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 독립견문록, 임정을 순례하다 ① 상하이 ◆


대한민국 임시정부 3000㎞ 순례에 나선 취재단. 왼쪽부터 김유태·이승환 기자, 홍소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자료실장.
팬티와 양말 빨래가 전깃줄 사이에 걸린 낡은 쪽방촌으로 그의 집은 2층 단칸방이었다. 기와 하나도 벽돌 하나도 멀쩡한 형태가 없을 만큼 이미 폐허가 된 골목길은 올해 재개발 공사가 시작되면 자취 없이 사라질 예정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예관 신규식(1879~1922)의 숙소 얘기다. 예관의 마지막 순간을 추모하며 그의 집 앞을 서성였다. 예관 신규식의 생애엔 형용 불가능한 뭔가가 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사흘을 굶던 예관은 독약을 마셨다. 가족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와 생명은 건졌지만 시신경이 상해 남은 생애를 `애꾸`로 견뎌야 했다. 훼손된 신체마저 예관은 투지의 상징으로 활용했다. `예관`이란 그의 호(號)는 `흘겨볼 예, 볼 관`을 쓴다. "왜놈들을 흘겨보겠다"란 함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다시 자결을 시도했다. 이듬해 상하이로 망명한다. 진짜 위대함은 여기서 시작된다. 중국 정부와 손을 맞잡아 나라의 독립을 이룬다는 전략이었는데 중국의 혁명이 우선이고, 그 여력을 대한민국 독립에 활용한다는 계산이었다. 예관은 쑨원을 대면하며 이렇게 말했다.
"중국 혁명이 한국 독립에 직결된다."
마음먹기에 따라 일제라는 사지에서 탈출 가능하다고도 예관은 봤다. `마음이 죽어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고, 망국(亡國)의 원인은 이 마음이 죽은 탓이다.` 예관은 독립운동가들의 분열을 꾸짖으며 25일간 단식했고 결국 1922년 이승을 등졌다. 불식(不食), 불언(不言), 불약(不藥)의 결과였다. 예관의 유언은 두 글자라고 전해진다. "정부…, 정부…."
예관의 바로 앞집은 근대 사상가 천두슈(陳獨秀)의 옛집이었다. 지금도 건물이 여전하나 `곧 건물이 헐릴 예정이니 출입을 절대 금한다`는 표식이 대문에 붙어 있었다. 천두슈는 중국 공산당의 실질적 창시자다. 그는 신규식과 교류하며 양국 외교를 막후에서 지원했다. 천두슈의 옛 집터는 중국 신문화운동의 상징이라 불러야 마땅할, 잡지 `신청년(新靑年)` 편집부의 자리이기도 했다. 소설가 루쉰의 `아Q정전` 첫 회가 1921년 `신청년`에 수록된 바 있다.
옆집 주민에게 물어보니 "당연히 저 집도 조만간 헐린다. 동네가 모두 사라질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말년에 의회민주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변절`한 까닭인지, 중국 공산당 창건 기념관으로 쓰이는 `중국 제1차 전국대표대회지` 로비에 걸린 십수 명의 얼굴 부조(浮彫)에서 천두슈는 보이지 않았다.
[상하이 =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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