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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년기획]다·만·세 100년,3·1만세…외친 자, 외치지 않은 자, 외치다 만 자 100년 뒤 묻는다…당신이 꿈꾸는 나라는 무엇인가-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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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대…

등록일 19-02-11 22:25 조회 17,896
[신년기획]다·만·세 100년,3·1만세…외친 자, 외치지 않은 자, 외치다 만 자 100년 뒤 묻는다…당신이 꿈꾸는 나라는 무엇인가

<1부> 우리는 독립운동가입니다 ⑤ 친일파·독립운동가…다른 길 걸은 사람들

100년 전 3·1운동에는 당시 인구 10명 중 1명꼴인 200만여명이 참여했다. 그날 같은 선택을 했다고, 같은 인생을 살았을 리 없다. 적어도 200만 갈래의 길이 있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3·1 이후의 독립운동’ ‘왕이 없는 나라’를 꿈꾸며 나아갔다. 모두는 아니었다. 일부는 일제에 협력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200만명에 들지 않은 이들 중에는 3·1운동 참여 제안을 받고 거절한 당대 유력인사들도 있었다. ‘만세 부르길 거절한 사람과 부른 사람, 부르다 만 사람.’ 3·1운동 전후 세 갈래의 선택은 각자 인생의 변곡점이 되고, 기록이 되고, 역사가 됐다. 그 선택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으로 2019년에도 이어진다. 세 갈래 길을 걸은 이들이 피고인, 또는 증인으로서 남긴 ‘선택의 이유’를 일제 신문조서를 통해 살펴봤다. 

■ 만세를 부른 자 

‘피고인 손병희 외 361인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피고사건.’ 일제는 1919년 3월1일 경성의 3·1운동을 이렇게 불렀다.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민족대표 33인, 그중에서도 전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를 앞세워 명명한 것이다. 3·1운동의 핵심은 연령·성별·직업·지역을 특정할 수 없는 민중의 힘이었지만, 독립선언서를 내고 각 지역에 배부해 불씨를 댕긴 민족대표들의 역할도 컸다. 이들은 일제의 신문을 받으면서도 ‘3·1 이후의 꿈’ ‘독립 이후의 꿈’을 말했다. 

손병희는 그해 7월14일 세번째 피고인 신문을 받았다. 박영효와 윤치호가 다녀간 지 사흘 만, 같은 예심판사 앞이었다. 그는 ‘조선이 독립되면 어떤 정체의 나라를 세울 생각이었는가’라는 질문에 독립 이후 꿈꾸는 나라를 말했다. “민주정체로 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나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런 생각인 것으로 생각한다. 유럽전쟁이 한창일 때 교도들과 우이동에 갔는데, 전쟁이 끝나면 세계의 상태가 일변하여 세계에 임금이란 것이 없어지게 된다는 말을 한 일이 있다.”

‘민족대표 33인’ 
손병희·유여대
“민중이 중심되는 
민주국가 꿈꾼다”
 

함께 체포된 권동진 
“3·1운동, 독립의 씨앗”

33인 중 한 명인 유여대 역시 민중이 중심이 되는 나라를 꿈꿨다. 그는 그해 5월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신문을 받으면서 ‘독립해서 병합 전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독립을 하여 공화정부가 되고 열국의 대열에 서서 가도록 하고자 생각하고 있다.” 유여대는 3월1일 당일 신의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해 붙잡혔다. 

다들 이날의 만세가 바로 독립으로 이어질 거라고 믿진 않았다. 천도교 도사로 33인에 이름을 올린 권동진은 3·1을 ‘씨앗’으로 여기고, 그 이후를 꿈꿨다. “씨를 뿌려 두면 수년 뒤에는 반드시 그 결과로서 독립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민족대표들은 일제에 체포된 뒤 예상했던 대로 고초를 겪었다. 양한묵은 서대문감옥에서 그해 5월26일 옥사했다. 손병희는 1921년 가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이듬해 봄 숨졌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뒤에도 친일파의 길을 걸은 최린, 정춘수, 박희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민족대표는 각자의 방식으로 독립의 꿈을 쫓았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사장이었던 이종일은 2년6개월 옥고를 치른 뒤 고문 후유증으로 1925년 사망했고, 이종훈 역시 고문 후유증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1931년 병사했다. 

[신년기획]다·만·세 100년,3·1만세…외친 자, 외치지 않은 자, 외치다 만 자 100년 뒤 묻는다…당신이 꿈꾸는 나라는 무엇인가

■ 만세 부르길 거절한 자 

1919년 7월10일. 경성지방법원 예심계에 진풍경이 벌어졌다. 대한제국 시절 문신, 일제 작위를 받은 귀족 등 전·현직 고관대작들이 속속 도착해 일제 앞에 앉았다. 3·1운동이 있은 지 132일째 되던 날이다. 거리에서, 하숙집에서 붙들려간 참가자들이 모진 고문과 신문을 버텨나가던 시기다. 이날 온 고관대작들도 신문을 받았다. 단 ‘피고인’이 아닌 ‘증인’으로서다. 

조선총독부 예심판사 나가시마 유조는 3·1운동 참가를 권유받았지만 거절한 유력인사들에게 차례로 사정을 물었다. ‘누가, 언제, 어떻게 권유했으며 왜 거절했는가.’ 증인 중에는 일제의 작위를 거절한 뒤 칩거한 강석 한규설이나 석촌 윤용구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훗날 대표적 친일파로 꼽히게 된 이들도 다수 포함됐다. 박영효가 대표적이다. 

3·1운동 증인 출석한 
박영효·윤치호
만세 거절 이유 묻자 
“불가능한 일이니까”
이후 일제에 적극 부역
 

철종의 사위로 개화파 주축이었다가 친일파 거두가 된 인물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있는 박영효의 당시 증인 신문조서에는 ‘신분: 조선 귀족, 직업: 식산은행 이사’라고 기록돼 있다.

박영효는 3·1운동 직전인 1919년 2월 참가 권유를 받고 ‘백성의 지혜가 부족해 독립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거절했다고 진술했다. “나는 신용할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여 조선에는 인물도 없고 백성들의 지혜도 진보하지 못하므로 그런 일은 성취되지 못할 것이라고 하고, 참가하지 않겠다는 의미의 대답을 했었다.” 

그는 신문 중 일제의 식민지배를 인정하고 허용 범위에서 자치하는 ‘자치론’에 동조하고, ‘독립을 희망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당시 증인은 조선 독립운동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엔 “나는 그런 일은 성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답했다. 3·1운동 이후에도 일제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다. 일제는 <조선공로자>에 그의 이름을 올리면서 “(병합 이후) 새로운 정치를 펼치는 데 진력” “문정(文政)에 공헌한 바가 심대했다”고 평가했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라는 인생관으로 알려진 윤치호도 이날 불려왔다. 독립협회 활동, 을사조약 후 관직 사퇴,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 주모자 지목 등 초반 이력은 화려했다. ‘일본 천황’의 특사로 풀려난 뒤엔 서서히 변절의 길을 걸었다. 그는 이날 일제 판사에게 3·1운동 참여를 권유하러 온 학생의 실명을 말하면서 ‘너도 참가하지 말라’라고 만류했다고 진술했다. “정화기라는 의학전문학교 학생이 독립운동 가담 여부를 물으러 온 일이 있다. 그때 나는 결코 가입하지 말라고 설유했었는데 3월1일의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윤치호가 학생들에게 권유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는 이후 ‘징병제도 실시의 감격’ ‘총출진하라’ 등 글을 써 학생들을 일제의 전쟁터로 내모는 데 일조했다.

[신년기획]다·만·세 100년,3·1만세…외친 자, 외치지 않은 자, 외치다 만 자 100년 뒤 묻는다…당신이 꿈꾸는 나라는 무엇인가

■ 만세를 부르다 변절한 자 

독립의 꿈을 접은 이들 중에는 적극적으로 친일파가 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도 그랬다. 그는 당시 피고인 신문조서에서 애매한 입장을 취하면서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독립선언서를 쓴 이유를 묻는 데는 “나는 다만 부탁으로 쓴 것에 지나지 않고, 사람을 선동한다는 생각도 없고, 사람을 보낸 일도 없다”면서 “나는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판사가 소극적으로 참여한 까닭을 묻자 ‘정치에 취미가 없다’고 했다. “나는 대체로 정치에 취미를 갖고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학자로 처신할 의사이다. 근래 상업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아무래도 그런(독립) 운동 등을 하고 있을 수 없어 거절했었다. 다만 이번의 거사에는 동정을 가지고 있었다.”

독립선언서 쓴 최남선 
체포되자 “난 책임 없다”
출소 뒤 학병 권유문 작성 

하숙집서 검거된 김대우 
석방 뒤 ‘황국신민’의 삶

2년6개월 복역 후 그는 점차 친일의 길로 향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가 하면 ‘보람있게 죽자’ ‘나가자 청년학도야’ 등 글을 써 청년들에게 일제의 학병 지원을 권유하기도 했다.

김대우도 철저히 일제의 황국신민으로 변한 인물이다. 경성공업전문학교 학생으로 3·1운동에 참여한 그는 닷새 뒤 종로5정목 하숙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체포됐다. 

한 달 뒤 신문조서에서 그는 “독립될 수 있으면 독립하는 것이 좋으나 도저히 독립이 될 가망이 없으므로 지금은 독립을 희망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당시 모진 고문과 투옥 생활로 일제 앞에 이같이 말한 사람이 김대우만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이후 조선총독부 직원, 평안북도 박천군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전라북도지사 등 요직을 맡으며 일제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으로서 ‘황국신민서사’ 제정 계획을 세우고 집행하기도 했다. 일제가 내선일체·황국신민화를 추진하며 암송을 강요한 맹세다.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서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학생 시절의 외침과 정반대의 길로 간 것이다.

1919년 3월 만세를 부른 사람들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었다. 그 꿈은 ‘모두가 주인인 나라’이기도 했고, 3·1운동이라는 ‘씨앗’이 자라난 미래이기도 했다. 어떤 이는 꿈을 아예 품지 않았고, 어떤 이는 도중에 꿈을 꺾었다. 꿈을 지키고 행동했던 사람들은 100년의 시간을 넘어 묻는다. ‘당신이 꿈꾸는 나라는 무엇인가. 그 꿈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가.’ 

■특별취재팀 강병한(정치부) 유정인(문화부) 심진용(국제부) 박광연(사회부) 기자

[인터랙티브] 맹렬한 무장투쟁가, 아나키스트 역사가…나는 어떤 독립운동가였을까?
 
[신년기획]다·만·세 100년,3·1만세…외친 자, 외치지 않은 자, 외치다 만 자 100년 뒤 묻는다…당신이 꿈꾸는 나라는 무엇인가
 
100년 전, 대한독립을 주창하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태극기를 들었고 만세를 불렀고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평범한 이들에게 3·1운동은 삶의 전환점이 됐다. 독립운동가가 된 이들의 목표는 하나였지만, 택한 방법은 다양했다. 누군가는 만주에 정착해 무장투쟁단체를 조직했고, 누군가는 머나먼 미국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았다. 이념과 노선도 민족주의를 기본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여성해방 등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그렇게 같은 독립운동 안에서도 누군가는 맹렬한 무장투쟁가로, 누군가는 여성운동을 주도하는 대중운동가로 궤도를 달리했다. 만약 내가 독립운동가라면 그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내 선택과 가장 가까운 삶을 살았던 독립운동가는 누구였을지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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