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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양자강 강물 위에 뜬 대한민국임시정부 시절 이야기-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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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대…

등록일 19-02-25 10:27 조회 1,848
2017년 12월 16일,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 내외분 및 애국지사 후손, 정부 관계자와 함께 중국 충칭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중앙계단에서 환국 72년 만에 기념촬영을 하다(앞줄 왼쪽 두번째 문재인 대통령, 김정숙 영부인, 김자동 회장, 둘째 딸 김선현).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1945년 11월 3일, 중국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맞는 소감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머리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한 마디로 감개무량합니다. 1945년 11월 3일, 중국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기념 촬영을 했습니다. 재작년인 2017년 12월 16일, 바로 그 자리에서 72년 만에 대통령 내외분 및 애국지사 후손, 관계자 여러분과 함께 기념 촬영한 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감개 무량했습니다.
 
그때 그 자리를 지켰던 임시 요인 및 독립지사 어른들은 이미 작고하셨거나 살아계셔도 거동을 할 수가 없답니다. 다행히 나는 지팡이를 짚고라도 움직일 수 있었기에 둘째 딸(김선현)의 부축을 받으면서 대통령 내외분을 안내했지요. 아마도 하늘에 계시는 선열께서도 그날 그 장면에 감읍하셨을 겁니다.”

 
지난 1월 10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로얄빌딩 602호에서 만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에게 들은 첫 말씀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2019. 1. 10.)ⓒ 박도
 
삼일절 노래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은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초중고교 시절 삼일절이면 목이 터져라 불렀던 정인보 작사, 박태현 작곡의 삼일절 노래다. 하지만 올 2019년 삼일절은 그 노래의 의미가 여느 해와는 다르다. 흰옷 입은 우리 조상들은 일제의 총칼을 두려워 하지 않고,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방방곡곡에서, 해외 동포들이 사는 곳에서는 어디든 “대한민국독립만세!”를 부른지 꼭 100년이 되기 때문이다.
 
이 뜻 깊은 2019년을 앞두고 각 언론기관 및 출판사에서는 특집 제작을 진작부터 서둘러왔다. 기자도 작년 7월, 한 출판사로부터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임시정부사’ 집필 섭외를 받아 지난해 세모까지 그 집필에 골몰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 동안은 어렵지 않은 때가 없었다. 특히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의거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지로 이동해야 했던 ‘고난의 대장정’ 시기였다. 그 무렵인 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다. 그해 12월 일본은 난징을 점령한 뒤, ‘난징대학살사건’을 저질렀다.
 
그때 일본군은 이듬해 1월까지 40여 일 동안 일반 시민을 대량 학살했다. 그 학살자가 무려 3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중일전쟁 발발 4개월 만에 중국정부는 충칭으로 천도를 했다. 그러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급하게 배(목선)를 마련하여 난징을 떠났다. 그 시절 임시정부 안방 살림을 도맡았던 장정화(독립운동가 김가진의 며느리) 지사의 수기 한 대목을 보았다.
 
강물 위에 뜬 망명정부
 
우리(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는 큰 목선 하나를 세내었다. 그 목선은 백 명이 넘는 식구가 한꺼번에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넓었으며, 그 많은 사람이 배 위에서 지내는 데 필요한 부엌이나 변소 등 편의시설도 다 갖추어져 있었는데, 강물을 떠올려 간단히 몸을 씻을 수 있는 세수소도 있었다. … 밥은 삼시 세끼를 다 해먹을 수밖에 없었다. 큰 솥에다 지어 모두에게 나누어주고, 반찬만 제각기 몇몇씩 모여서 만들어 먹었다.
 
나는 석오(이동녕), 성재(이시영), 우천(조완구), 동암(차리석), 신암(송병조) 등 홀로 지내는 국무위원 전원을 돌봐드려야 했으므로 어디든지 배가 정박하기만 하면 육지로 올라가서 시장을 봐 오는 것도 일과 중의 하나였다. …임시정부의 살림이라는 것이 일정한 수입과 계획적인 지출로 짜임새 있게 운영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거의 주먹구구식에 가까웠다. 그러니 임정의 살림을 책임지는 일이란 그럴수록 어렵고 힘든 것이었다. 남모르는 가슴앓이로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
 
나처럼 임정 살림 뒤치다꺼리를 맡은 사람들은 돈이 필요할 때마다 그분들에게 손을 벌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지출금액을 일일이 장부에 기록할 만큼 임정의 살림은 형편없었다. 돈을 받아쓰는 사람의 마음도 성에 차지 않았지만, 푼전을 내주어야 하는 그분들의 심정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것이었으리라. 동암과 우천은 그런 궁색한 살림을 맡아하면서 자신들에게만은 특히 인색하게 대했을 터이니, 늘 가난에 찌든 모습이었다. - 장정화 지음 학민사 <장강일기> 158~161쪽 축약
 
 
어머니 정정화 독립지사와 아들 김자동(192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나는 이 대목을 읽다가 독립지사 정정화 어른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어른은 1991년에 선종하셨다. 그래서 대신 아드님에게 그때의 말씀을 듣고자 2019년 새해 시무식 날 아침,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로 다이얼을 눌렸다. 이일선 사무처장님이 반갑게 받았다. 그 사연을 곡진히 말씀드리자 김 회장님 일정과 조정하여 1월 10일 오후 2시로 대담 날짜를 잡아 주셨다.
 
약속날짜 이틀 전에 전화가 왔다. 그날 오후 2시로 정한 것은 점심시간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굳이 그날 11시까지 사무실로 와서 점심을 겯들여 대담을 나누는 게 좋겠다는 김 회장님의 뜻을 전하기에 감사히 받아들였다. 아마도 멀리서 찾아오는 손에게 밥 한 끼 대접하고픈 김 회장님의 따뜻한 배려였으리라.
 
추억의 장소
 
사실 나는 김 회장님과 연을 맺기는 오래되었다. 2000년대 초 조선일보사 옆 오양수산 건물 내에 있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는 그 무렵 독립지사 및 후손들의 사랑방이었다. 나는 그때 그곳에서 당시 민족문제연구소 조문기 이사장님을 연재기사 '의를 쫓는 사람' "내 죽으면 관에 '친일사전' 넣어주오"라는 제목으로 인터뷰한 바 있었고, 차리석 선생 자제 차영조 선생님도 처음 만났다.

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기관지 <독립정신>에 임정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행적과 [100년 편지]도 두어 편 게재했던 연유로 김 회장님을 두어 차례 뵌 적이 있었다.
 
올 연초까지 나는 오마이뉴스에 [NARA의 북한 측 노획물]이란 연재물을 게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 회장님 대담은 다소 시간상 여유가 있었지만 연로하신 분은 하루라도 일찍 뵙는 게 좋다는 내 나름의 체험 때문이었다. 그 몇 해 전, 백범 비서였던 선우진 선생과 대담 약속을 해두고 미적거리다가 부음에 무릎을 쳤다. 세월은 결코 사람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날(2019. 1. 10.) 새로 이사한 새문안길 임정기념사업회로 찾아가자 바로 세종문회회관 옆이었다. 그곳은 나에게 가난과 허기, 추위 등이 깃든 잊을 수 없는 장소였다. 1961년 당시 그곳은 종로구 도렴동으로 바로 그 골목 안에는 조선일보안국동보급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조선일보계동지구 배달 소년으로 학교더 다니지 못한 채 이른 새벽 골목길에서 입김으로 곧은 손을 녹이며 막 배달된 전지의 코리언리브블릭(현, 코리아헤럴드) 영자신문을 1/4으로 접었던 추억의 장소였다(당시 그 보급소에서는 영자지도 배달 취급했음).
 
그날 11시 정각, 임정기념사업회 사무실 초인종을 울리자 그 시간에 맞춰 미리 문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이일선 사무처징님이 반갑게 영접해 주셨다.
 
“찾느라고 고생하셨지요?”
“아닙니다. 쉬 찾았습니다.”

 
이 처장님의 안내로 회장실에 들어서자 김자동 회장님이 활짝 웃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올해 91세(1928년생)로 구순의 나이답지 않게 해맑은 상호(相好)였다. 하지만 귀는 다소 불편한 듯 보청기를 끼고 동석한 이일선 사무처장님이 큰소리로 나와 회장님간 의사 소통을 도와 주었다.
 
 
김자동 회장님과 기자가 손을 잡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의불삼세 불복기약
 
- 대한민국임시정부 간판을 여태까지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이끌어오신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별 일 아니에요. 내가 갈 곳이 없어 사무실을 마련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뿐이에요.”
 
말씀에서 겸손이 넘쳐흘렀다.
 
“'독립운동가들은 3대가 가난하다'는 말처럼 후손들은 모두가 어려웠어요. 다행히 나는 그분들보다 조금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사무실을 내고 임시정부기념사업회 간판을 달 수 있었습니다. 실은 늙은 내가 아무 데도 갈 때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 말씀에 함께 웃었다.
 
- 근현대사를 살아오시면서 웬만한 분 같으면 지조 없이 여러 정권에 기웃거리거나 적당히 발을 담그셨을 텐데, 초지일관 꼿꼿한 야인으로 살아오신 것은 대단한 기개요, 정신입니다.
 

“과찬입니다. 사람이 못났기 때문이지요.”
 
여전히 겸손의 말씀이시다. 해방 후 서울법대,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라면 그 어디에 갈 곳이 없었겠는가? 나는 그날 집으로 돌아와 친필사인을 해 준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 김자동 회고록을 읽어보니까 그동안 살아오시면서 여러 차례 역대 정권의 러브 콜도 받았다.
 
 
푸른역사 <영원한 임시정부소년> 김자동 회고록 속지의 친필서명ⓒ 박도
 
그 대표적인 것은 1961년 5.16 쿠데타로 민족일보가 폐간된 후 룸펜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때 쿠데타의 제2인자 JP(김종필)가 공화당 사전조직 작업을 추진할 무렵으로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당신 신념상 그 제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거절했다. 가장 큰 이유는 박정희가 조용수(민족일보 사장), 최백근(사회당 조직부장) 같은 사람을 사형시킨 것을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때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공화당 공천은 떠놓은 당상이요, 문공부 장관 자리도 한두 번 했을 거라고 했다.
 
한의학에서 “의불삼세 불복기약” (醫不三世 不服其藥)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의원을 삼대하지 않으면 그 의원 약을 먹지 말라”는 말로, 어떤 일을 하든지 삼대이상은 해야 진짜라는 말이다. 내가 십 수년 동안 여러 항일, 의병 가문의 문전을 기웃거려 보니까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지만 그 아들은 일본군 장교이거나 밀정, 순사였던 경우도 더러 있었다. 
 
삼일운동 100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맞이하는 이즈음이다.  할아버지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1846~1922), 아버지 성엄(誠广) 김의한(金毅漢1900~1964) 어머니 정정화(鄭靖和1900~1991), 손자 김자동(金滋東1928~) 삼대에 이르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의 독립투쟁사와 현대사 이야기는 진국일 것이다. 
 
해방 후 오만 잡스러움과 가짜들의 추악한 행태에 지친 우리들에게 김 회장의 진솔한 이야기는 아마도 깊은 산골 옹달샘에서 솟는 한 모금의 맑고 시원한 생명수일 것이다. 그 생명수로 우리의 목마른 갈증을 시원히 풀고 새로운 백성의 나라  '민국' 100년을 맞이하고 싶다. (다음 회에 계속)