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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상해판)『獨立新聞』의 대동단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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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등록일 12-03-06 11:06 조회 7,093

(상해판)『獨立新聞』의 대동단관련기사

 

○1919년 8월 29일 (3면)

•「대동단 조직」

□□의 下에 不屈하며 민족적 독립의 정신을 발휘하는 本國 독립당은 경성서 대동단을 조직하고 기관보로 대동신보를 창간하야 其 취지 강령을 발포하엿는데 該 決議條文에 독립정부 성립할 時리지 국민사무를 擔仕한다 하엿더라.

 

•「대동신보 창간」

今月 十日에 在

경성 대동단 본부는 대동신보를 活版 인쇄로 창간하엿는데 第一號가 本社에 到하다.

 

○1919년 9월 4일 (3면)

「대동단의 활동」

某處의 私報를 據하면 본국 각지에 산재한 무수한 小團體의 去就가 一致됨은 精神上 관련이 필요한 緣故라.

國恥日 경성 독립군의 再次 활동은 대동단의 預定의 계획이며 旣히 각지 단체와 互上 聯絡이 有하매 더욱 활동범위가 확대되리라하다.

 

○1919년 12월 15일 (2면)

•「대동단과 그 首領」

其基礎는 확고 不動

국내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는 대동단의 성립과 활동에 대하여서는 本報 임의 여러번 보도한 바어니와 此擧에 專혀 其謀에 當한 이는 同團 수령 全協씨라.

同團은 벌서부터 기관지 대동신보를 발간하야 全道에 배포하고 該團의 조직 其他에 관하여는 여긔 記載할 바가 아니나 數月前부터 各地에 봉기한 시위운동의 주장자는 거의 此대동단이라. 去 日皇생일에는 해외와 策應하야 경성 평양 각지에서 시위운동을 일시에 起하야 적의 心膽을 寒케한지리 불행히 其 일부 계획은 적의게 탄로되엿다 하며 今回에는 其수령이 敵手에 入으하엿스나 同團 의 조직은 결코 一首領의 被捉으로 동요할 리 萬無하며 從今으로 더욱 활동의 步를 進더하리라.

同團 수령 전협씨는 本年 四十四세인대 富用군수 일진회 총무를 會經단하엿고 現今 주소는 서간도 某地지라. 三月에 국내에 入하야 국권 光復을 목적하고 前述한 대동단을 조직하야 著著활동을 개시하니라. 동시에 被擒한 鄭雲復씨는 該團과 밀접한 관계가 잇섯다.

同團의 인쇄소는 先日 敵警에게 발각됨으로 再히 某處에서 再擧를 계획 중 불행히 다시 발각 되여 敵警은 牛車 三臺로 인쇄기계 등을 압수하엿다고.(此項 大阪朝日에 依함)

 

•「의친왕 向滬의 동기」

광무제의 崩御는 확실히 日人의 毒弑

三日에 기자는 의친왕에 관한 委細한 사정을 알기 위하야 김가진 선생을 그 僑寓에 방문하다. 백발 童顔의 노선생은 마츰 내방한 박은식선생과 懇談 중이라 기자는 일인의 신문에 선생이 의친왕의 來滬사건에 대하여 관계가 깁다는 말과 또 의친왕이 상해로 來하려함은 대동단 간부의 위협을 因홈이라는 보도가 잇슴을 告하엿더니 선생은 「일인이 한 말이면 의례히 거즛말이지오」하고 당신이 수십년래 일본 정치가와의 교제에 아즉 성실한 자를 보지 못한 것과 당신의 일생이 排日의 일생인 것을 말슴한 후에 의친왕의 결심한 동기에 관하여 如左히 설명하다.

의친왕은 일반 국민보다도 일본의게 대하여 원한이 깁풀것이라. 그의 親書(本報二十九號所載)에도 말한바와 갓히 그의 母后와 父皇이 다 일본의 毒手에 弑한□ 되엿고 또 合倂이래 십년간 그는 幽閉의 몸이 되여 一步도 門外에 出함을 不得하엿스며 或 출입한다하면 반다시 일경이 동행하다 余도 屢次 會面할 기회를 구하엿스나 마참내 엇지 못하고 余가 경성을 출발하기 얼마전에 겨오 간접으로 『만나기는 만나야겟는데 엇더케 만나나』하는 傳言을 들엇을 뿐이라.

近侍者를 介하야 심문한 바에 의하면 그는 恆常外遊의 意가 잇섯다하며 특히 광무제 弑逆사건 이래로는 일본의 不義와 暴虐을 세계의 공론에 訴함이 아니면 死하야 부황 모후와 對할 면목이 업다 하엿다하다. 그러다 그는 단독으로 결행할 처지 난안인즉 대동단 간부의 周旋이 유력한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결코 위협을 못이김이라함은 넘어 의친왕을 侮辱함이라. 余와도 누차 간접으로 동행을 상의하엿슴을 보더라도 그 결심이 오래된 것과 또 자발적 임을 알지라. 또 임시정부에서 전하를 초청하엿다함은 전혀 虛言이며 하물며 전하를 임시정부의 수령으로 삼넘다 함은 실로 無知한 자의 言이라.

선생은 다시 광무제 崩御에 관하여 確言호대 「광무황제의 崩御는 毒弑가 분명하오 나는 崩御 五日전에 陛見하엿거니와 극히 건강하기고 유쾌하시게 談話하심을 보와슨즉 아모리 인생이 無常이라 하더라도 그러케 속히 도라가실 理도 업고 또 玉體에 其中에도 胸腹部와 面部에 毒班赤班이 잇고 口孔鼻孔 其他로 腐한 피가 흘넛슬 뿐더러 폐하끠셔 臨終에 「내가 무엇을 먹어서 이러나 이것을 고칠 수 업나냐」하섯스며 또 日人의 敎唆를 受하야 폐하끠 독을 進한 주모자가 韓相龍의 兒 韓相學인 것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오. 영친왕끠서 毒弑사건을 探知하시고 덕수궁에서 戚臣과 귀족을 불러 調査하섯스며 그 翌日에 日人들이 비밀리에 불치듯 폐하를 동경으로 모서간 것도 사실이오. 侍醫 安商浩가 某 청년외게 대하야 광무제의 崩御는 분명 毒弑라고 증언하엿다는 說도 잇거니와 毒弑인 것은 사실이오」하야 悲憤을 못이겨 하시며 「그러면 의친왕전하게서 부황과 모후와 조국의 원수를 報키 위하야 본국을 탈출하려함이 人情의 □□이 아니게소」할 때에 老 眼 에 눈물이 빗날 때에 기자도 黯然함을 禁치 못하다.

최후에 敵이 의친왕끠 대하여 엇더한 태도를 취할가하는 기자의 질문에 대하여 선생은 「아마 형벌까지는 아니하겟지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하여 六穴砲나 軍刀로 위협까지는 하리다. 이것은 일인의 恆用하던 수단이닛가요. 그러고는 아마 隱居하는 名義로 유폐할 터이지오. 현금까지도 유폐엇지마는」

과연 적의 신문지에 전하는 水野라는 자의 言을 據하건대 장차 전하를 유폐하리라하며 또 전하에 관한 모든 비밀이 탄로된 것을 보건대 敵은 殿下 其他에 대하여 흉악한 위협과 惡刑을 가한 듯하다.

 

○1920년 1월 8일 (4면)

「의친왕과 임시정부」

의친왕이 상해로 來하려 하였음을 기화로 하야 교활한 敵衆은 이를 임시정부가 人心收攬의 一策으로 의친왕을 그 수령으로 삼으려함이라고 讒誣하도다. 그뿐더러 김가진 씨의 상해에 來함도 임시정부의 인심 收攪策의 一이라하도다.

去 8월 임시정부의정원에서 임시헌법을 통과할 時에 헌법 초안 중에 舊황실 우대의 一條가 엇더케 困難하게 통과된 기록을 보면 우리 독립운동의 정신을 알지오 또 김가진씨가 來滬한지 一朔이 넘되 임시정부에 아모 직임을 帶치 아니함을 보아도 이를 알것이라.

奸하고 愚한 敵이여 임시정부에 이미 대통령이 잇고 국무총리이하 각부 총장이 잇스니 의친왕이나 기타 황족 혹은 귀족을 어듸다 推戴하리오.

여운형씨가 동경서 聲言한 바와 갓히 황족이나 귀족이 新韓정부의 下에 來함을 환영하노라. 그러나 오직 대한민국의 一公民으로 환영할 뿐이다.

대한민국의 一公民인지라 만일 자격만 잇스면 엇더한 職이라도 帶할 수 잇스려니와 그러한 陋한 목적으로 인심을 收攪하는 窮策을 取하지 아니하더라도 二千萬 대한민족의 정신은 임의 민국임시정부의 下에 集하엿나니라. 아아 可憎하고 奸狡한 敵아.

 

○1920년 4월 15일 (2면)

「大同團員」

全南 寶城郡 藘洞面 廣谷里 志士 林樑均씨는 구례군 및 남하동 郡內에 居하는 名望家 등을 방문하고 대동단에 가입하기를 권유타가 去3월 23일 왜경의게 被促(捉되의 誤字인 듯함)었다고.

 

○1921년 3월 12일 (2면)

「대동단원 被捉」

군자금의 명의로써 金錢을 모집한 일로

경성사는 金秉璉(二五) 申鍾善(四一) 金枓百(二二)의 三人은 지난 달 대구 敵警의 손에 잡혀 檢事局으로 넘어갓더라.

前記 三人은 재작년 가을 이래로 대동단과 결탁하야 同團 총재 김가진씨와 및 同團 支部長 申德永으로부터 發한 군자금 모집증서를 밧어가지고 금전을 모집한 일이 발각되여 잡힌 바 되엇더라.

 

○1921년 4월 32일 (3면)

「대동단 控訴판결」

三人은 控訴 棄却 一人은 免訴

二人은 執行猶豫 二人은 服役

우리 독립운동의 一기관으로 조직된 대동단은 재작년 겨울에 의친왕을 상해로 다려 오려다가 적에게 발각되여 被捉된 전협씨의 一派는 敵의 第一審 판결을 불복하고 다시 控訴하엿더니 지난 二十二日에 左와 如히 판결되엿더라.

李乙奎 李建鎬 劉景根 (이상 三人 공소기각)

張鉉軾 金商說 각 징역 一個年 (각 二年間 집행유예)

朴源植 尹鍾奭 각 징역 一個年 (각 未決 拘留 日數 二百日 通算)

閔橿 징역 六個月 (미결 구류 日數 二百日 通算)

宋在鎬 免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