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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원희복의 인물탐구]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사장 “3·1 운동 100 주년, 우리는 뭘 했다 할 수 있나” -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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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대…

등록일 16-05-13 09:49 조회 19,624
1981년 미국 시카고대학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일월서각)은 비록 외국인이 썼지만 우리 현대사의 명저로 꼽힌다. 이 책은 그동안 빈약한 사회과학적 방법론과 냉전적 선입관으로 6·25전쟁을 해석했던 우리 역사·정치학계에 충격을 준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향신문>이 ‘지식인이 꼽은 한국사회에 영향을 준 해외저술’ 조사에서 <한국전쟁의 기원>은 마르크스·엥겔스의 <자본론> 다음으로 두 번째로 꼽힐 정도였다. 이 책을 쓴 브루스 커밍스는 2007년 제1회 후광 김대중 학술상을 받기도 했다.

기자 출신으로 1980년대 ‘금서’ 번역가
당시 금서였던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이 김자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88)이다. 김 회장은 이 책 말고도 <모택동 전기1~4>, 러시아 10월 혁명을 소재로 한 미하일 숄로호프의 장편소설 <고요한 돈강> 등을 번역했다. 모두 당시 금서였다. 또 1980년대 초 미국의 스티브 쉐건이 쓴 <죽인 자는 죽는다>라는 소설을 번역했다. 이 책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이어지는 전두환 장군의 등장 등 한국 상황을 소설로 쓴 것이다.

“우연히 일월서각 사장과 경기도 파주 장준하 선생 묘소에 가다 얘기가 돼 처음 번역한 책이야. 1979년과 1980년대 우리나라 상황을 거의 그대로 픽션으로 쓴 것인데, 고약한 독재자 전두환을 ‘춘 장군’으로 묘사했지. 전두환 정권에서 책이 출간되자마자 출판사 사장, 편집장, 나 세 사람이 남산(중앙정보부)에 연행됐어. 그래도 출판사 사장이 영리해서 한 200부만 압수되고 나머지 책은 많이 뿌려졌어. 세 사람이 약식재판에 회부돼 구류를 살고 나왔지.”

김 회장은 1980년대 ‘금서’ 전문 번역가였던 셈이다. 그는 1954년 <조선일보> 공채 1기로 입사한 기자 출신이다. 당시 같이 근무했던 기자가 송건호·리영희 선생이다. 송건호 기자는 자신보다 6개월 먼저 왔고, 리영희 기자는 3개월 후배다. 특히 송건호 기자와는 외신부에서 4년을 같이 근무했다.(이 신문사에서 지금까지 필명을 날리는 유명한 모 기자는 당시 일을 못해 자신에게 혼났다고 한다)

/ 이상훈 선임기자


그가 <조선일보> 외신부 시절 했던 특종은 <뉴욕타임스>가 폭로한 얄타회담 비밀문서를 단독으로 보도한 것이다. 얄타회담이란 1945년 2월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 영국의 처칠 총리가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가진 회담이다. 여기서 신탁통치와 남북한 분할 등 대한민국 운명이 결정된 뼈아픈 회담이다. 이 회담의 비밀 대화록 전문 64쪽이 1956년 <뉴욕타임스>에 실렸는데, 당시에는 신문사조차 <뉴욕타임스>를 구독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대사관으로 달려가 <뉴욕타임스>를 입수, 비밀 대화록 전문을 몇 차례에 나눠 보도했다.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 스탈린, 처칠의 대화록을 보니까 우리가 알던 것과 달라. 중요한 대목이 바로 대한민국의 독립인데, 소련의 스탈린은 ‘가능한 즉시’ 독립시키자고 하는데 루스벨트가 ‘한국은 독립능력이 없어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야. 루스벨트는 자신들이 필리핀을 40년간 신탁통치했는데, 아직도 정부를 운영할 능력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수천 년 유구한 역사와 임시정부를 거친 우리나라가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이.”

그는 얄타회담에서 미국의 이런 주장은 이승만 박사의 ‘무능’ 때문으로 보고 있다. 임정은 당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국제연합 창설 회의에 대표단 파견을 추진했는데, 미국의 반대로 좌절됐다. 한마디로 임정의 대미외교가 엉망이었던 것이다. 김 회장은 “당시 임정은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해 미국 외교를 맡겼는데, 이는 큰 실수였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1928년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가 김의한 선생과 정정화 여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동농 김가진이다. 동농은 구한말 개화파 학자로, 1894년 갑오경장 시기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홍범 14조를 기초하고, 농상공·법무대신 등을 지낸 학자다. 동농은 을사늑약 이후 <대한민보>를 발행하며 일진회와 맞서고, 독립협회를 결성해 현재 독립문 현판석을 쓰기도 했다. 1919년 일흔넷 고령에 아들 김의한과 함께 상해로 망명해 대동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했다. 대동단은 우리나라 정당·사회단체중 사회주의를 표방한 최초의 단체다.

김 회장의 부친 김의한 선생 역시 부친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고 한인청년동맹 상해지부 재정위원, 한국독립당 감찰위원, 광복군 조직훈련과장 등을 지냈다. 김 회장 모친 정정화 여사는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았던 여성독립운동가이다. 정 여사는 시아버지와 남편이 상해로 망명한 지 두 달 후 상해로 왔다.

“옛날에 그랬지만 아버님과 어머니는 10대 초에 결혼해 소꿉친구처럼 지냈지. 그리고 성장한 16세에 같이 부부로 살았어. 그런데 남편이 시아버지를 모시고 상해로 떠나 버렸는데 혼자 시어머니 모시고 시집살이하기가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래서 친정 아버지에게 ‘상해 남편을 따라가겠다’고 해 승낙과 여비를 얻어 상해로 갔지. 상해에 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깜짝 놀랐지. 여자 혼자 상해까지 찾아왔으니.”

김자동 선생 3대에 걸친 가족사 기록. 할아버지 전기인 <동농 김가진 전>과 모친의 자서전 <장강일기>, 그리고 본인의 자서전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사진 왼쪽부터)


부모님 두 분 모두 상해 임시정부서 활동
정 여사는 이후 7~8번이나 중국 상해와 경성을 오가며 임시정부 자금 운반책으로 활동했다. 조선에서 모금된 자금을 중국으로 옮기고, 또 임시정부 안살림을 도맡아 했다. 당시 <동아일보> 상해 특파원이던 우승규 기자는 정 여사를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1928년 상해에서 태어난 김 회장은 “나의 출생은 상해 한인사회의 경사로, 이동녕·이시영·안창호·조완구·김구 등 여러 임정 어른들이 찾아와 축하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임시정부와 같이 움직였다. 그도 상해에서 항저우(1932년), 광저우(1938년), 충칭(1939년) 등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됐지만 임정 요원들은 서울에 올 수 없었다. 임정의 주요 요원들은 11월 23일 미군이 제공한 비행기로 여의도 공항에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김 회장을 비롯한 임정 가족들은 1946년 5월 9일 상해에서 배를 타고 3일 만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김 회장은 학교(보성중학교)에 입학해 조국에서 처음으로 학생이 됐다. 그는 중국에서 국어(조선어) 공부를 열심히 해 작문실력도 좋았지만, 중국에서 배우지 못한 고전 때문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래도 김 회장은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고, 6·25전쟁 때 학도병으로 참전해 미군 통역을 맡았다. 대학 졸업 후 <조선일보> 공채 1기를 거쳐, 4·19 학생혁명 이후 창간된 <민족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5·16 쿠데타가 나고 <민족일보> 발행인 조용수 사장이 불과 31세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언론계를 떠났다. 그가 언론계를 떠난 이유 중에 하나는 한 젊은 언론인의 죽음에 기성 언론이 침묵 내지 외면했던 것도 한 요인이었다.

지난 3월 2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린 임시정부 수립 97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사진전’ 개막식에 김자동 회장, 이종찬 전 국정원장,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앞줄 오른쪽 두 번째부터) 등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김 회장은 이후 개인사업·번역 등의 일을 하다 1997년 민주화 시대를 맞아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김 회장은 각종 성명·진정서를 내고 학술대회 등을 통해 우리 언론역사에서 최대 필화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했다. 결국 2006년 11월 28일 진실화해위원회는 ‘민족일보 사건은 감금·고문에 의한 조작’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2008년 1월 16일 법원은 이 사건의 재심을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했다.

김 회장은 200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이끌고 있다. 처음에는 조부와 부친·모친의 기념사업회를 하려 했지만 임정에서 활동한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기념사업회로 만들었다. 그래서 임시정부기념사업회는 거물급 몇몇 인사만의 기념사업이 아닌, 유명하지 않았지만 조국 광복을 위해 싸웠던 모든 독립운동가를 기념하고 조명하는 일을 하고 있다.

임시정부기념사업회는 매년 중국 임정의 활동을 직접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젊은 학생들은 절반 비용으로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독립운동 역사를 배울 수 있다. 또 월간(격월간)으로 <독립정신>을 발행해 독립운동의 대중화에 나서고 독립운동 역사 사진전도 열고 있다. 김 회장은 얼마 전까지 <한겨레신문>에 자신과 집안의 이런 삶을 정리해 ‘길을 찾아서’라는 자전적 이야기를 연재했다.

“대한민국 건국절은 1919년 4월 11일”
4월 총선이 있던 날인 4월 13일이 바로 법정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다. 원래 임시정부 수립은 1919년 3·1운동 한 달여 후인 4월 10일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해에 모여 밤새 토론하고 이튿날 11일 국무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 국호를 선포한 날이다.

그러나 초기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이 13일로 잘못 기록된 일본영사관 자료를 바탕으로 기념일을 정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런 면에서 정확한 대한민국 ‘건국절’은 1919년 4월 11일이다. 최근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꿔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에 그는 이렇게 일갈했다.

“미국 최대 국경일인 독립기념일이 7월 4일이야. 그날은 1776년 제3차 대륙회의에서 13개 주가 명실상부하게 영국에서 독립을 선언한 날이지. 그리고 미국은 10년이 넘는 독립전쟁을 거쳐 1789년 미국 연방헌법을 만들면서 명실상부하게 독립했고, 국제적으로 인정된 거야. 그러니 상해임시정부는 영토가 없고, 주권이 없어 명실상부한 국가가 아니어서 건국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논리가 없는 것이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미국 좋아하는 사람들 많은데, 왜 미국 건국 역사를 공부하지 않는지 몰라.”

김 회장은 또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게 국토를 상실한 프랑스가 영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기간도 분명히 정부의 연속성으로 보고 있다”면서 “대한민국 헌법에도 분명히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돼 있어. 8월 15일 건국절을 주장하는 우익 인사들의 논리는 헌법마저 부정하는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건국절 논란은 물론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 개성공단 폐쇄, 지난해 12월 일본과 종군위안부 문제의 졸속 타결 등 일련의 정부 움직임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무엇보다 그는 3년 후인 2019년이 3·1운동 100주년이라고 말했다. 임시정부 수립 역시 100주년이다. 미국 독립기념 100주년 기념물이 뉴욕항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이고, 프랑스 에펠탑이 프랑스 혁명(공화국 수립) 100주년 기념물이다. 명실상부한 건국절인 3·1운동 100주년에 대비한 아무런 기념물 논의가 없음을 그는 안타깝게 생각한다.

“3·1운동 100주년 기념물로 3·1운동의 산물인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을 제안해 놓고 있는데…. 기념탑을 세우는 것도 좋고. 100년 전 선조들은 그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나라를 찾기 위해 투쟁했는데, 편안한 우리는 뭘 했다고 후세에게 말할 수 있을까. 앞으로 3년도 채 남지 않았는데…. 기념관 착공이라도 하는 것을 봤으면 좋겠어.”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