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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24)“우리 목적에 가장 근접한 리더”…버치, 김규식을 가장 많이 접촉-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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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대…

등록일 18-10-13 01:09 조회 207

버치가 가장 존경한 인물

1947년 4월 광복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한 지청천 장군의 귀국 환영식장에 당대 주요 인물들이 모였다. 왼쪽부터 김규식, 김구, 이날 환영행사의 주인공인 지청천 장군,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부부.  경향신문 자료사진

1947년 4월 광복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한 지청천 장군의 귀국 환영식장에 당대 주요 인물들이 모였다. 왼쪽부터 김규식, 김구, 이날 환영행사의 주인공인 지청천 장군,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부부.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승만·김구엔 쿠데타 시도 의심 
미군정에 남은 대안은 김규식뿐
정부 수립에 중심적 역할 기대
 

여운형이 암살되기 직전 버치는 한국민주당과 연결돼 있던 한 지식인을 만났다. 그 지식인은 김규식과 여운형이 조선임시정부의 수반이 되어야 하되, 정치조직이 굳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민주당이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하지 사령관에게 보고됐다(‘접촉 요약’, 1947년 6월24일자, 버치 문서 박스 4). 이승만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던 미군정으로서는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든 유엔을 통해 38선 이남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든, 김규식이 중심적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다.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24)“우리 목적에 가장 근접한 리더”…버치, 김규식을 가장 많이 접촉

김규식은 버치가 가장 많이 접촉한 인물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학술회의(지난 4월17일)에서 만난 김규식의 딸은 버치와 그의 가족을 기억하고 있었다. 버치의 문서들 속에서도 김규식이라는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버치가 한국에 온 이후 본격적으로 정치공작을 했던 좌우합작위원회와 입법의원의 중심에 김규식이 서 있었다. 그는 김규식을 새로 수립될 한국 정부의 중심에 세우고 싶었다. 과연 이러한 계획은 실현가능한 것이었을까?

그는 우익 인사들과 가까우면서 
온건 좌파와도 소통 가능한 매력
1942년 임시정부에 합류하면서 
온건 우파 핵심 지도자 자리매김

관선 입법의원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후보가 될 수 있는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를 달아놓은 문서. “이승만 계열의 사람”(실선 원) “좋다” 등의 코멘트가 붙어 있는 가운데 무정부주의자 유림에게는 “폭파자”(점선 원), 한글학자 이극로에게는 “?”를 달아놓았다(원 표시는 편집자 추가).

관선 입법의원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후보가 될 수 있는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를 달아놓은 문서. “이승만 계열의 사람”(실선 원) “좋다” 등의 코멘트가 붙어 있는 가운데 무정부주의자 유림에게는 “폭파자”(점선 원), 한글학자 이극로에게는 “?”를 달아놓았다(원 표시는 편집자 추가). 

당시의 국내 정치적 상황을 감안하면 버치와 미군정이 김규식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를 지도자로 옹립하려고 했던 정책은 불가피하면서도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보수적인 정치세력들을 하나로 묶고 그 힘을 강화하기 위해 귀국을 허가했던 이승만과 김구가 미군정의 정책에 대한 반대를 넘어 쿠데타까지 시도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에 남아 있는 대안은 김규식밖에 없었다. 김규식은 온화하며 합리적이고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그는 식민권력을 피해 중국으로 탈출한 조선 청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을 정도로 영어 실력도 뛰어났다. 조용한 듯 보였지만 강단이 있었고, 작은 체구임에도 무시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보수적이면서도 꽉 막히지 않은, 유연한 입장을 가졌다. 김규식의 유일한 문제는 건강이 안 좋았다는 점이다(번스가 웨컬링 준장에게 보낸 문서, ‘남조선 과도정부 수반 문제’, 1947년 3월29일, 버치 문서 박스 3).

미군정에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사실은 그가 임시정부 소속으로 보수 우익 인사들과 가까운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반탁운동에 참여하지 않았고, 여운형과 같은 온건 좌파 정치인들과도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에 소련군도 용납할 수 있는 정치인이었다는 점이다. 또 그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찬성하면서도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민전에는 주로 좌익계열의 정당, 사회단체들이 참여했는데, 3상회의 결정에 찬성하는 우파 정치인들도 일부 있었다.

김규식은 반탁운동에 반대하면서도 반탁운동의 리더들이 참여하고 있는 민주의원의 부의장이었다. 민주의원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해 미군정이 만들었고, 민전은 좌익이 이에 대응해 만든 기관이었다. 1946년 여름 이후 김규식은 미군정이 민주의원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던 좌우합작위원회와 입법의원을 주도했다. 그는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한 여운형이 입법의원 참가를 거부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김규식은 한국의 입법의원에서 완벽한 리더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의 필요한 목적을 얻기 위해 가장 근접해 있는 리더이다.”(‘입법의원에 대한 정책’, 1947년 1월2일자, 버치 문서 박스 2) 

김규식은 미국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동시에 미국에 우호적인 보수적·합리적인 정치인이었다. 당연히 미군정은 김규식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그는 독립운동 경력으로 보나 정치인으로서의 경륜으로 보나 다른 정치인에게 뒤질 것이 없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됐고, 1922년 독립운동의 후원을 요청하기 위해 여운형과 함께 모스크바에 간 경험도 있었다. 일찍이 그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좌우의 합작을 위해 민족유일당 운동에 참여했고, 1942년 임시정부에 합류하면서 온건 우파의 핵심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1946년 6월 하지 사령관은 이승만과 김구, 그리고 김규식이 모인 자리에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뒤로 물러서서 김규식을 지원할 것을 직접 요청했다. 러치 군정장관 역시 정치인들에게 편지를 보내 김규식이 중심 되는 조직에 대한 지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버치가 작성한 스케줄표, 버치 문서 박스 1). 

문제는 미약한 국내 정치 영향력 
입법의원마저 이승만 사람들로
김규식, 미군정에 700만엔 요청 
남몰래 정치인 교육기관 준비

문제는 김규식이 갖고 있는 국내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이었다. 그가 임시정부 내에서 부주석으로서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었지만, 반탁운동에 개입하지 않았고, 임시정부 내에서 그와 함께했던 정치인들 중 일부가 민전에 참여했기에 보수 우익 내에서 그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또 좌우합작위원회에 민주의원 대표로 참여했지만, 좌우합작위원회가 조직되는 시점에 민주의원은 이승만의 여비를 보조하는 기관으로 전락했다(‘민주의원’, 1946년 12월5일자, 버치 문서 박스 2). 이런 상황에서 버치는 입법의원을 통해 김규식의 지도력을 강화시키려 했다. 미군정은 45명의 관선 입법의원에 김규식을 지지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온건한 정치인들을 선출하려 했다. 버치의 문서를 보면 미군정 정치고문단이 한국의 정치인들 중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들을 선택하기 위해 고심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문제는 45명의 민선 의원 중 대부분이 이승만 지지자로 채워졌다는 점이다. 입법의원 선거는 일제강점기 지방자치선거와 마찬가지로 간접선거 방식이었다. 일정한 정도의 세금을 낼 수 있거나 해당 지역의 유지들만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 1946년 중반 이후 지방에서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독립촉성국민회와 청년단이 그 세력을 넓혀 나가고 있었기에 간접선거를 통한 입법의원 선거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그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친일민족반역자에 대한 처리, 농지개혁 등 해방 직후 처리해야만 했던 문제를 다루는 법안이 입법의원에서 논의됐지만, 결국 통과되지 못했던 것은 입법의원 내에서 이승만 지지그룹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김규식에게 보내는 버치의 메모와 김규식의 답 메모가 한 장에 함께 있는 문서. 매우 보기 드문 경우로 좌우합작위원회 회의 진행 중에 양자 사이에 오간 메모인 것으로 추측된다. 윔스 소령을 만날 필요가 있다는 버치의 메모에 대해 김규식은 다음 회의 이후에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답하고 있다.

김규식에게 보내는 버치의 메모와 김규식의 답 메모가 한 장에 함께 있는 문서. 매우 보기 드문 경우로 좌우합작위원회 회의 진행 중에 양자 사이에 오간 메모인 것으로 추측된다. 윔스 소령을 만날 필요가 있다는 버치의 메모에 대해 김규식은 다음 회의 이후에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답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은 김규식의 정치적 지도력이 약하며, 매우 소극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그 나름대로의 정치적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1946년 12월23일 웨컬링 준장이 작성한 문서에는 그가 그리고 있었던 큰 그림이 잘 드러나 있다. 사실 이러한 김규식의 생각은 여운형의 생각과 거의 동일한 것이었다. “브라운 장관의 합작위원회 해체 계획에 대해 김규식은 아직도 중요한 일이 남았다며 반대했다. 김규식은 과도 입법의원이 국가 전체 규모의 입법기관으로 나아가는 변환 과정을 지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은 북한까지도 포함한다고 김규식은 답변했다. 합작위원회는 서울을 포함한 전국 9개 도에 30명의 대표를 파견해 합작의 원칙을 설파할 예정이며 합작이 면 단위에서부터, 아래로부터 시작되는 방식으로 추진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과의 연결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해 그가 김두봉을 잘 알고 있으며 이 계획에 호의적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에 대해서도 어떤 방법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오늘 과도 입법의원에 합류한 최동오가 북한에 파견될 것이라고 했다. 그 외에 다른 계획은 아직 없다. 이것이 과도 입법의원 차원인지 합작위원회 차원인지는 분명치 않다. 여운형은 과도 입법의원에는 참여하지 않고 합작위에는 참여할 것이다.”(제목 미상, 버치 문서 박스 2).

김규식은 또 정치인들을 훈련시킬 수 있는 교육기관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칭 ‘정치교육위원회(Political Education Committee)’로 명명된 이 조직을 위해 김규식은 1947년 2월24일과 7월14일 두 차례에 걸쳐 미군정에 300만엔과 400만엔을 요청했다. 이 자금은 좌우합작위원회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그의 지인 이름으로 된 개인계좌에 입금해줄 것을 요청했던 것을 보면,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합작위원회 자금’, 1947년 2월24일자, 1947년 7월14일자, 이상 버치 문서 박스 2). 김규식의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현실적이었는지는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매우 의미있는 것이었다. 지금도 한국의 정치무대에는 중앙정치로부터 어느 날 갑자기 선택된 인사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많이 알려진 사람들이고,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이지만, 정치 경험이 없고 정치적 훈련도 받지 않은 인물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갑자기 정치의 핵심에 섰을 때 나타난 결과가 오늘날 한국 정치의 문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김규식은 해방 직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인사들이 민주의원이나 입법의원 등을 통해 중앙정치의 중심에 갑자기 나타나는 현실을 보면서 이러한 폐단을 일찍이 예측했던 것 같다. 

군사적인 힘 확보 필요성도 인식 
국민당 김홍일 장군 귀국 꾀했지만
미군정까지 강한 반대, 결국 무산 
그의 정치계획들은 실패로 돌아가

김규식의 또 하나 적극적 노력은 중국 국민당의 김홍일 장군을 조기 귀국시키기 위한 공작이었다. 1946년 11월 김규식은 전 광복군 대령인 박기창의 중국 여행 허가를 미군정에 요청했다(‘박기창 대령의 중국 여행’, 1946년 11월21일자, 버치 문서 박스 4, 이 문서에 김홍일 장군의 이름은 ‘왕이서’라는 중국식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다: 필자주). 김 장군은 당시 만주에서 국민당 소속 군인으로 공산당과의 국공내전에 참전하고 있었다. 이러한 김규식의 요청에 대해 러치 장군의 정치자문역이자 조병옥의 친구였던 윔스(William Weems) 대령은 김홍일 장군이 현재 필요한 곳은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귀국에 대한 제안을 거부했다. 버치는 윔스의 판단이 옳지 않다고 비판하면서 윔스 대령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 김규식에게 말하지 말 것과 하지 사령관이 직접 이 문제에서 김규식의 손을 들어줄 것을 요청했다(‘박기창 대령의 중국 여행’, 1946년 11월21일자, 버치 문서 박스 3).

여운형에게 주는 메모가 적혀 있는 김규식의 명함. 인도 델리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할 것을 권고하고, 당시 상황에서 너무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자문을 듣지 말 것을 충고하고 있다. 여운형에게 준 메모가 왜 버치의 문서 박스에 있는지는 의문이다.

여운형에게 주는 메모가 적혀 있는 김규식의 명함. 인도 델리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할 것을 권고하고, 당시 상황에서 너무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자문을 듣지 말 것을 충고하고 있다. 여운형에게 준 메모가 왜 버치의 문서 박스에 있는지는 의문이다. 

김규식은 왜 김홍일 장군의 입국을 추진했을까? 1947년 3월 버치가 만든 문서를 보면 김규식의 김홍일 장군 귀국 프로젝트는 이청천에 대한 견제의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김규식은 만약 김홍일 장군이 귀국하기 전에 이청천 장군이 귀국하면 이는 김홍일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 국민당의 소장 계급이던 김홍일과 광복군 소속의 이청천은 그 지위가 서로 비교될 수 없었다. 미군정은 김홍일을 1945년 일본군 내에서 가장 계급이 높았고 전범으로 처형당한 홍사익 장군과 동급이라고 판단했다(‘이청천 장군’, 1947년 3월25일자, 버치 문서 박스 3). “왕 장군이 공산주의자라는 소문이 있지만, 그는 국민당의 소장 계급을 갖고 있다. 군정 측으로서는 그가 들어온다면 현재 중국을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국민당을 모욕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며, 현재 그의 도움이 필요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청천에 대한 중국 내 한인들의 명성은 좋지 않다. 그는 파산한 채권을 강제적으로 판매했다. 만약 그가 일반 배편으로 돌아온다면 많은 사람들이 배에서 그를 죽이려 할 것이다. 그에게 어떠한 특별한 대우도 있어서는 안된다. 왕 장군의 귀국을 위해 군정이 노력하겠다는 것을 사령관의 이름으로 김규식에게 전달해 주었으면 한다.” 

1947년 3월의 시점에서 김규식이 이승만과 김구를 적극 지지하는 이청천의 조기 귀국을 반대하고 김홍일 장군의 귀국을 추진했다는 것은 그가 군사적인 측면에서 힘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홍일 장군의 귀국 프로젝트나 정치교육위원회 계획 등 김규식의 이러한 노력을 가로막은 것은 그를 비난하던 정치인들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미군정에도 그 책임이 있었고, 이는 결국 김규식의 정치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