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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년기획]다·만·세 100년, 한민족의 대전환 가져온 사건…‘3·1혁명’으로 불러야 한다-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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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대…

등록일 19-02-11 21:58 조회 16,907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기고

1919년 3월1일 덕수궁 앞에 모인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19년 3월1일 덕수궁 앞에 모인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독립운동가들 ‘혁명’으로 불렀고 
중국 신문·잡지도 그렇게 썼지만
제헌국회가 헌법 초안 만들 때 
‘과격용어’ 주장 받아들여져 격하

[신년기획]다·만·세 100년, 한민족의 대전환 가져온 사건…‘3·1혁명’으로 불러야 한다

역사는 정명(正名)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동학난→동학혁명, 4·19의거→4·19혁명, 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이 사례이다. 기미년 민족적인 항쟁을 일제는 폭동·소우 등으로 깎아내렸지만 독립운동가들은 3·1혁명, 대혁명 등으로 부르고 중국의 신문 잡지도 그렇게 썼다.

제헌국회가 헌법초안을 만들 때 한민당 계열 일부 의원들이 초안의 3·1혁명을 이승만 국회의장에게 ‘과격용어’라 주장, 받아들여서 오늘에 이른다. 청교도혁명, 프랑스대혁명, 신해혁명, 러시아혁명 등 외국의 변혁운동은 혁명이라 부르고, 심지어 4차 산업혁명, 1968년 5월 프랑스 등 유럽의 시위에는 68혁명이라 호칭한다. 3·1운동이 아닌 혁명이라 불러야 하는 이유를 밝힌다.

첫째, 국치 9년 만에 친일파를 제외한 전민족이 하나가 되어 자주독립을 선언하였다.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시위에 참여한 것은 세계혁명사에서 처음이다. 

둘째, 군주제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민주공화제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민족대표들이 법정에서 독립하면 민주공화제 국가를 수립할 것이라 진술하고, 각종 지하신문은 민주공화제를 추구했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를 받아 민주공화제를 채택했다. 

셋째, 여성이 사상 처음으로 역사 현장에 등장하였다. 4000년 동안 남성위주의 가부장제도에서 신음해오던 여성들이 독립된 주체로서 사회에 참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넷째, 신분해방의 측면이다. 조선의 ‘천민계급’에 속해 있던 기생·백정·광대 등 하층민들까지 조국해방투쟁에 참여하여 평등사회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섯째, 비폭력투쟁이다. 3·1혁명의 지도부는 처음부터 비폭력, 일원화, 대중화를 지침으로 하였다. 이 사실 역시 세계혁명사 초유의 일이며, 촛불혁명의 모형이 되었다.

여섯째, 세계 피압박민족 해방투쟁의 봉화 역할을 하였다. 중국의 5·4운동을 비롯, 인도와 이집트, 중동과 아프리카 제국의 반식민지 해방투쟁에 영향을 주었다. 

일곱째, 국치 이래 독립운동 일각에서 진행되어온 존왕주의 복벽운동을 중단시키고, 주권불멸론-국민주권승계론에 따른 국민국가시대를 열었다. 

여덟째, 국내만이 아니라 해외에 나가 살던 이주민과 망명자들까지 하나로 묶어내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이루었다. 한인이 거주하는 세계 곳곳에서 독립 만세에 참여하였다.

아홉째, 독립의 당위성과 함께 일제의 패권주의와 침략성을 폭로하고, 인류가 지향해야 할 국제평화·평화공존·인도주의 등 이상을 제시하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등장하였다.

민주공화제 전환의 계기 만들고 
여성의 사회 참여·신분 해방 기여
세계 반식민지 투쟁에 봉화 역할 
거족적 항쟁 걸맞은 ‘정명’ 찾아야

이와 같은 대전환을 가져온 것이 기미년 3~4월 한민족이 성취한 3·1혁명이다. 이를 일컬어 ‘혁명’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만3000여명의 사상자와 4만6000여명이 투옥된 거족적인 선열들의 항쟁에 부끄럽지 않은 정명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