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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25)“끝이 아니라 시작이다”-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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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대…

등록일 18-10-13 01:12 조회 15

분단 정부 수립 반대한 김규식 “남북협상은 마지막 아니라 첫 기회”
그의 신념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한국에서 태어난 버치의 딸 세례식 날 버치의 집에서 찍은 김규식 사진. 사진의 뒤에는 엄청난 경력을 가진 한국의 위대한 지도자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김규식의 또 다른 사진에는 그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지도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에서 태어난 버치의 딸 세례식 날 버치의 집에서 찍은 김규식 사진. 사진의 뒤에는 엄청난 경력을 가진 한국의 위대한 지도자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김규식의 또 다른 사진에는 그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지도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1948년에 들어서 김규식은 남북의 지도자회담을 적극 추진했다. 회담 추진 초기에 김구보다도 더 적극적이었다.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했던 정치적 신념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 지도자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을 가 김일성·김두봉과 만나 회담을 한 것, 즉 ‘남북협상’(‘4김 회담’)은 결국 북한의 정부 수립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됐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북한에서도 분단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행동이 단지 김구와 김규식만의 돌출적인 판단에 의해서 나타났던 것일까?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25)“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1948년 2월 버치가 이승만, 김규식과 나눈 대화는 남북협상이 두 사람의 엉뚱한 행동이 아니라 당시 한국 사회가 원하고 있었던 상황임을 보여준다.

“이승만도 남북 지도자회담에 참여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이승만이 참여해야만 모든 지도자가 참여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만약 이 회담이 실패하면 한 지역에서의 선거 정책을 지지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아니라 첫 번째 기회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노력들은 철저하게 외세와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다.”(‘김규식-유엔’, 1948년 2월12일자, 버치문서 박스5)

이승만과 김규식의 입장에 대해 버치는 “현재로서는 이러한 제안이 성사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 지도자(이승만·김구·김규식-필자주)가 서로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논평을 달았다.

반공 캠페인에 앞장섰던 정치가가 이승만과 김구였다. 비록 이들이 1948년에 선택한 길은 전혀 달랐고, 이들의 최후 역시 너무나 달랐다. 하지만 반공이 애국의 길이라는 신념에서 두 사람은 1920년대 이후 공통의 정치노선을 갖고 있었다. 단지 미국에서 활동했던 이승만이 좌익세력과 손을 잡을 필요가 없었다면, 중국에서 활동했던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사회로부터 승인을 받기 위해 온건 좌파, 또는 중도파와 손을 잡아야 했다.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참여한 대표기관임을 대외적으로 보여줘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공의 선두에 섰던 이승만이 남북 지도자회담에 참여하는 것을 고려했고, 김구가 실제로 참여했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나? 이승만의 주장이 단지 수사적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의도를 내비쳤다는 것은 당시 한국 사회가 지도자들에게 원하는 것은 분단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통합을 위해 노력해 달라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김규식은 버치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이승만에게는 마지막 시도이지만, 나에게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아니라 첫 번째 기회다”라고. 

버치와 미군정의 마지막 대안은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내세운
한국민주당 중심의 내각책임제
 

버치나 미군정에 있어서 김규식의 남한만의 선거 반대와 남북협상 참여는 마지막 희망이 더 이상 무의미함을 의미했다. 미군정이 마지막 대안으로 갖고 있었던 방안은 대한민국이 수립될 때 한국민주당 중심의 내각책임제를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합리적으로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내세우는 것이었다. 김규식 대신 이승만이 정권을 잡고 대통령중심제로 나아가는 데 대해 버치는 두려움까지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승만이 정권을 잡을 것이 분명하며, 미국의 문제는 단지 시작될 뿐이다. 미국은 한국에서 친기업적이고 상식이 통하는 정부를 만들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절대로 그러한 정부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상식적인 사람이 정권을 잡는다면 어려움은 최소화될 것이다.”(‘김규식’, 1948년 3월17일자, 버치문서 박스5)

그러나 이승만의 전략적 승리와 
여운형의 죽음·장덕수의 암살로
미군정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미군정의 이러한 마지막 계획은 왜 실현되지 못했을까? 왜 버치가 가장 꺼렸던 시나리오가 실현되었을까? 버치의 문서를 통해 본다면, 제1의 원인은 이승만의 전략적 승리였다. 그는 미군정 3년 동안 누구보다 탁월하게 정치권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반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과거사 문제가 발생했고, 식민지 잔재 청산의 과제는 뒷전으로 밀렸지만 청년단과 경찰의 지원하에 각 지역에서 그의 권력은 공고해졌다. 이승만은 실질적인 권력인 미군정과 대립했지만 미군정이 한반도에 영원히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미국에 있었던 이승만은 미국의 정책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정부가 수립될 경우 자신이 권력에서 밀려날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국내에서의 활동도 모자라 미국까지 날아가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으로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던 미군정을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규식이 1948년의 선거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직은 이승만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만약 김규식이 나섰다면 그는 전쟁이 발발하기도 전에 암살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 김규식에게 완전히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 김규식이 38선 이남만의 선거에 참여한다고 했다면, 실질적 권력을 갖고 있었던 미군정으로서는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단정부를 수립해서는 안된다는 김규식의 신념, 그리고 이승만이 갖고 있었던 실질적인 정치적 자산이라는 두 요소를 제외하고도 김규식이 지도자가 될 수 없었던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첫째로 여운형의 죽음이었다. 여운형의 죽음으로 더 이상 좌우합작위원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동력이 사라졌다. 김규식 개인으로서도 충분히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좌우합작이라는 명분이 1946년 후반부터 1년 동안 그를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여운형이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이제 좌우합작에서 김규식과 같이 서 있을 수 있는 중도좌파의 대표가 없었다. 

버치의 딸들이 한국의 친구들과 찍은 사진. 사진의 뒤에는 버치와 가까웠던 강용흘의 아파트 근처에서 찍은 사진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 사진은 버치문서의 8번 박스에 소장되어 있다. 김규식 선생의 딸도 이와 동일한 사진을 갖고 있으며,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본인이라고 설명했다. 버치와 김규식은 가족 간에도 가까운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버치의 딸들이 한국의 친구들과 찍은 사진. 사진의 뒤에는 버치와 가까웠던 강용흘의 아파트 근처에서 찍은 사진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 사진은 버치문서의 8번 박스에 소장되어 있다. 김규식 선생의 딸도 이와 동일한 사진을 갖고 있으며,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본인이라고 설명했다. 버치와 김규식은 가족 간에도 가까운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김규식은 여운형이 죽은 이후에 국내외 상황이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 더 이상 좌우합작위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하지 사령관에게 보냈다(김규식이 하지 사령관에게 보내는 편지, 1947년 12월12일자, 버치문서 박스5). 이 편지는 “1947년 12월6일 좌우합작위원회가 만나서 해체하기로 결정했”으며 “마지막 결산보고서는 원세훈과 김붕준에 의해 준비되어 당신께 보내질 것”이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위원회를 도와준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로 끝을 맺고 있다. 미군정의 생각은 “(조선임시정부의) 집행위원회에는 한 사람이 임명돼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김규식과 여운형 두 사람을 동시에 내세우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중략) 이러한 조치는 합작위원회에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다.”(번스가 웨커링(Weckerling) 준장에게 보낸 편지, ‘남조선 과도정부 수반 문제’, 1947년 3월29일자, 버치문서 박스3)

버치는 여운형이 무대에서 사라진 상황에서 김규식만을 내세우는 것은 너무 약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 충격은 장덕수의 암살과 유엔의 감시하에 38선 이남에서의 단독선거가 실시되도록 미국의 정책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장덕수가 살아 있었다면, 미군정으로서는 ‘의원내각제’를 추진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장덕수는 1947년 12월 한국민주당의 총선거 전략을 마련하던 중 집을 찾아온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고 해야 할까? 김규식이 좌우합작위원회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다는 편지를 보냈던 날은 장덕수가 암살된 지 10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장덕수의 암살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미군정의 시나리오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었다. 김규식으로서도 미군정이 그리고 있었던 큰 그림을 알고 있었을 터이지만, 장덕수의 암살로 이제 그 그림은 현실성을 가질 수 없게 됐다는 사실도 인식했을 것이다. 

물론 사태가 이렇게 진행된 데에 대해 궁극적 책임의 한 축은 미군정에 있었다. 미군정하에서의 상황은 합리적인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안심하고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지 않았다. 이 점은 미군정이 1947년 초 김규식을 남조선 과도정부의 수반으로 임명하려 하였을 때 김규식의 반응을 통해 잘 드러났다. 남조선 과도정부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조선임시정부가 수립될 경우에 대비해 더 많은 한국인들에게 군정 업무를 맡기고자 한 계획하에서 조직됐다. 그러나 김규식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규식은 이승만 계열이 경찰과 공무원을 장악하고 있고, 테러집단들과 연결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수반이 된다면 그의 지지자들과 가족들이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미군정이 공정한 과정을 보장해야만 미군정의 계획대로 최고 지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며,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김규식과의 만남’, 1947년 4월8일자, 버치문서 박스5). 김규식은 그 후 몇 차례나 미군정에 자신의 경호원들이 권총으로 무장할 수 있도록 허가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경호원이 어느 정도의 무장을 하느냐와 관계없이 미군정이 경호에 신경을 쓰고 있던 여운형, 장덕수의 암살을 목격하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김규식은 남북협상 자체가 통일정부의 수립까지는 나가지 못하더라도 남과 북에서 각각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연기함으로써 분단을 최대한 연기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접촉 보고서: 김규식’, 1948년 2월17일자, 버치문서 박스5). 그리고 분단정부의 수립은 궁극적으로 전쟁을 불러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김규식의 판단은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하고 북으로 향한 김구와 동일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김규식은 “내 판단으로는 90% 이상의 한국인들이 미군의 철수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면서 동시에 미군이 남아 있는 것에 대해 반대를 표시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김규식’, 1948년 3월17일자, 버치문서 박스5). 오늘 한국 사회가 고민하고 있는 딜레마는 70년 전에도 동일했던 것인가? 김규식이 남북협상을 추진하는 시점에서 스캔들이 터져 나왔다. 김규식 인생 전체에서 단 한 번 있었던 스캔들이다.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입법의원과 독립전선에서 ‘매춘협회’(?)의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김규식은 이 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몰랐고 경찰과 회식을 하는 데 사용했으며, 그 돈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돌려주라고 지시했다고 발표했다. 김규식의 명성에 금이 가도록 하는 전형적 정치공작이었다(‘접촉보고서: 김규식’, 1948년 2월26일자, 버치문서 박스5).

1948년 남북 분단 정부 수립 후 
버치는 미군정의 정책을 반성했다

1948년 남북한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과 김일성이 남북의 지도자가 됐다. 미군정과 버치의 공작은 물거품이 됐다. 더 이상 김규식의 안위를 지켜줄 사람도 없었다. 1948년뿐 아니라 다른 중도파 정치인들이 참여했던 1950년 선거에도 나갈 수 없었다. 1949년 6월 김구의 암살은 김규식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어떤 상황에서도 중국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의견을 밝혔다. 죽더라도 ‘한국에서 죽고 싶다’는 것이 그의 마음이었다. 자신의 고향인 오하이오에서 버치는 1973년 12월3일 편지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우리는 1947년 3월과 1948년 6월 인민군에서 공격이 준비되었다는 정보를 받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그 나라를 떠난 지 2년 후인 1950년 6월에 공격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안정적인 정부를 세울 수 있었던 가장 순수한 두 사람의 애국자 조만식과 김규식이 죽었을 때 이미 무언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하지의 행정부가 순진했다고 생각한다.”

버치의 딸 세례식 장면. 노기남 대주교, 대모인 메리 루(한국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 그리고 미군정 방첩대(CIC)의 로빈슨 소령이 참석했다.

버치의 딸 세례식 장면. 노기남 대주교, 대모인 메리 루(한국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 그리고 미군정 방첩대(CIC)의 로빈슨 소령이 참석했다.

후에 버치는 자신이 추구했던 좌우합작위원회가 당시 상황에서 볼 때 미군정의 순진한 정책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는 반대로 그만큼 김규식이 중심이 된 좌우합작위원회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더 큰 책임은 미국 정부에 있었다. 미국 정부의 정책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조선임시정부 수립에서 38선 이남에서만 분단정부 수립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단지 그 정책에 충실했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규식은 남북협상에 이용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정책변화 속에서 이용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념을 지켰다. 그에게 있어서 남북협상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1948년 남북의 지도자회담이 북진통일을 추진했던 사람에게는 마지막 시도가 되겠지만, 평화통일을 희구하는 사람에게는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는 출발점이었다.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