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 독립견문록, 임정을 순례하다 ① 상하이 ◆
![백범김구기념관 1층 로비의 백범 석상 아래에서 백범 김구의 증손자 김용만 씨를 만났다. 미국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하고 현재 국내 방위산업체에서 대리로 근무 중인 김 씨는 서울시 3·1운동 100주년 사업추진단 시민위원310 단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사진 = 김호영 기자]](http://file.mk.co.kr/meet/neds/2019/02/image_readtop_2019_86527_15499728683633929.jpg)

백범김구기념관 1층 로비의 백범 석상 아래에서 백범 김구의 증손자 김용만 씨를 만났다. 미국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하고 현재 국내 방위산업체에서 대리로 근무 중인 김 씨는 서울시 3·1운동 100주년 사업추진단 시민위원310 단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사진 = 김호영 기자]
친구들과 장난치다 걸리면 꼭 한두 대씩 더 맞았다. 호된 회초리가 `역차별`같아 억울했다. 책상 옆 친구들이 읽는 위인전엔 주름살 가득한 증조부 얼굴이 선명했다. 표지를 볼 때마다 어린 마음에 무형의 무게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느덧 `깨달은` 까닭일까. 지난 7일, 백범 김구의 하얀 석상이 내려다보는 서울 백범김구기념관 로비에서 그와 대면했다. 백범 김구 증손자 김용만 씨(34)다.
"증조부 존재를 어린 시절 만화 `백범일지`를 보며 어렴풋이 알았어요. 그 뒤로 가업은커녕 제 인생 살겠단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생각의 끝엔 언제나 책임감이 더 지배적이었습니다. 백범은 제 정체성의 90%를 차지하니까요."
증조부 그늘을 비껴서서 아들이 자라길 모친은 늘 바랐다. `백범 혈통`이니 간혹 대통령 행사에 따라갈 기회가 생겨도 어르신들은 그를 배제했다. 거만해질지 모른다는 이유였다. 중학교 때 미국으로 떠났고 한국인 친구조차 그의 정체를 몰랐다. 조지워싱턴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기까지 미국에 거주했지만 시민권은커녕 영주권도 신청하지 않았다.
백범을 두고 그는 "두렵다"는 표현을 꺼냈다. "백범의 장남 김인, 그러니까 저의 큰할아버지는 충칭 임정 시절에 폐렴으로 돌아가셨어요. `어찌 내 아들이라고 공금으로 병원을 가느냐`는 증조부 뜻이었죠. 결국 광복 전에 소천하셨어요. 타인에겐 따뜻해도 공사가 명확했고, 특히 가족에겐 차가운 분이셨어요. 백범께서 지금 절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 늘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안중근`이란 세 글자는 마치 백범이 자신에게 내린 숙제같다. "안중근 의사나 동농 김가진 선생님처럼 해외에 묻힌 독립운동가가 다수예요. 무력해지는 저를 느낄수록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됩니다. 미흡한 힘이라도 보태고 싶어요."
귀국 후 방위산업체 LIG넥스원에서 대리로 근무하지만 올해는 그에게 더 특별한 해다. 그가 내민 명함에 `서울시 3·1운동 100주년 사업추진단 시민위원 310단장`이라 적혀 있었다.
운명의 굴레가 독립운동을 기리는 힘을 그에게 건넸을까. "당연히 처음엔 거절했어요. 감히 어떻게 제가 장(長)이란 직함을 달겠어요. 뒷짐지면 그건 겸손이 아니라 방만이라며 혼났어요. 재차 고사하니 `우리 다 죽고 3·1운동 200주년에 할 거냐`라고 더 혼났죠. 살아 있을 때 이어받으란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인터뷰 내내 백범 얼굴이 자꾸 겹쳤다. `닮았다는 얘기 얼마나 듣느냐`고 묻자 "요즘 살이 붙었는데 안경까지 쓰면 내가 봐도 비슷할 때가 있다. 안경, 그래서 절대 안 쓴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결혼했지만 아직 자녀가 없다는 그는 훗날 증조부를 어떻게 설명할까. 불현듯 궁금해 물었는데 답변이 거침없었다.
"훗날 우리 후손 세대가 비로소 자유를 얻을지, 더 책임이 필요할지는 지금 저희 세대가 뭘 하는지에 따라 다를 거예요. 친일하면 삼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삼대가 망한다죠? 그 명제가 틀렸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상하이 =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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