받았다. 1946년 10월15일 김구의 집에서 이승만의 돈암장으로 가다가 규정속도 15마일을 10마일 넘는 25마일 정도로 달리다 속도위반으로 단속됐다(1947년 2월4일자 문서, 버치문서 박스 5). 

그는 또 1947년 5월18일 오후 5시15분에 23마일로 운전해 속도를 위반했다. 버치는 벌금을 내지 않아 4차례 독촉장을 받기도 했다. 버치는 헌병의 실수라고 항변했는데, 이후 어떠한 조치가 내려졌는지는 분명치 않다(1947년 5월24일자, 버치문서 박스 5). 1948년 2월에는 교통사고를 내기도 했다. 눈이 온 후 얼어버린 길을 달리다 미끌어진 것 같다(1948년 2월10일자, 버치문서 박스 5).

그해 3월에는 군용 트럭을 분실하기도 했다. 버치 중위가 일반적 야전 군인들과 달랐던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군에 입대하기 전 아크론에서 경험한 변호사 생활이 군내로 연장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장군급 대우를 받는 위관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미군 요원들이 그를 곱게 바라보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반면, 한국의 중도파 정치인들에게 그는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다. 버치는 그들에게 사무실과 집을 제공해줬고, 경찰과의 분쟁이 발생하면 해결사 역할을 했다. 친일문제와 극우세력의 테러에 함께 분노해줬다. 그러나 그런 버치도 좌우합작위원회가 실패하고 이승만이 정권을 잡았을 때 결국 이승만에게 항복했다. 버치는 한국을 떠나기 직전 이승만을 만났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초보 정치 전문가로서 더 이상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승만은 그러한 버치의 태도에 만족했다(‘접촉 보고서’, 1948년 5월3일자, 버치문서 박스 5). 

미군정하에서 진행됐던 버치와 중도 정치인들의 꿈은 많은 사람들의 희생 속에서 이렇게 좌절됐다.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던 카이로선언으로부터 강대국의 분할 점령을 규정했던 일반명령 1호, 한반도에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과 미소공동위원회, 한반도 문제의 유엔 이관을 통해 38선 이남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 조변석개의 정책을 실시했던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도 실패로 끝을 맺었다. 그 좌절과 실패는 2년 후 고스란히 한국인의 몫이 됐다. 1950년 엄청난 재앙이 시작됐고, 그 재앙은 1953년 중단됐지만 지금까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로 계속되고 있다.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