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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정조문이 세운 교토 고려미술관은 일본에 유일한 한국 고미술 박물관으로 한-일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은 설립자 정조문(왼쪽)과 미술관 내부(오른쪽). 고려미술관 제공 일 ‘고려미술관’ 설립자 고 정조문백자에 미치는 일본인 보고 놀라30년간 조선 골동품 1700점 수집공동저서 펴낸 아들 희두씨 방한“고려 같은 통일조국 원하셨는데…” “평소 자식한테 재산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빚을 많이 남기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도 빚이 50억엔이나 될 줄은 몰랐어요.” 일본 교토에 있는 고려미술관 설립자이자 부친인 정조문(1918~1989)을 소개하는 동안 이 미술관 정희두(55) 상무이사의 표정은 시종 상기됐다. 정씨는 <정조문과 고려미술관>(다연 펴냄) 출간에 즈음하여 19~21일 서울에 들렀다. “돌아가시기 한해 전 집을 헐고 그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미술관을 지으셨어요. 재단법인을 만들고 30년 동안 수집해온 골동품 1700여점을 헌납하셨지요. 당시 시가로 따져보니 150억엔 정도 되더군요. 혹시 내가 사업에 실패해 골동품에 손을 댈까 봐 그러셨는지 허허….” 정씨의 말 틈새에 부친에 대한 존경과 자부심이 묻어났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여섯살에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간 정조문은 초등학교 졸업 뒤 집을 떠나 항만노동, 토목공사, 인력거꾼, 하천공사장 등 노동판을 전전했다. 당시 재일동포가 할 수 있는 일은 육체노동뿐이었다. 고사포 공장에서의 징용, 도쿄 대공습에서 살아남은 그는 1951년 33살에 교토에서 파친코 사업을 시작했다. 100㎏이 넘은 거구에 특유의 강단으로 선술집, 고깃집, 초밥집, 찻집으로 사업을 넓혔다. 고미술에 눈을 뜬 것은 1955년 골동품거리에서 조선 백자를 만나고부터. 무늬 하나 없이 밋밋한 항아리 값이 무려 50만엔이었다. 일본인들이 조선인이라면 갖은 멸시를 퍼부으면서도 조선 도자기는 왜 그리 높이 칠까. 일년에 걸쳐 나눠 갚기로 하고 품에 안은 게 ‘화근’이었다. “손에 넣을 돈도 없으면서 보지 않고는 못 배기고, 보면 만지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였으며, 그것이 괜찮은 물건이다 싶을 때 손에 넣지 못하면 병에 걸리고 마는 정도”로 병증이 깊어졌다. 임진왜란,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흘러든 미술품을 수복하겠다는 집념으로 발전했다. ‘일본의 간송 전형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미술관 건립에는 계간지 <일본 속의 조선문화>의 힘이 컸습니다. 1969년부터 1981년까지 13년 동안 문인 김달수를 발행인으로 50호까지 내었죠. 아버지는 취재여행 비용, 논문 고료, 제작비 등 모든 비용을 대면서도 편집에 일체 간여하지 않았어요. 동포들끼리의 집안 잔치로 그칠 것을 우려해 시바 료타로, 우에다 마사아키 등 일본 지식인을 필자로 영입하였고요. 그 결과 ‘귀화인’을 ‘도래인’으로 바꾸는 등 뒤틀린 한·일 고대사를 바로잡았죠. 그 필진이 미술관 설립 발기인과 이사진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고려미술관은 1998년 개관 10돌 특별전 중 도자기 15점을 잃는다. 희두씨는 조선 도자기를 취급하는 고미술상 2000여곳에 편지를 보내고 일일이 찾아가 신고를 부탁했다. 그의 정성은 고미술상과 일본 경찰을 움직여 기적적으로 석달 만에 10점을 되찾았다. 정씨는 가슴 아픈 사건이었지만 덤으로 고미술상한테서 유물 구입 당시 아버지의 행적을 듣게 되었다고 말했다. 특이하게도 정조문은 생전에 한번도 고향을 찾지 않았다. 조국의 분단은 재일동포 사이에도 그대로 재현돼 민단과 총련으로 갈라져 대립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통일되기 전에는 바다를 건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미술관 이름에 ‘고려’를 앞세운 것은 고려가 통일 왕조였기 때문이다. “미술관을 들어서면 남에도 북에도 없는 광장이 펼쳐집니다.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가 바라던 통일이 실현된 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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