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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구와 샌프란시스코의 독립운동을 이끈 ‘차보석’ 지사[신한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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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대…

등록일 18-01-31 09:42 조회 279
“차리석 선생은 해외 혁명운동자 가운데서도 특히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하기로 유명하시었다. 탁월한 사무처리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일각까지 맡으신 사명을 완수하신 건강한 책임감은 한국 독립운동에 피와 살이 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범 김구, 동아일보 1948년 9월 22일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장관)을 지낸 동암 차리석(1881~1945, 1962, 독립장 추서) 선생은 백범이 말했듯이 ‘한국 독립운동사에 피와 살’이 되었을 뿐더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분이다.

 

그런데 차리석 선생에게 차보석(黃寶石, 車寶石, 1892~1932)이라는 여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기자가 집필 중인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 제8권》을 쓰는 과정에서 ‘차보석 선생의 오라버니가 동암 차리석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기자는 차보석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자 지난 1월 16일 화요일 오후, 선생의 조카인 차영조(차리석 선생 아드님, 74살) 씨를 의왕시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미국에서 활동하신 고모님(차보석)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잘 모릅니다. 제가 3살 때 중경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환국했기에 나이도 어렸지만 이후 한국 생활이 고단하여 미국에서 활동하신 고모님에 대한 소식을 제대로 듣지 못했던 거지요. 그 대신 아버님(차리석)의 책을 통해 고모님에 대해 조금 알고있습니다만...”

 

차영조 씨가 말한 아버님의 책이란 《임시정부 버팀목 차리석 평전》(장석홍지음, 역사공간, 2005)으로 고모님의 기록은 이 책을 통해서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다고 했다.

   

“(차리석의) 여동생 차보석은 1892년 평안남도 맹산 함종(咸從)에서 태어나 이화학당을 거쳐 일본 고베(神戶)가사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12,3년 경 대구 신명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했다. 차보석은 1907년 기독교 선교학교로 개교한 신명여학교에서 1915년까지 재직했으며 재직 동안 교가 (校歌)를 만드는 한편 경술국치 소식을 접하고는 대성통곡했다는 일화를 남겨 신명여학교의 귀감이 되었다. 초창기 교풍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한 차보석은 신명의 참 보석(寶石)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 《임시정부 버팀목 차리석 평전》 73~75쪽-

    

 

당시 신명여학교(현 대구신명고등학교)에는 차보석 선생의 오라버니인 차원석(차리석 선생의 형) 선생의 두 딸인 영숙과 영옥도 다녔는데 기독교 학교인 신명학교의 전도에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기자는 차보석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1월 26일 금요일, 대구 신명고등학교(교장 장용원)로 단걸음에 달려가 교장선생님을 뵙고 차보석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 내려가기 전에 장용원 교장선생님께 편지를 보냈는데 교장선생님은 해외 연수를 막 마치고 귀국하여 서울에서 달려간 기자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이 자리에는 김홍구 교감선생님도 함께 하였는데 서울에서 내려가기 전에 교감선생님은 차보석 선생이 신명여학교에 부임하여 교가(校歌)를 작사할 때의 이야기가 담긴 《신명백년사》 의 해당 부분을 전화로 들려주었다.

 

“1911년 5월 둘째 주 수요일에 교가가 완성되었다. 학생들 특히 졸업을 앞둔 상급반 학생들은 졸업 전에 교가가 있어야한다고 재삼 요청이 심해지자 교장 부르엔 여사는 평양에서 온 차보석 선생과 3학년 임성례를 교가 제정위원으로 지명하였다. 두 사람은 1주일간 꼬박 기도를 드리면서 7절로 된 교가를 지었다. 이들은 목욕재계를 하면서 정성을 드려 교가를 작성하였다.” - 《신명백년사》 (1907-2007) 55쪽-

    

  

차보석 선생이 제자 임성례와 함께 목욕재계하고 지은 교가는 모두 7절로 이 교가는 1920년 전국적으로 통용된 중등음악 교과서 <창가집> 46쪽에 학교 사진과 함께 수록되어 있으며 1914년에 4절로 개작될 때까지 불리던 교가이다.    

 

 

 

지금으로부터 107년 전의 교가는 지금의 교가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서양 선교사에 의해 지어진 학교이기에 교가 역시 그 영향을 많이 받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 교가가 완성되던 바로 전해인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의해 강제로 조선의 합병 소식을 들은 차보석 선생은 교실에 들어와 교단을 치면서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를 본 이복심 외 7~8명의 학생들도 차보석 선생과 함께 엎드려 통곡했다고 당시 상황을 《신명백년사》 는 전하고 있다.(56쪽)    

 

명랑하고 야무진 차보석 선생이 대구 신명여학교에 재직한 기간은 약 4년간으로 초기 교풍(校風)을 세우고 교가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애교심을 갖도록 지도하였다. 차보석 선생이 재직한 신명여학교는 3ㆍ1만세 운동 때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 교사로 있던 임봉선(1897~1923)선생은 1990년에 애족장을 추서받았고, 미주지역에서 활약한 이희경(1894!1947)지사는 2002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

 

 

 

차보석 선생은 23살 되던 해에 대구신명여학교를 떠나 평양으로 가서 오라버니인 차리석 선생과 교육사업을 펼치다가 3ㆍ1만세운동 직후 오라버니와 상해로 망명했다. 상해에서 흥사단에 참가하는 한편 1921년에는 재상해유일학생회(在上海留日學生會)를 맡아 활약했다

 

차보석 선생이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30살 때인 1922년으로 그곳에서도 선생의 조국독립을 위한 눈부신 활약은 끊이질 않았다. 그 활동을 보면 1925년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 샌프란시스코지부 단장을 거쳐 1926에서 1928년까지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을 맡아 활약했다.

 

이듬해인 1929년에는 이 단체의 서기, 재무 등을 맡아 헌신했다. 또한 이 기간(1925~1928) 동안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어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동포 자녀들에게 한국 혼을 심는데 주력했으며 1931년에는 국어학교 재무(財務) 일을 도맡았다.

 

1931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입회하여 1932년 3ㆍ1절 기념식 준비위원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부터 1932년 3월 21일 숨을 거두기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함으로써 조국 독립의 기틀을 다지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향년 40살로 먼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차보석 선생은 교육가요,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러나 고모님(차보석)의 유일한 피붙이인 조카(차리석 선생의 아드님 차영조 씨)는 고모님의 서훈 소식도 모르고 있다가 기자와의 대담을 통해 알고는 마치 고모님을 만난 듯 기뻐했다.

 

2살 때 아버님(차리석 선생)이 돌아가셨기에 미국으로 건너간 고모님(차보석)의 생사를 알길이 없었지만 이제서라도 고모님의 서훈 소식은 칠순을 넘은 조카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차영조 씨는 혹시 자신도 모르는 고모님(차보석) 쪽의 누군가가 고모님의 서훈을 신청하여 독립유공가가 되었나 싶어 곧바로 국가보훈처에 문의한 결과, 후손의 신청이 아니라 보훈처의 자체 발굴로 서훈자가 되었다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후손이 없는 관계로 고모님의 훈장증은 아직 보훈처에서 잠자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조카인 차영조 씨 자신이 고모님(차보석, 2016, 애족장)의 훈장증을 대신 수령할 수 있느냐고 문의한 결과 보훈처 담당자의 답이 ‘안된다’고 하더란다.

 

이유인즉, 보훈처 담당자가 차보석 선생이 살던 미국에 건너가 후손 여부를 파악한 뒤 후손이 없으면 차영조 씨에게 훈장증을 수령해주겠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그 확인 작업이란 게 어느 세월에 가능한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조카인 차영조 씨가 파악하고 있는 한 차보석 선생의 후손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보훈처에서 새삼 미국으로 건너가 후손을 찾아본다니 기약할 수 없는 일이다.

 

뒤늦게 고모님의 서훈 사실을 알게 되어 기쁜 마음에 훈장증이라도 곁에 둔다면 오매불망 그리던 고모님을 뵙는 듯 기쁠 것 같아 ‘차보석 선생의 후손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훈장증을 돌려주겠다’면서 고모님의 훈장증을 수령하고 싶다는 의사를 구두로 전했으나 대답은 ‘아니오’라고 했다며 조카 차영조 씨는 보훈처에 청원서라도 내야겠다고 한다.

 

차보석 선생의 아버지 차시헌은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4형제는 원석(1870), 형석(1874), 리석(1881, 차영조 씨 아버지), 정석(1884) 그리고 따님으로 보석(1892)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1명을 두었다. 가정이지만 만일 일제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이들 형제자매는 오순도순 태어난 고향에서 정답게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상해로 미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독립운동을 하는 바람에 서로의 생사도 모른 채 오늘에 이른 것이고 보면 칠순을 넘긴 조카의 고된 삶이 투명한 유리잔 속처럼 들여다보여 가슴이 짠하다.

 

“제가 두 살 때 아버님(차리석)이 돌아가셨으니 어머님께서 얼마나 황당하셨겠습니까? 아버님은 1945년 8월 15일 중경에서 광복을 맞이하시고 9월 5일 환국을 위한 준비를 하시다가 과로로 쓰러져 9월 9일 중국땅에서 운명하셨습니다. 그 뒤 모자(母子)의 삶은 고난의 가시밭길 그 자체였지요.”

 

차리석 선생의 아드님이자 차보석 선생의 조카인 차영조(74살) 씨는 기자와의 대담 내내  독립운동가 집안의 후예로 살아온 뼈아픈 지난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주었다. 

 

“6ㆍ25전쟁 때 부여로 피난 내려가 아이스케키 통을 메고 부여 읍내를 다니던 시절, 너무나 배가 고파 어머니에게 고아원에 데려다 달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상하게도 같은 또래 애들은 아이스케키를 잘 파는데 나만 유독 잘 팔지 못했던 까닭을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동네사람들이 토박이 애들이 파는 아이스케키를 사주었던 것이지요” 어린 차영조는 피난지 낯선 동네에서 텃세부리는 아이들 틈에 자랐다. 그의 나이 8살 때였다.

 

전쟁이 끝나면 상경할 것이란 기대가 있었지만 그것도 말장 헛꿈이었다. 서울에 다리 펴고 누울 공간 하나 없는 상황이다 보니 뜻하지 않게 부여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래도 어머니가 닥치는 대로 날품팔이를 할 때는 나았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고 난 뒤부터 어린 차영조는 소년가장이 되고 말았다. 나이 12살의 피난지 부여에서 중풍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보살피며 초근목피로 살아가던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정말 이해가 안가는 일이 있습니다. 1948년 9월 22일 오후 1시 휘문중학교에서 아버님(차리석)과 석오 이동녕 선생의 사회장이 열리고 난 뒤의 일입니다. 저는 그때 5살이라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날 조의금으로 걷힌 당시 돈 80만원의 행방이 묘연한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하면 그때 환국하여 미망인이 된 어머님께서 조의금 중 단돈 1만원이라도 받았다면 온갖 고생으로 끝내는 중풍으로 쓰러지지 않으셨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지요. 어머니는 참으로 올곧은 분이셨습니다. 혹시 젊은 미망인이 어린 아들을 앞세워 무슨 도움이나 받으려는 의심을 받는 것을 단호히 차단하신 거지요.”

 

1948년 당시 80만원이면 지금의 화폐가치로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1만원만 있어도 서울에서 방 한 칸 딸린 구멍가게를 낼 수 있는 돈이라니 큰돈은 큰돈이다. 그날 들어온 조의금만 제대로 차리석 선생의 미망인에게 전달되었더라도 그 아드님이 12살 나이에 가장이 되어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아쉬운 일은 나라가 독립운동가 유족을 챙겼어야했다. 그러나 해방 후 어수선한 정국에서 친일부역자들 조차 발본색원하지 못하는 판국에 독립운동가 후손을 챙길 여력이 있었을 리 만무다. 오죽하면 70년 전 아버님(차리석) 장례식 때 조의금으로 받은 돈의 행방이 원망스러웠을까 말이다.

 

기자도 듣고 보니 당시 차리석, 이동녕 선생의 사회장 장례식 때 받은 조의금의 행방이 궁금하다. 조의금은 유족의 품으로 전달되어야 하거늘 누가 중간에서 착복했단 말인가! 유족이 그 돈으로 쌀이라도 사고 방 한 칸이라도 마련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인다.

    

 

만약 그랬다면 상급학교에 진학하여 영어를 배워 미국으로 건너간 차보석 고모의 후손들을 찾아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부질없는 공상 일뿐이다.

 

그렇다고 주저앉아서 신세한탄만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영조 씨는 비록 가진 것 없는 고단한 삶이었지만 만고에 빛나는 독립운동가인 아버님께 누를 끼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그것이 유일한 자산이요, 아버지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믿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이번에 고모님 차보석 선생의 서훈(2016년 애족장) 사실을 기자로부터 듣고 기뻐하는 조카 차영조 씨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모쪼록 고모님의 훈장증이나마 하루속히 대리 수령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게 지금 우리가 평생을 일가친척의 생사여부조차 모르고 살아온 칠순의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