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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당의 아내’ 이은숙 여사, 건국훈장 받는다-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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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대…

등록일 18-08-07 09:34 조회 450

ㆍ곤궁한 살림에도 동지들 밥 먹이고…주야로 옷 지어 독립운동자금 지원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내이자 독립운동을 지원한 이은숙 여사(왼쪽). 항일 독립운동으로 투옥된 시아버지와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며 가족의 삶을 지탱했던 고 박애신 여사(오른쪽).  일조각·대한민국역사문화원 제공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내이자 독립운동을 지원한 이은숙 여사(왼쪽). 항일 독립운동으로 투옥된 시아버지와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며 가족의 삶을 지탱했던 고 박애신 여사(오른쪽). 일조각·대한민국역사문화원 제공

여성 독립운동가 고 이은숙 여사(1889∼1979)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된다. 이 여사는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내다. 만주를 거점으로 한 독립운동을 지원했지만 그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광복절 ‘독립유공자’ 명단에 포함 
이 여사, 남편보다 56년 늦은 추서

이 여사는 오는 15일 열리는 ‘제73주년 광복절 및 정부 수립 70주년 경축행사’에서 정부 포상을 받는 독립유공자 177명 명단에 포함된 것으로 6일 확인됐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포상자 중 여성 독립운동가는 26명이다. 무장독립운동에 헌신한 고 허은 여사(건국훈장 애족장)와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한 고 신창희 여사(건국포장) 등이 함께 포함됐다.

이 여사는 우당과 결혼한 지 2년 만인 1910년 12월 서간도로 이주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 터전을 일구겠다며 나선 길이다. 품에는 1년도 안된 딸이 안겨 있었다. 우당 등 6형제는 모든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옮겨 와 독립운동을 했다. 당시 처분한 돈이 약 40만원. 현재 화폐가치에 따라 환산하면 최소 650억원이다. 우당이 주도해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청산리전투를 비롯한 독립운동의 주축이었다.

이 여사의 삶 자체가 독립운동의 기반이 됐다.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에는 녹록지 않았던 만주의 삶이 녹아 있다.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은 뒤 꾸려야 했던 가족의 삶은 곤궁했다. “잘 해야 일중식(하루 한 끼만 먹음)이나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절화(밥을 짓지 못함)하기를 한 달이면 반이 넘으니 생불여사(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한 삶)로다”라고 이 여사는 회고했다. 이런 환경에서도 매일같이 방문하는 독립운동가들을 헌신적으로 지원했다. 

직접 국내로 들어와 독립운동 자금을 구하기도 했다. “매일 빨래하고 만져서 주야로 옷을 지어도 한 달 수입이란 겨우 20원가량 되니, 그도 받으면 그 시로 부쳤다. 매달 한 번씩은 무슨 돈이라는 건 말 아니하고 보내 드렸는데, 우당장(이회영)께서는 무슨 돈인 줄도 모르시면서 받아 쓰시니, 우리 시누님하고 웃으며 지냈으나 이렇게 해서라도 보내 드리게 되는 것만 나로서는 다행일 뿐이다.” 우당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이 여사가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을 받기까지는 56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던 셈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이들의 손자다.

이 여사는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사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여성들 중 한 명이다. 총칼을 들지 않았더라도, 이들의 신산한 삶은 독립운동을 지탱하는 단단한 축이었다.

사단법인 대한민국역사문화원은 이번에 여성 독립운동가 202명을 새로 발굴했다. 국내 항일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75명으로 가장 많다. 이어 학생운동 36명, 3·1운동 35명, 만주 방면 17명, 중국 방면 13명 순이다. 

의열단원 남편 지원한 박애신 등 
항일운동사 이면에 가려진 이름들
역사문화원, 여성 202명 새로 발굴 
“여성 참여 없이는 지속 불가능했다”

새로 발굴된 고 박애신 여사의 삶은 당시 여성의 기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그는 독립운동가인 의열단 김태규 선생의 아내로 고단한 삶을 살았다. 1919년 3월9일 결혼 직후부터 시련이었다. 3·1운동에 참여한 시아버지 김병농 목사가 바로 투옥됐고, 남편은 잠적했다. 시아버지의 1년 옥바라지가 끝날 즈음, 제2의 3·1운동을 꾀했던 남편 역시 일제에 붙잡혀 다시 옥바라지가 시작됐다.

석방된 남편은 몇 달 뒤 독립운동을 위해 떠났다. 집 주변에는 늘 감시와 미행의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1922년 전갈이 왔다. “모월 모일 어느 역을 지나가게 되었소. 아이를 낳았다는데 얼굴을 보고 싶으니 기차역에 나와주면 좋겠소.” 젖먹이 아이를 업고 기차 차창을 통해 만난 것이 마지막이다. 생사 여부도 알 수 없었던 남편의 사망신고일은 1922년 3월1일이다. 박 여사는 1969년 생을 마감했다.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장은 “박 여사와 같은 여성을 ‘몹시 운 없는 여성’으로 치부하면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다시 그런 상황이 오면 절대 그런 삶을 살지 말아라. 그 긴 터널의 끝에는 어느 한 사람 네 수고와 희생을 기억해 주는 이 없는 허망함뿐’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 했다.

1919년 3월10일 만세시위에 나섰던 광주 수피아여학교 학생들.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제공

1919년 3월10일 만세시위에 나섰던 광주 수피아여학교 학생들.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제공

여학생이 주도한 만세시위도 기억해야 할 대상이다. 광주에선 1919년 3월10일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교사와 학생 23명이 구속됐다. 10일 뒤엔 천안 광명여학교,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1일엔 서울 배화여학교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고자 한 국내외 노력의 한 부분이었지만, 이 사건과 관련된 24명의 배화여학교 학생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졌다.

이 원장은 “독립운동이 반 세기, 두 세대 또는 그 이상의 희생을 요구하는 긴 기간이었기 때문에 여성의 참여와 지원 없이는 지속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까지 독립유공 포상자 1만4830명 중 여성은 296명(2%)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