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목 | [광복 70년 특별기획Ⅱ 수지의 뿌리찾기 아리랑]“독립운동가 서영해 손녀 찾았다” -경향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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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id=2015081018…[85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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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대한민국 임시정부 프랑스 대사로 활약… 오스트리아 여성과 결혼 아들 낳고 헤어져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대외관계 및 마케팅 담당 공무원으로 일하는 수지 왕(Suzie Wong)은 요즘 매우 흥분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내년에 자신의 뿌리인 한국에 와 꿈에 그리던 혈육을 만날 기대감 때문이다. 수지의 정확한 성은 중국인 성씨인 ‘왕(Wong)’이 아니라 한국인 성씨 ‘서(Seu)’이다. 그에게 중국인 피는 단 한 방울도 없고 한국인 피가 흐르고 있다. 단지 그에게 닥친 상황이 그를 왕씨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의 이름에는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 일본 강점, 그리고 해방과 분단이라는 20세기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대관절 한국에서 이역만리 떨어져 사는 한 여성의 삶이 우리의 현대사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그의 가족 뿌리를 거꾸로 더듬어 올라가 보자. 할머니의 재혼으로 아버지 성 바뀌어 수지는 197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스테판 왕’(원래 이름은 ‘스테판 칼 알로이스 솔가시 서’이다)이고, 어머니는 ‘헨리에테 스텝케 비에센더’다. 어머니는 독일 플로스버그 출신으로, 빈 응용예술대학에 유학왔다가 아버지를 만나 1969년 결혼했다. 수지는 빈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한 수지는 박물관과 골동품 복원사업 회사 등에서 일하다 2005년부터 빈국립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다. 11살 아래인 여동생 스테파니는 빈대학에서 생태학과 행동생물학을 전공하고 빈동물원 생물학자로 근무한다. 수지의 아버지가 원래 이름인 ‘스테판 칼 알로이스 솔가시 서’에서 ‘스테판 왕’으로 바뀐 사연에서부터 바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운명’과 관련된다. 수지의 아버지 스테판은 1939년 9월 20일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스테판의 어머니, 그러니까 수지의 할머니는 엘리자베스 C 브라우어(엘리자)이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인 엘리자는 1930년대 프랑스 파리 미술대학에 유학을 갔다. 그때 파리에서 13년 연상의 한국 독립운동가 겸 기자인 서영해를 만났다. 두 사람은 1937년 빈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엘리자는 남편 서영해의 성 ‘서’씨를 따 ‘엘리자베스 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1939년 빈에서 아들 ‘스테판 칼 알로이스 솔가시 서’가 태어났다. 수지는 “할머니는 빈 미술대학교와 파리 예술대학교에 유학한 오스트리아와 유럽에서 인정하는 화가였다”면서 “1977년부터 예술사진 작가로 활동하면서 빈과 이탈리아에 갤러리 두 곳을 소유했다”고 말했다.
서영해의 아들 스테판 왕(맨 왼쪽)이 생존 시 딸 수지(가운데)와 스테파나(맨 오른쪽)와 함께 파티에 참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1930년대 프랑스에서 뛰어난 예술적 감각의 오스트리아 여성과 사랑하고 아들까지 둔 서영해라는 한국인은 누구였나. 바로 이것이 대한민국 현대사와 연결되는 ‘운명적’ 고리이다. 서영해의 본명은 서희수(徐羲洙)로, 1902년 부산 출신이다. 서희수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수배되는 처지가 되자 아예 상해 임시정부로 갔다. 이때 이름을 영해(嶺海)로 바꿨다. 임정 어른들이 “부모님 걱정하시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권유를 마다하고 서영해는 심부름을 하며 독립운동을 배웠다. 나이 17세, 키 160㎝에 불과한 서영해는 ‘임정 막내’로 통했다. 마침 임정 김규식·장건상 선생이 서영해에게 프랑스 유학을 권유했다. 왜냐하면 당시 유일한 국제기구인 국제연맹이 파리에 있어 파리 외교가 매우 중요했지만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못하던 서영해는 1920년 12월 31일 혼자 프랑스에 도착했다. 서영해는 뒷날 “내 이름처럼 태산을 끼고 북해를 넘는 기개로 구체적 계획은 없었지만 흉중은 세계정복이라는 포부로 가득찼다”고 회고했다. 서영해는 리세(유치원부터 고교까지 교육 과정)에 입학해 12년 과정을 6년 만에 마치고, 1929년 파리 신문학교(에콜드주르날리즘)를 졸업했다.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배운 서영해는 파리에 ‘고려통신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서영해는 국제연맹에 일제의 한국 침략 부당성을 알리는 외교전을 펴는 한편, 한국의 실상을 유럽에 알리는 작업을 했다. 1929년 쓴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의 주변>은 자신의 자서전 격으로,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어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이 소설에는 단군신화에서부터 ‘3·1독립선언서’를 수록했다. 그는 또 <심청전> <흥부와 놀부> 등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한국을 유럽에 알리는 일을 했다. 1935년 임시정부는 그를 프랑스 외무행서로 임명했고, 프랑스는 1945년 임시정부를 정식국가로 인정했다. 임정은 1945년 3월 14일 서영해를 프랑스 대사로 공식 임명했다. 당시 임정 외교에서 ‘미국에는 이승만, 유럽에는 서영해가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다. 특히 서영해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식 직전 김구의 대일선전포고서를 파리에 있는 일본대사에게 통고하기도 했다.(부산독립운동사, 부산지방보훈청, 2005)
1930년대 이승만과 함께한 서영해(사진 왼쪽)와 부인 엘리자(신문 촬영). 서류는 서영해와 엘리자의 결혼증명서다. 파리에 ‘고려통신사’ 설립한 서영해 서영해가 파리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파리에 유학 온 오스트리아 여성 엘리자를 만났다.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역시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934년 서영해를 만나러 파리에 왔다가 프란체스카를 만난 것이다. 사실 서영해는 이승만과 형님 아우하는 사이였고, 프란체스카 여사와도 가까왔다. 서영해의 조카 서정인은 “서영해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편지 심부름을 자주 했다”고 말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 서영해와 오스트리아 출신 여성 예술가는 파리에서 사랑했고, 1937년 정식 결혼식을 올리고 1939년 아들까지 낳았다. 완벽했던 두 사람의 결혼은 ‘세계적 격랑’이 그냥 두지 않았다. 히틀러는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1939년 9월 2차 대전을 일으킨 것이다. 임신한 엘리자가 고향 빈으로 돌아와 아들을 낳은 것이 바로 이때다. 그러나 독일에 합병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적(敵)이었다. 서영해가 임정 외교부장 조소앙에게 보낸 편지(1940년 10월 15일 파리)에는 ‘파리는 독일군 점령하에 있으며 통신이 두절돼 중국인 군의관 편에 보낸다’는 서두와 함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양상을 설명하고 임정의 프랑스 외교대응책을 지시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당시 임정에 있던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은 “서영해 선생은 드골이 영국으로 망명해 자유 프랑스운동을 하는 소식을 중경에 있는 임정에 전했고, 임정은 그를 런던주재 대표로 임명했다”고 말했다. 1945년 5월 7일 독일이 항복하고 유럽에 평화가 왔지만 서영해와 엘리자는 재결합하지 못했다. 1945년 10월 10일 엘리자는 같은 마을에 살던 중국인 의사 ‘식닝 왕’과 재혼했다.
1948년 프랑스 신·구 대사가 경교장을 방문해 김구(앞줄 가운데)와 만났을 때 이승만 박사(앞줄 오른쪽 두 번째)와 부인 프란체스카(앞줄 왼쪽 두 번째)도 함께했다. 당시 주 프랑스대사 서영해(뒷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와 노기남 신부(뒷줄 오른쪽 다섯 번째)의 모습도 보인다. 서영해 1946년 귀국, 대학서 불어 가르쳐 1946년 26년 만에 귀국한 서영해는 대학(연세대, 이화여대)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며 국내 정치상황을 지켜봤다. 일본인이 만든 프랑스어 교재를 버리고 손수 프랑스어 교재를 새로 만들었다. 당시 그에게 프랑스어를 배운 사람이 극작가 차범석,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 김동길 연세대 교수 등이다. 서영해의 정치적 입장은 이승만보다 김구 쪽이었다. 서영해는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 협상을 지지하며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차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영해는 1948년 스무살 아래 경남여중 교사 황순조와 재혼했다. 이승만의 정치노선과 친일파가 득세하는 세태에 실망한 그는 다른 세 부부와 함께 외국에서 살 계획을 세웠다. 서영해는 마지막으로 김구를 만나 인사를 했고, 아들 김신은 “아버지의 분부로 약간의 달러를 환전해 여비에 보태쓰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1948년 10월 서영해 부부가 먼저 상해행 배에 올랐다. 상해에 도착한 서영해 부부는 프랑스로 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중국 국적에 프랑스 여권까지 있는 서영해의 프랑스 입국은 어렵지 않았지만 부인의 프랑스 입국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비자 문제로 프랑스 행이 늦춰지고 있던 즈음 또 한 번 ‘세계적 격랑’이 서영해를 덮친다. 1949년 10월 중국대륙이 공산화 된 것이다. 한국인은 모두 억류됐다가 1949년 11월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서영해는 중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귀국 수송선 탑승이 불허된 것이다. 서영해는 아내에게 ‘먼저가 기다리라’고 달랬다. 하지만 이후 부인과 연락이 끊겼고,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결혼 1년 반 만이다.
서영해 부인 황순조는 서영해의 유품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해 ‘영해문고’로 보관돼 있다. 사진은 이 ‘영해문고’ 중 ‘국제연맹 제출 조일관계 사료집’으로, 고대부터 한국과 일본은 역사가 다른 나라이고, 강제병합과 한국의 독립운동 내용을 정리한 문건이다. 이 사료집 서문을 춘원 이광수가 썼다. 이후 서영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중국에서 죽었다는 설, 프랑스로 갔다는 설, 심지어 일부 극우인사들은 그가 월북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후 건국훈장 애족장이 서훈된 것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부산지방보훈청이 발간한 <부산독립운동사>에도 ‘중국에서 행방불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4·19 학생혁명이 일어난 이듬해인 1961년 2월 26일 진보적 세력이 망라해 결성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명예의장에 ‘서영해’라는 이름이 있어 혹 서영해가 혼자 프랑스에 갔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어찌됐든 이후 서영해의 행적은 미스터리다. 혼자 귀국한 황순조는 선생을 하며 40년 동안 남편을 기다리다 1989년 세상을 떠났다. 서영해의 저서 등 유품은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됐다. 한편 서영해의 부인 엘리자는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예술사진 작가로, 작품이 빈의 세계적 박물관 알베르티나와 프랑스 국립도서관 등에 소장될 정도였다. 그러나 엘리자는 1970년 이후 아들과 거의 교류를 끊고 살았다. 엘리자는 이후 한 번 더 결혼했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들 ‘스테판 칼 알로이스 솔가시 서’는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이름이 ‘스테판 칼 알로이스 솔가시 한닝 왕’(스테판 왕)으로 바뀐다. 스테판 왕은 빈 응용예술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해 건축가가 됐다. 수지는 아버지에 대해 “아버지는 워커홀릭일 정도로 성실한 건축가로, 학교·아파트 리모델링을 감독하기도 했고 빈 지방재판소 재건축도 그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스테판 왕은 73세인 2013년 1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서영해 부인 황순조는 서영해의 유품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해 ‘영해문고’로 보관돼 있다. 이것이 서영해와 그의 부인, 아들, 손녀에 대한 가족사이다. 1902년 부산에서 시작해 중국 상해, 그리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다시 상해까지 이어지는 ‘세계적 격랑’을 온몸으로 부딪쳐 온 한국인 서영해. 비록 그의 사망연도는 물음표이지만 그가 한국과 유럽에 남긴 유산은 적지 않다. “한국인 할아버지에 대한 의문은 삶을 관통하는 질문이었다”
서영해의 손녀 수지는 딸을 키우며 할아버지부터 3대에 이르는 가족사의 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수지 제공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2005년부터 빈 국립도서관 마케팅 부서장으로 일하고 있다. 도서관 마켓팅, PR, 이벤트 등을 책임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가구, 그림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골동품 숍을 2개 운영하고 있다. 4년 전부터 건축가와 엔지니어 등의 친구들과 함께 ‘국경 없는 건축’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소외된 사람을 돕는 사회사업도 하고 있다.” 할아버지 서영해와 관련한 유품이나 기억이 있는가. “아버지 스테판 왕과 할머니 엘리자는 1970년대부터 교류를 거의 하지 않아 사실 할머니에 대한 삶을 자세히 모르고, 단지 아버지에게서 들은 단편적인 이야기가 전부이다. 지난 6개월간 할아버지 유품을 찾기 위해 할머니의 세 번째 남편과 연락을 취했다. 그분이 할머니의 법적 상속인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답변이 없다.”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의문은 언제부터 들었나. “할아버지가 누구셨는지는 늘 우리(자신과 동생)의 삶을 관통하는 질문이었다. 우리는 할머니와 단절돼 자라났기 때문에,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야기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나는 빈대학교에서 미술사를 전공해 증조부에 대한 연구(칼 브라우어)를 했고, 한국인 할아버지에 대한 연구도 하고 싶었다.” 그동안 뿌리 찾기 노력에 대한 성과가 있었는가. “아버지는 1970년대부터 자신의 아버지, 그러니까 할아버지에 대해 알려고 노력했다. 아버지는 서영해 할아버지가 프랑스어로 책을 저술했고, 기자였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책을 찾으려 했지만, 빈에서 찾을 수 없었다. 그때는 인터넷 검색도 없던 시기였다. 그런데 2009년 인터넷에서 서영해 할아버지의 책이 한국국립도서관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서야 서영해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 어떤 계기로 기자에게 연락했는가. “그 후 할아버지에 대해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관, 빈대학 한국사 교수, 관련 전문가들에게 문의했지만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그러다 올해 6월 빈에 연구차 온 김진아 교수를 만나 함께 자료수집을 시작했다. 김 교수는 원 기자가 10년 전 보도한 서영해 선생에 대한 기사를 찾아 우리에게 알려줘 연락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 “내년에 동생과 한국을 방문해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할아버지 일기장(자전적 소설)을 보고 싶다. 이미 직장에 3개월 휴직 신청해서 허가를 받은 상태다. 한국의 문화, 역사를 배우고 할아버지에 대한 책도 내고 싶다. 물론 친척도 찾아 만나보고 싶다.” 기자도 10년 전 만난 서영해 선생의 조카 등 가족을 다시 찾았다. 그런데 이사했고, 국가보훈처를 통해 확인해도 옛 주소뿐이다. 하지만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관을 통해 한국 정부에 협조를 얻는다면 친척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너무 기쁠 것이다. 현재 우리 가족은 매우 단출하다. 여동생과 나, 그리고 조카뿐이다. 우리는 매우 가깝게 지내고 있는데, 갑자기 많은 친척을 만난다면 대가족이 되는 것이니까 멋진 일이라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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