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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23)‘버치와 한국민주당의 갈등’이 내각책임제 실패 불렀을까-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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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대…

등록일 18-09-06 09:12 조회 218

ㆍ버치 신뢰하지 않은 김성수

햇볕 좋은 어느 날 미군정 인사들과 한국의 주요 정치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앞줄 중앙의 김구와 김규식, 경찰복을 입고 있는 조병옥과 장택상이 눈에 띈다. 아마도 민주의원과 관련된 회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버치문서에 있는 사진에는 따로 설명이 없다.

햇볕 좋은 어느 날 미군정 인사들과 한국의 주요 정치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앞줄 중앙의 김구와 김규식, 경찰복을 입고 있는 조병옥과 장택상이 눈에 띈다. 아마도 민주의원과 관련된 회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버치문서에 있는 사진에는 따로 설명이 없다.

1947년 1월17일 한국민주당의 김성수가 하지 사령관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김성수가 하지에게 1월17일 보낸 편지’, 1947년 2월1일자, 버치문서 박스4). 김성수는 이 편지에서 버치 중위가 민주당을 신뢰하지 않고 있으며, 한국독립당과의 연합을 위한 노력을 방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버치가 1946년 12월11일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의 조완구를 만났는데, 이 자리에서 한국민주당이 단지 모리배(profiteer), 매국노, 그리고 친일파들의 모임이라고 비난했으며, 한국독립당은 애국자와 신사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두 당이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또 한국민주당이 조완구를 한미호텔에서 쫓아내려 했다고 말함으로써 한국민주당과 한국독립당 사이에서 이간질을 했다고 주장했다. 한미호텔은 지금의 명동성당 뒤편에 있던 일제강점기 대표적 호텔의 하나로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 후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고, 일본의 적산이었던 것을 미군정이 관리 중이었다. 미군정에 적극 참여하고 있던 한국민주당이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임시정부 요인들을 내쫓으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 사령관에 편지 쓴 김성수 
“한국독립당 조완구 만났는데
버치 중위가 한국민주당은 
모리배·매국노 모임 비난”
버치 “통역과정에서의 오해”
 

버치는 하지에게 이러한 김성수의 주장이 통역과정에서 나타난 오해라고 주장했다. 조완구와 자신의 대화가 김성수에게 잘못 전달됐다는 것이다. 미군정은 곧바로 조사에 들어갔다. 우선 민정장관 브라운 장군은 정치고문단의 링컨 대령과 함께 1947년 1월20일 김성수, 장덕수와 모임을 가졌다. 사건의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통역과 참가자 조사에 들어갔다. 버치와 조완구의 만남에는 조××와 강영흘이 통역으로 참석했기에 실제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가에 대한 조사가 필요했다.

진실 게임이 시작됐다. 브라운 장군의 거듭된 질문에 통역을 했던 조××는 대화의 주된 화제는 김성수의 입법의원 선거출마 여부였으며, 김성수가 정치에 물러나서 교수나 하겠다고 했다는 내용의 대화는 있었지만, 버치가 한국민주당을 비난하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진술했다. 버치와 조완구의 대화에서 통역을 맡은 강영흘에 대한 조사도 이뤄졌다(강영흘에 대해서는 본 연재의 8회 참조-필자주). 강영흘은 이들의 대화에서 이승만과 한국독립당이 계획하고 있던 미군정에 반대하는 미소공위 반대시위에 대해 버치가 화가 나 있었다고 말했다. 강영흘에 의하면 대화의 모든 내용을 다 통역하지는 않았지만, 버치가 이승만의 시위계획에 대해 언급했고, 조완구는 김구와 함께 이승만이 추진하는 ‘성전’을 막을 것이며, 어떠한 시위에서도 이승만과 협력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버치가 조완구와의 대화에서 이러한 시위가 계속된다면 주한미군이 철수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며, 하지 사령관마저도 교체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 강영흘의 진술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 상황에 익숙하지도 않고 동정적이지도 않은 새 인물이 사령관으로 올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강영흘은 버치가 단순 모리배와 친일파에 대해서 얘기는 했지만, 특정한 정당을 지칭하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아마도 조완구가 그 언급에 대해 한국민주당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미호텔에서 조완구의 방을 빼려는 한국민주당의 노력에 대한 부분은 버치가 언급한 적이 없다고 진술을 마쳤다. 

조완구에 대한 조사도 이뤄졌다. 조××와 강영흘이 통역을 했으며, 자신의 가까운 친척 지인도 자리를 함께했다고 한다. 이하는 조완구의 진술이다. ‘버치는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의 합당은 유해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버치는 한국민주당에 친일파, 모리배, 비애국자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고, 조완구는 현재 어떤 정치적 그룹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조완구는 한국민주당이 한국독립당의 자매당이라고 말했지만, 버치는 그런 말을 하면 안된다고 했다. 버치가 미군정의 권위를 빌려 말한 것은 아니지만, 조완구의 생각에는 그가 누구에게는 공정하고, 다른 누구에게는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대화내용을 조완구가 김성수에게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윤보선에게 말했다. 이후 김성수에게 말한 것은 두 당 사이의 합당을 버치가 반대한다는 것뿐이다.’ 

이렇게 진술이 엇갈리자 미군정은 다시 통역자 조××를 조사했다. 그는 이승만의 행동이 한국에 해가 될 것이라고 말한 버치의 주장이 기억난다고 했다. 아울러 미군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면 미군이 철수할 수 있다고 버치가 말했다는 진술도 덧붙였다. 링컨 대령은 이러한 진술에 대해 모든 대화내용이 뒤죽박죽된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같은 조사 결과에 기초해 하지 사령관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답장을 김성수에게 보냈다. ‘당신이 버치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어느 정도 과장되어 있는 것 같다. 버치가 한국민주당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버치와 조완구의 만남은 일상적인 버치의 임무 중 하나였다. 그의 가장 기본적 임무는 한국의 정치인들을 만나 그들의 생각과 활동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나타난 조그마한 갈등이 미군정 내에서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조소앙의 자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버치의 편지. 그때나 지금이나 경조사에 참여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다. 조소앙은 반탁운동으로 미군정과 갈등을 빚고 있었던 한국독립당 소속 정치인이었지만, 미군정 정치고문단의 일원이었던 버치에게는 영향력 있는 정당의 조소앙 같은 이데올로그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그는 조선인민당의 핵심인물이었던 박건웅, 김성숙과도 편지를 자주 교환했다. 1947년 3월에는 조봉암을 직접 만나기도 했고, 그와 브라운 민정장관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조소앙의 자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버치의 편지. 그때나 지금이나 경조사에 참여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다. 조소앙은 반탁운동으로 미군정과 갈등을 빚고 있었던 한국독립당 소속 정치인이었지만, 미군정 정치고문단의 일원이었던 버치에게는 영향력 있는 정당의 조소앙 같은 이데올로그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그는 조선인민당의 핵심인물이었던 박건웅, 김성숙과도 편지를 자주 교환했다. 1947년 3월에는 조봉암을 직접 만나기도 했고, 그와 브라운 민정장관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왜 이런 사건이 발생한 것인가? 또 왜 1947년 1월이라는 시점에서 발생한 이 사건이 미군정 내에서 사령관과 민정장관이 관여할 만큼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것인가? 해방 직후의 상황에서 통역이나 번역의 잘못으로 인해 나타난 사건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미군정 요인들이 통치하는 과정에서 ‘통역정치’라는 말이 나타날 정도로 통역관들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또 미군정의 중요 보직에 임명된 한국인들은 대부분 영어권 국가의 대학에 유학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들만이 미군정의 중요 인사와 통역 없이 대화가 가능했다. 초기 중요한 문제를 통역한 이묘묵은 절대 권력자로 보였으며, 조병옥의 경무부장 임명도 그가 선교사가 세운 학교 출신이며, 컬럼비아대학에서 수학했던 경험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보수 우익 내에서 라이벌이었던 이승만과 김구의 갈등은 시작부터 게임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유학한 이후 1945년까지 미국에서 살았고, 김구는 그나마 정규과정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말 그대로 조선의 독립만을 위해 살았던 인물이었다. 버치가 김규식이나 여운형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영어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통역 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하는 것은 너무나 빈번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일 중에 왜 하필 이 일이 문제가 된 것일까? 버치의 문서군뿐만 아니라 기존 연구를 통해 알려진 다른 문서들에서는 이와 관련된 상황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추론을 통해 접근해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2차 미소공동위원회 성공 위해 
미군정, 한민당 참여 필수 판단
통역자 조XX 불러 ‘진실게임’ 
민정장관까지 관여, 갈등 해소

첫째로 당시 시기적 중요성이었다. 1947년 1월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를 앞두고 있었던 때다. 미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미군정의 여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의 참여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1946년의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것은 반탁운동을 했던 보수세력들로 인해 미군정이 딜레마에 빠졌기 때문이었고, 이는 특히 미군정의 정책을 지지해야 했던 한국민주당이 반탁운동에 참여하면서 미소공위 참여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을 지지할 수 있는 세력을 제외한 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한국민주당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시작되기 전에 설득해야 했다. 그런데 설득도 하기 전에 한국민주당이 정치고문단의 버치와 갈등을 빚는다는 것은 미군정의 입장에서는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미군정과 한국민주당 사이에서는 1946년 말 미군정법령 118호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던 터이다(김기협, ‘해방일기 5’, 1946년 12월12일자 참조). 

당시 버치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해 김규식과 여운형이 중심이 된 좌우합작위원회를 지원하고 있었지만, 미군정뿐 아니라 버치도 좌우합작위원회에 100% 의존할 수는 없었다. 한국민주당만큼 철저한 보수주의자들이 아니었으며, 미군 정보기관이나 극우세력들은 김규식과 여운형은 ‘빨갱이’나 다름없는 인물로 규정하고 있었다. 미군정의 입장에서 볼 때 만에 하나 김규식과 여운형이 조선임시정부의 지도자가 된다 하더라도 실질적인 권한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은 가장 믿을 수 있는 한국민주당이었다. 그래서 미군정은 조선임시정부의 헌장에서 국회에 보다 많은 권한을 부여했던 것은 아닐까? 한국민주당에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는 없었지만, 다수의 보수적인 엘리트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이 국회를 장악하고 정부 수반을 견제할 경우 미국의 의도에 부합하는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둘째로 김성수가 갖고 있는 정치적 위치였다. 김성수는 한국민주당의 실질적인 맹주였다. 일제강점기 고려대학과 동아일보, 경성방직의 창설자인 김성수는 당시 보수적 인사들 가운데 가장 명망이 높았으며, 실질적으로 한국민주당의 재정적 뒷받침을 했다. 그는 전면에 나서지 않는, 한국 정치사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인물이었다. 식민지 시기 기업과 언론, 대학의 중요성에 일찍이 눈을 떴던 김성수는 지금으로 보면 선구적인 4차 산업혁명 스타트업 사업가였다. 친일 문제가 그의 명성에 발목을 잡는 것이었지만, 해방 직후 출간된 가장 적극적으로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충성했던 인사들을 소개한 <친일파 군상>이라는 책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지 않을 정도로 그의 일제강점기 활동은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여운형·장덕수 암살당하며 
미군정 정책은 모두 수포로

일찍이 일본에 유학을 갈 때에도 동네의 천재들을 함께 데리고 갔으며, 유학 후에도 그의 사업에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친구들을 내세웠다. 김성수는 뒷방에서 돈을 대는 큰손이었다. 동아일보와 한국민주당 등 그가 하는 사업에는 송진우나 백관수 같은 김성수의 오랜 친구들이 앞에 나섰으며, 그들은 해방 이후 미군정의 가장 가까운 파트너들이었다. 따라서 미군정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버치와 김성수 간의 갈등을 빨리 해결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국민주당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여 선언을 이끌어냈다. 아울러 가능한 한 한국민주당과 이승만, 한국독립당 사이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다. 이를 통해 조선임시정부의 헌장에 나타난 것처럼 좌우합작위원회 지도자를 정부 수반으로 내세우고, 한국민주당을 국회 내 다수당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결과적으로 볼 때 미군정의 정책은 모두 실패했다. 여운형의 암살과 장덕수의 암살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한국민주당 자체가 다수당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정당이었는가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 남은 희망은 김규식밖에 없었다. 특히 버치로서는 이승만과의 관계가 안 좋았기 때문에 김규식을 중심으로 해 다른 정치세력들을 묶어야 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결코 버치의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김규식의 대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이었다. 

▶필자 박태균 교수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23)‘버치와 한국민주당의 갈등’이 내각책임제 실패 불렀을까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