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목 | “4·3 다랑쉬굴의 아픔, 이제라도 치유해줬으면” - 한겨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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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526179.html[7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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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여 만에 ‘다랑쉬굴의 참상’을 세상에 털어놓고 또 20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80대 노인의 얼굴은 개운하지 못했다. “해마다 이때만 되면 자꾸 생각나. 너무 일찍 세상에 알려진 것만 같아. 몇 년 뒤에만 알려졌으면 어떻게 됐을까….” 20년 전 처음으로 세상에 다랑쉬굴의 비극을 알린 채정옥(86)씨는 30일 회한이 묻어나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1992년 4월 그의 증언으로 제주 섬 동부지역 제주시(당시 북제주군) 구좌읍 다랑쉬오름 인근 들판 ‘다랑쉬굴’에서 11구의 4·3 희생자 유해가 발견됐다. 이 사건은 4·3의 비극을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됐고, 진상규명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유족들이 희생자 주검들을 무덤에 안장하자고 호소했지만, 노태우 정부 시절이던 당시 정보기관과 경찰, 제주도 등이 개입하면서 끝내 5월15일 화장돼 구좌읍 김녕리 앞바다에 뿌려지고 말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4·3 유족들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소? 그 뒤에 발견됐으면 유족들도 희생자들의 한을 풀고 안장하자고 했을 거야.” 오랜 세월 굴속에 갇혀 있던 역사적 비극의 진실을 드러냈지만, 희생자들의 넋을 온전히 위로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진하게 묻어나왔다. 아버지와 숙부를 다랑쉬굴에서 잃은 고광치(72)씨는 “화장한 유골을 조금이라도 간직하려고 성냥갑을 지닌 채 배에 올랐지만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4·3 와중에 부인과 3살 난 아들, 부모, 고모가 차례로 경찰에 희생당한 채씨는 “4·3 문제가 온전히 해결된 건 아니다”라고 힘줘 말했다. 이명박 정부 4년이 지나도록 4·3 희생자들에 대한 관심이 아직 미흡하다는 속내였다. “고문을 당해 장애를 겪는 이들에 대한 대책도 있어야 하고, 피해자 대책도 더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해. 20년이 지난 지금도 진실이 다 드러나지도 않았고….” 다랑쉬굴 유해는 제주4·3연구소가 소문을 추적하다 91년 12월 발견했고, 이어 사건의 실상을 기억하던 채씨를 만나면서 진상이 드러났다.
1948년 12월18일 군·경·민 합동토벌대는 다랑쉬굴에 피신해 있던 9살 어린이부터 51살 부녀자까지 주민 11명을 발견했다. 주민들을 굴 안쪽으로 몰아넣은 뒤 짚에 불을 붙였다. 주민들은 연기에 질식해 모두 목숨을 잃었다. “고통을 참지 못해 손톱으로 땅바닥을 파거나, 귀나 코에서 피를 흘리는가 하면 괴로운 표정으로 바위에 머리를 부딪혀 처참하게 숨져 있었어.” 당시 산에서 지내던 채씨는 그날 밤 주검들을 정리하고 면포를 덮어주고 돌아섰던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 이듬해 5월 산에서 내려와 경찰에서 고문을 받았으나 무죄로 풀려난 뒤 한국전쟁 때는 군에 입대해 훈장도 받았다.
한국 현대사 격랑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그의 증언으로 세상에 드러난 다랑쉬굴은, 지금 4·3 순례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4·3 비극의 상징적 장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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